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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 여행을 계속할 거예요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북적북적]

그저 이 여행을 계속할 거예요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30 : 그저 이 여행을 계속할 거예요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아뇨. 나는 내가 아팠던 시간을 지울 생각이 없어요.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그 모든 고통을 없었던 일로 하지 않을 거예요."

책 한 권을 집어들 때 우리는 막연히 그 안에서 일종의 결론 하나 정도씩은 기대합니다.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든, 내가 공감하거나 혹은 뚜렷하게 반대할 수 있는 통일된 사유를 접하게 되리라고 예상하는 겁니다. 오늘의 책은 그 예상의 경계선 바깥에 위치합니다. 아 안에는 '대답'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기도 하고, 어쩌면 전혀 없기도 합니다. 정리된 해답, 예정된 길, 마땅한 결론이라는 건 역시 없을지도 모른다는, 질문에 가까운 대답 비슷한 것만이 이 안에서 찾게 되는 소중한 이야기에 가장 가깝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걸을 것이라는 '느낌'이 가슴을 가득 채울 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월 말에 출간된 따끈한 신간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는 올해 33살로 접어드는 술라이커 저우아드라는 여성이 썼습니다. 친구들 사이 애칭은 '수수'로 통하는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프린스턴 대학을 갓 졸업하고 언론인으로서의 첫 발을 떼기 일보 직전이었던, 똑똑하고 자유롭고 자기 삶에 대해 야심만만한 22살짜리 여성이었습니다. 뉴욕에서 태어나 지적인 부모 밑에서 자랐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를 오가면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관계로 막 발전하기 시작한 멋있는 남자친구도 생겼습니다. 이 22살의 어느 날, 수수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루케미아)라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아주 공격적인 암으로, 수수 또래의 젊은이가 이 병에 걸려서 생존하는 확률은 현대의학에서도 35%밖에 되지 않습니다.
 
"스물 두 살에 암 진단을 받으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쓰러져서 흐느껴야 하나? 기절하거나 비명을 질러야 할까?
그 순간 어떤 감정이 몸속에 솟구쳐 흘렀다. 전혀 예상치 못했고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 감정, 바로 안도감이었다. 몇 달이나 오진 속에서 갈팡질팡한 끝에 마침내 나를 괴롭혀온 가려움, 구내염, 무력감의 원인을 밝혀낸 것이다. 나는 거짓 증상을 만들어내는 건강 염려증 환자가 아니었다. 내 피곤함은 지나친 유흥이나 현실에서의 부적응 때문이 아니라, 내가 또렷이 발음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질병의 결과였다.
그 뒤로 의사가 말한 내용들, 상황이 심각하니 당장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말들은 그저 아련한 잡음처럼 귓가를 스쳤다. 의사가 메스를 들고 나를 내려다보며 내 인생을 난도질하고 내 자아를 두 개로 쪼개놓으려 한다는 느낌뿐이었다. 파리에 있던 술집 '동 주앙'에서 마리아치 가수들의 노래에 맞춰 춤추며 친구들에게 환호와 휘파람을 끌어내는 나와, 매일 밤 문병객들이 돌아간 삭막한 병실에서 흐느껴 우는 나.
백혈병 진단은 내 삶을 돌이킬 수 없이 둘로 갈라놓았다. 그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수수는 살아남게 되는 35% 중의 한 명이 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수수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바로 그 살아남는 게 확실해진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투병기이기도 하지만, 투병 이후의 회복기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다는 게 이 책의 남다른 점입니다. 먼저 떠나보낸 65%의 친구들과 그 가족들의 몫까지 영혼 속에 짊어진 채로 다시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여정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번역서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되는 시점에 현지 출간으로부터 시차가 크게 나는 책들도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원제: Between Two Kingdoms)]는 미국에서 원서가 처음 나온 것도 지난해 2월입니다. 세상의 빛을 본 지 1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현지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난해는 (미국 입장에선) 코로나19 대유행의 회복기 첫 단계였던 만큼, 자기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이 책에 감정이입하게 되는 독자들이 더 많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끔찍한 병, 또는 사건사고, 어떤 충격이 삶에 느닷없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기에 그 시기가 지나갔다고 판단될 때쯤 되면, 사람들은 "그만하면 다행이었어" "지금부터 다시 원래 생활로 잘 돌아가면 돼" 류의 위로를 많이 꺼냅니다. 저 역시 그런 비슷한 말들을 누군가를 향해 주워섬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충격을 겪은 사람들이 정말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일까.

저는 수사물, 범죄물, 법정물 장르의 드라마를 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들을 재밌게 보면서도, 볼 때마다 늘 마음이 불편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사물에는 거의 모든 에피소드마다 각각 다른 피해자가 등장합니다. 그런 피해자들은 (죽는 사람도 많지만) '죽지까지는 않더라도' 커다란 상처와 충격을 떠안은 채 남겨집니다. 그런데 수사물 드라마들은 대체로 피해자들이 '죽지만 않으면', 일단 그 에피소드는 '그나마 다행이다'의 분위기로 전개되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죽지 않은 게 확인되는 시점부터, 피해자의 이야기나 고통은 '불행 중 다행이다'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피해자가 맞닥뜨려야 하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후폭풍은 실은 그때부터 비로소 시작입니다. 길을 가다 누가 갑자기 내 뒤통수를 단 한 대 치고 지나간 기억이 있다 해도, 그 불행의 끔찍한 임의성 때문에 평생 악몽을 꿀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 중 다행"이라는 위로를 너무 쉽게 건네는 것은 아닐까. "지금부터 다시 원래 생활로 돌아가면 돼" 라는 위로는 그 고통의 실재를 마주보기가 너무 괴로운 주변 사람들이 도망가면서 꺼내는 말일 수 있습니다. 정작 당사자, 그리고 그를 사랑하며 계속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시 삶과 마주서게 될까요. 그들이 실제 겪는 삶은 어떠하며, 들려주고 싶은 진짜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요.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에는 차분하면서도 강력한 그 육성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이중국적을 갖고 태어난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좋은 여권만을 사용하길 바라지만, 누구든 언젠가는 잠시나마 다른 쪽 왕국의 시민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 화학요법 치료를 끝냈을 무렵 나는 성인기의 대부분을 다른 쪽의 왕국, 아무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질병의 왕국에서 보낸 후였다. 처음에는 그곳을 빨리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나는 여행 가방도 풀지 않았다. '암 환자'로 불리는 걸 거부했고, 지금껏 살아온 '나'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병이 심해질수록 예전의 모습은 사라져갔다. 환자번호가 내 이름을 대체했고 입에서는 의료용어가 술술 흘러나왔다. 심지어 분자 단위의 정체성마저 변모했다. 동생의 줄기세포를 내 골수에 주입하면서 DNA도 영구 변이되었으니까.
…..(중략)….. 영웅담은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 구조다. 생존자는 영웅과 마찬가지로 치명적 위기와 직면하여 불가능에 가까운 시련을 극복한다. 온갖 고난을 견디며 맞서 싸운 대가로 그는 더 선량하고 용감해지며, 승리를 거둔 뒤 더욱 지혜로워지고 삶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전에 살던 세계로 돌아온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영화와 책, 모금 운동과 병문안 카드를 통해 이런 서사를 계속 접했다. 이처럼 문화적으로 단단히 각인된 클리셰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그러한 서사를 내면화하지 않고, 거기에 나를 맞출 필요는 없음을 깨닫는 건 더욱 어렵다."

수수의 투병기에는 이른바 "불행 중 다행이다"의 면모들이 조금씩 들어 있습니다. 동생으로부터 골수를 이식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35%의 생존자 관문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었으며, 부모님과 주위의 넘치는 사랑과 걱정을 받습니다. 암 진단 직전에 고작 몇 달 만났을 뿐인 20대 남자친구가 자신의 젊음과 커리어를 유예해 가며 몇 년 동안 헌신적으로 수수를 돌보아 주기도 합니다. 누가 보아도 감히 엄두 내기 힘든 사랑입니다. 그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수수가 느끼는 상실감이나 외로움이 결코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남자친구와 이별하게 될 때 '남자 놈이 나쁜 놈이라 아픈 애를 버리고 떠났다!'고 대충 말해버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란 위로처럼 수수를 외롭게 하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큰 고통이 어떻게 불행 중 다행일 수 있겠습니까. 이 책에서 수수뿐 아니라 수수가 투병과 회복의 여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커다란 병이 발생하는 순간 '나'라는 사람은 사라져 버리기 쉽다'는 겁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느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나를 나로 본다기보다 병을 겪은 사람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보거나 아예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그래서 내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더더욱 요원해집니다. '병'이라는 단어의 자리에 '사건'이나 '사고', '불행'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수수의 투병기입니다. 이 부분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수수가 22살에 시작한 투병은 26살 무렵에 어느 정도 마무리됩니다. '마무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전히 정상적이지 않은 몸과 재발에 대한 가능성을 동반한 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보기에는 고비를 지났다고 하는 그 시점부터, 이 책의 후반기, 수수의 외로운 회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낭독에서는 이 후반기에 좀더 중점을 두어 읽었습니다.
 
"이런 모순은 나를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의 수렁에 빠뜨린다. 암이 재발할까? 네 시간씩 낮잠을 자야 하고 여전히 부실한 면역계 떄문에 규칙적으로 응급실에 가야 하는 내가 대체 어떤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담당 편집자는 칼럼 연재를 재개하자고 자꾸 나를 졸라댄다. 독자들이 내가 잘 지내는지, 암이 나은 이후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해한다나. 하지만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아도 나오는 것은 거짓말뿐이다. 나도 독자들이 바랐던, 그리고 나 또한 오랫동안 그렸던 결말을 들려주고 싶다. 윌과 내가 여전히 함께 살며, 오랫동안 미뤄온 결혼식을 마침내 치를 수 있게 되었다고. 마라톤 대회에 나갈 것이며 머나먼 지역에서 취재 기자로 일하는 중이라고. 그리고 아기도 가졌다고. 이렇게 쓸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상상했던 회복기와 실제로 맞닥뜨린 현실을 조화시킬 수 없었기에, 나는 칼럼 연재를 영구 중단한다. 비정기적으로 강연을 하고 부동산 투자회사에서 시간제 근무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간다. 침대에서 원격 근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안정감도 보람도 느낄 수 없는 일이다. 친구는 거의 만나지 않는다. 끔찍한 세 가지 질문을 들어야 하기 떄문이다. '건강은 좀 어때?' '윌과는 어떻게 된 거니?' '이제 어떡할 거야?' 결국 나는 아예 외출을 하지 않게 된다.
(……. 중략…….) 우울감이 바닥을 치면 다시 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치료를 받던 시기의 명료한 목표의식이 그립다. 죽음을 직시하며 세상을 단순하게 느끼고 정말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던 그때의 감각이 그립다. 병원 내의 생태계가 그립다. 그곳에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았는데, 그곳에서는 모두 함께 망가져 있었지만, 이곳 산 자들의 세계에 오니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진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중략…….) 내가 사랑한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나만 살아남았다. 이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치료를 받으며 만난 열 명의 내 또래 암 환자 중 지금껏 살아 있는 건 겨우 셋뿐인데.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마음을 굳혔다. 계속 이대로 지낼 순 없어. 뭔가 달라져야 해. 어쩌면 모든 것이."

수수는 투병 기간에 투병 외에 무엇이라도 스스로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프로젝트를 찾다가 블로그를 운영했습니다. 그 블로그가 수수 같은 환자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관심을 끌면서, 뉴욕타임스로부터 칼럼 연재 제안을 받게 됩니다. '중단된 삶'이라는 제목으로 병을 경험하는 수수의 이야기를 나누자, 다른 아픈 사람들, 또는 가족의 자살처럼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큰 사건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 수수에게 편지를 보내 고통과 공감을 나눕니다.

하지만 22살에 시작된 투병이 4년을 지나 남들 보기엔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26살이 되자, 오히려 본격 투병이 끝난 이후로 자기 삶을 어떻게 걸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던 수수는 (방금 인용한 대목에도 나오듯이) 정작 뉴욕타임스 연재마저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위기감에 도달한 수수는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그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미국 대륙 횡단 자동차여행을 홀로 떠납니다. 물론 아직 몸은 완전하지 않고, 육체적으로는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 여정에서 수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병이 완치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건강한 사람은 짐작하지 못하는 컨디션의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자살을 겪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잘못된 과거 때문에 무기수로 여생을 살게 된 남자도 만납니다. 그들 모두가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같으면서도 다른 여정을 들려줍니다.

수수는 단언합니다. 병이 나기 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어떤 일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흔히 막연히 떠올리는 '정상'이라는 지역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애초 우리 삶에 그런 '정상'의 면적이 얼마나 될까. 원래부터 정해진 답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기는 한 걸까. 원래대로. 제자리로. 응당 그래야 하는 어떤 결론으로. 그런 것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정의 막바지에서 수수는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전부 없던 걸로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자신의 삶에 고유하게 일어났던 그 고통을 수수는 이제라도 지워버리고 싶을까. 발병으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 수수가 이 질문에 내놓은 답을,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은 수수가 내놓은 그 대답에 이르기까지 수수의 여정입니다. 수수의 삶도,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도, 아직 마지막 목적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저마다의 여행입니다.
수수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떠나왔던 원점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미리 그려진 예정 경로 같은 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수수와 수수가 만나는 사람들의 대화가 매일매일 각자의 자리에서 새롭게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많은 것을 들려줍니다. 이제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를 직접 펼쳐서 함께 대화해 주신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윌북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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