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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우리 마음속의 시네마천국, '원세컨드'를 찾아서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씨네멘터리] 우리 마음속의 시네마천국, '원세컨드'를 찾아서
  연휴에 영화 《시네마천국》을 다시 보았다.(고 생각했다) 줄거리는 아는대로인데 이상하게도 영화의 첫 숏인 바다가 보이는 실내를 보여주는 롱테이크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 숏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시네마천국》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서 《시네마천국》의 줄거리를 주워 듣거나 읽어서, 또는 TV를 통해 주요 장면들을 자주 봐서 본 것처럼 착각했을 수 있다. 영화란 게 그렇다. 반은 현실이고 반은 환상이다. 
 거의 보통명사화하다시피한 《시네마천국》은 영화팬과 영화 자체에 바치는 찬사이자 송가다. 이제 그 리스트에 영화 한 편을 추가해도 좋을 듯 하다. 이번에는 동양 버전의 시네마천국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감독 장이머우의 신작 《원세컨드》(원제: 一秒種)가 바로 그 작품이다. 《시네마천국》을 다시 찾아본 것은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시네마천국》의 시대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인 194-50년대의 이탈리아 시칠리아. 《원세컨드》는 그보다 20여년 뒤인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 간쑤성의 둔황지역이다. 시칠리아에는 '시로코'(맞다. 폭스바겐 차 이름을 여기서 따왔다. '골프'처럼)라 불리는 고온건조한 사막의 바람이 불어오고, 둔황에는 고비사막의 모래 바람이 분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중국이 더 낙후해 보인다. (《원세컨드》는 2019년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가 "기술적인 이유"로 갑자기 출품을 철회했는데, 당시 외신은 중국 정부의 개입을 의심했다)

장주성은 딸이 나온 1초의 필름을 보기 위해 노동교화소를 탈출했다 사진: 찬란

  수입사가 한줄로 간추린 《원세컨드》의 로그라인은 다음과 같다.
‘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단 1초를 위해 필름을 찾아나선 남자의 이야기’  

 영화는 장주성이라는 남자가 하염없이 사막을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래 전 헤어진 딸의 모습이 영화 전에 상영하는 뉴스필름에(우리로 치면 대한뉴스)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이 노동교화소 탈출을 감행해 영화를 보러 가는데, 동생을 위해 영화 필름통을 훔치는 억센 소녀와 맞부딛혀 필름통을 놓고 뺏고 뺏기는 소동을 벌인다. 지금이야 디지털 상영으로 바뀐지도 10여년이 흘러 필름통 구경할 일이 없지만, 거의 목숨걸고 필름통을 사수하려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필름이라는 물질이 있어야 영화를 볼 수 있던 시절의 아련함이 밀려온다. 
 그런데 장주성의 부성애(父性愛)보다, 소녀의 가족애보다 더 강해 보이는 건 영화에 대한 민중(老百姓)의 집념에 가까운 애정이다. 옆 마을 협동농장에서 상영을 마친 필름통을 공수해오던 이의 실수로 필름 한통이 수레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끌리면서 훼손되자 마을 사람들은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크게 낙담한다. (비유하자면 와이파이는 물론 LTE도 먹통이 돼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절망에 빠진 현대인과 비슷한 반응이랄까) 

"영화를 보는 날이 설명절"

 이때 제2농장의 유일한 영사기사로 마을 사람들이 아예 "판영화"(성씨가 판이다)라고 부르며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판웨이가 정 영화가 보고 싶으면 이 방법밖에 없다며 아이디어를 낸다. 마을 사람들 수십명은 판영화의 지시대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물을 끓여 얻은 깨끗한 증류수를 대야에 담아서 삼삼오오 극장 앞에 모인다. 판영화와 장주성, 그리고 남녀노소의 마을 사람들은 길고 긴 필름을 다 풀어 빨랫줄에 널어 늘어뜨린 뒤 증류수로 깨끗이 닦은 뒤 스크린 뒤에 빨래 널듯 널어 부채질까지 해가며 말린다. 이윽고 필름이 다 마르자 판영화가 영사기에 필름을 건다. 영사기가 빛을 내뿜으며 촤르르 돌아가고, 긴장 속에 지켜보던 스크린에 영화가 뜨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 터져나온 그 설레임 섞인 환호성이란. 영화 속 판영화의 대사 한마디는 70년대 중국의 인민들에게 영화란 무엇이었는지 말해준다. 
 “이들에게 영화를 보는 매번이 설명절이나 마찬가지지”(每回就跟过年一样)

필름을 증류수로 닦고 있는 마을 사람들. 사진: 찬란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 《원세컨드》란 주인공의 딸이 나오는 뉴스필름의 단 1초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단 1초의 영화라도 보기 위해 애쓰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함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에서도 그러지 않았던가. 영화가 뭐라고 영화 한편 보기 위해 세 시간씩 의자들고 기다리고, 영화 전편의 대사를 이미 다 외울 정도로 봤는데도 또 보면서 눈물짓고. (이 관객, 실시간스포대마왕이었다)

   《원세컨드》의 시대에서 6-7년 뒤 어느 날 저녁, 나는 옆동네 도로변 공터에서 세워진 천막 극장에 앉아있었다. 상설 극장이 아니라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공터에 목봉을 세워 흰 천막을 두르고 영화를 트는 이동 극장이었다. 얼마를 주고 들어갔는지,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여튼 의자도 없는 흙바닥에서 뻥뚫린 하늘에서 별이 반짝이는 가운데 영화를 봤다. (써놓고 보니 내가 6,70대여야 가능할 얘기처럼 들리는데, 그런 건 아니다) 먼저 상영했던 건 당시 인기있었던 이소령내지 성룡이 나오는 홍콩 무술영화였던 것 같은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건 다음으로 상영했던 이낙훈, 유지인 주연의 공포영화였다. 영화의 시작,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밤, 카메라는 작은 마당이 있는 개량 한옥을 부감으로 잡는다. 그런데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컷. 다음 숏으로 넘어가자 클로즈업된 아기 얼굴이 나타나는데 세상에, 고양이 얼굴을 한 아기가 태어난거다. 정말 무서웠다. 아마도 내가 TV에서 본 영화를 제외하고는 처음 본 영화였을텐데 첫 장면의 카메라 앵글과 화면 사이즈까지 다 기억난다. (이글을 쓰면서 검색해보고 알았는데, 장일호 감독의 1975년도 작품 《정형미인》이란 영화다) 영화는 이렇게 한 사람의 머리와 가슴 속에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스토리'가 된 영화,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다

   우리는 왜 영화를 볼까. 그것은 영화가 꿈과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야말로 이야기를 가장 이야기답게-온몸의 감각으로 다 이용해서- 풀어내는 매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스티븐 제이 굴드나 스티븐 핑커 같은 과학자, 그리고 조지프 캠벨같은 신화학자는 스토리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진화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문자 시대 이전에 인류는 구술, 즉 이야기의 형태로 문명을 전수해왔고, 문자 시대 이후에도 상당기간 엘리트 계급을 제외한 계층에서는 구술 형태의 이야기가 오락과 정보의 전파자였다. 지금도 우리는 일터와 가정에서, 가족 간, 연인간, 동료간에 이야기의 형태로 정보와 감정을 주고 받는다. 
  19세기 후반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탄생시켰을 당시 영화는 스토리(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벤트에 더 가까웠다. 1분 남짓한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1895)은 열차가 도착하고 승객들이 내리고 타는 장면이 내용의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의 기차가 점점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관객들은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영화가 스토리가 된 것은 조르주 멜리에스가 ‘편집’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스토리는 내러티브에 플롯을 배합한 것이듯, 영화에 편집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자 영화는 스토리가 되었다. 시간을 뛰어넘고 공간을 가로질렀다. 판소리로 펼쳐지는 심청전이 그렇듯 말이다. 영화는 시청각적인 스토리이고, 스토리는 인간의 본능이다.

  1990년대에 이탈리아 연구진은 원숭이 연구를 통해서 뇌에 ‘거울신경세포’가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원숭이들이 견과를 집을 때 활성화된 뇌 영역이 다른 원숭이가 견과를 집는 것을 볼 때도 동일하게 활성화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정설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인간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다는 것이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통해 확인됐다. UCLA 뇌신경과학자 마르코 이아코보니는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실제처럼 느끼는 것은 “뇌 속의 거울 신경세포가 화면에 보이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너선 갓셜, 《스토리텔링 애니멀》, 《퓰리처 글쓰기 수업(Storycraft)》에서 재인용)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큰 스크린에 집중해 주위의 관객이 발신하는 미묘한 정서적 주파수를 함께 느끼며 스타에 감정이입해서 보는 영화적 체험은 인간의 스토리 본능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그 빛의 마술(조르주 멜리에스는 실제로 마술사였다)에는 수많은 제작스태프들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대규모 자본과 기술이 압축돼있다. 감독과 작가들은 이야기를 짜내고 벼리느라 짧게는 1~2년에서 길게는 10년까지도(오징어게임) 스토리를 붙잡고 있다. 이런 이야기가 영화의 '원세컨드'(one second)마다 담긴다. 우리가 영화에 매혹 당하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요즘 관객에게 한 영화의 생명력은 3~4주"이며, "영화는 본래 기술과 함께 나아간 매체"로서 "이 시대를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기술과 관념을 배워야 한다"(《씨네21》1342호 인터뷰)는 장이머우 감독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 영화에 대한 추억이 있다. 《원세컨드》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영화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인가요? 영화 속 인물들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당신은 이 은막의 빛과 그림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당신은 마지막까지 평생, 이 빛을 좇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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