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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중국, 나문희는 되고 엑소는 안 된다?…여전히 높은 한한령

중국 매체 신경보에 10일 '한국 국민엄마 나문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나문희는 3일 중국에서 개봉한 영화 '오! 문희'의 주인공 오문희를 연기했습니다. 신경보는 이 기사에서 "진실하게 살지 못하면 연기도 거짓으로 변한다"는 나문희의 말을 소개하며, 나문희가 살아온 길, 연기 경력 등을 상세하게 소개했습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배우'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신경보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 광명일보와 남방일보가 공동 창간한, 베이징에 기반을 둔 가장 큰 지역 매체로 지금은 공산당 베이징시위원회 선전부가 발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신경보는 나문희 기사를 10일 머리기사로까지 올렸습니다. 당장이라도 한한령(한류 제한령)이 풀릴 것처럼 보였습니다.

중국 매체 신경보가 10일 게재한 기사 '한국 국민엄마 나문희'

중국 매체 나문희 찬사…'오! 문희' 개봉, 서훈 실장 방중 선물?


영화 '오! 문희'의 중국 개봉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1일이었습니다. 하루 앞선 지난달 30일 중국 국가영화국의 심의를 통과한 건데, 그동안 '베테랑', '써니' 등 일부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중국 영화들이 개봉한 적은 있지만 한국 영화가 중국에서 정식 개봉한 것은 2015년 영화 '암살' 이후 6년 만에 처음입니다. 2016년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한반도에 배치된 이후 중국의 한한령이 내려지면서 중국 스크린에서 한국 영화는 자취를 감췄습니다.

신경보는 나문희의 이 사진과 함께 위 기사를 머리기사로 실었다.

아직도 중국에서는 심의 통과를 기다리는 한국 영화들이 많습니다. 아카데미상 등 전 세계 영화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한국 영화들을 놔두고 왜 '오! 문희'였을까요? 정답은 중국 당국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합니다. 정세교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오! 문희'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코믹 수사극 형식의 가족 드라마입니다.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인 오문희와 아들이 용의자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국내에선 지난해 9월 개봉해 35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습니다. 중국 당국 입장에선 '덜 자극적이고' '덜 파괴력 있는' 영화로 '오! 문희'를 택했을 수 있습니다. 가족과 사회 단결을 중시하는 중국 문화에 적합하고, 청소년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이 한류의 강력한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중국은 최근 무질서한 팬덤 문화 등을 이유로 자국의 연예 콘텐츠 산업에 대해서도 규제를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영화 '오! 문희'는 국내 개봉 이후 이른바 '해적판'이 중국으로 들어와 음성적으로 이미 이 영화를 본 중국인들이 꽤 많습니다. 이미 볼 만한 사람은 다 본 셈입니다. 중국 당국의 '예상'대로 '오! 문희'의 중국 개봉 실적은 썩 좋지는 않습니다. 개봉 10일째인 12일까지 '오! 문희'의 중국 누적 관객 수는 7만 명이 조금 넘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상영되고 있는 35개의 영화 중에 박스오피스 2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 '오! 문희'는 중국 박스오피스 22위를 기록하고 있다.(출처=마오옌)

영화 개봉 시점을 놓고는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의 방중과 연계시키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서훈 안보실장은 2일 중국 톈진에서 양제츠 중국 공산당 외교담당 정치국원과 회담했습니다. 방중 사실이 공개된 것은 1일로, 영화 '오! 문희' 개봉이 알려진 시점과 같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서훈-양제츠 회담이 끝난 날입니다. 서훈 안보실장은 3일 귀국 전 중국 특파원과의 간담회에서 "두 나라 간 게임·영화·방송·음악 등 문화 콘텐츠 분야의 교류·협력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협력을 강화하자고 강조했다"며 일례로 영화 '오! 문희'의 개봉을 언급했습니다. 서 실장은 "우리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른 것으로 한중 문화 콘텐츠 교류가 다시 확대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영화 '오! 문희'의 중국 개봉이 서훈 실장의 방중에 대한 중국 측의 선물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엑소 중국 시상식 출연 무산…수상 소감 없이 달랑 10초 소개만


앞서 서훈 실장이 언급했던 사례에는 '아이돌 그룹 엑소(EXO)의 중국 텐센트 뮤직 어워드 화상 출연'도 포함돼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는 무산됐습니다.

텐센트 뮤직 어워드(TMEA)는 텐센트 뮤직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연말에 개최하는 시상식으로, 중국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텐센트 뮤직 어워드 주최 측은 지난 2일 시상식 개최를 미리 알리면서 엑소의 포스터와 엑소의 참석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엑소 멤버 카이와 세훈이 그룹을 대표해 참석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직접 참석하지는 않고 온라인 VCR 형식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한령 이후 한국 영화뿐 아니라 K팝 무대도 중국에서 막혔습니다. K팝 가수들의 음원은 중국에서 살 수 있지만, 이들의 뮤직비디오 상영은 제한됐고, 한국 가수들이 중국 무대에 서는 것은 더더욱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2019년 한류스타 비(정지훈)가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문명 대화 대회' 문화 행사에 참석한 것이 유일했지만 이마저도 다른 중화권 톱스타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K팝의 대표 그룹 중 하나인 엑소가, 중국 최대 무대에, 그것도 중국인들이 생방송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출연한다고 하니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한한령이 풀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졌습니다.

텐센트 뮤직 어워드 측이 2일 공개한 엑소 포스터와 알림 글. 카이와 세훈이 대표로 출연한다고 돼 있다.

이런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변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텐센트 측은 지난 8일 엑소가 등장한 포스터를 삭제하더니, 카이와 세훈이 출연한다는 글도 삭제했습니다. 참석이 취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키웠습니다. 우려는 현실화됐습니다. 11일 저녁 7시(한국 시간 저녁 8시)부터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시상식에서 엑소가 나온 분량은 단 10초에 불과했습니다. "해외 베스트 그룹상에 엑소"라고 발표한 뒤 엑소의 기존 공연 영상을 짧게 보여준 게 전부였습니다. 사전 녹화된 수상 소감도 없었습니다. '해외 베스트 그룹상'은 텐센트가 음원 판매한 수입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차지한 해외 가수에게 주는 상으로, 사드 사태·한한령 이후에도 한국 가수와 그룹이 수상한 사례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특이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도 이미 녹화된 수상 소감 등은 전파를 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대만 잔뜩 높여놓고 오히려 이전보다 못한 수준으로 방영된 것입니다. 실망이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텐센트 뮤직 어워드 방송에서는 엑소의 기존 공연 영상 편집본 10초만 내보냈다. (출처=웨이보)

텐센트 측은 아직 이에 대한 해명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엑소의 출연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 팬들의 기대가 너무 커지자 수위를 낮췄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은 무질서한 팬덤 문화를 이유로 자국 연예인은 물론, 연예 콘텐츠 산업 전반에 대해 각종 규제를 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들에게 영향력이 큰 K팝 스타를 실시간으로 출연시킬 경우 자신들의 정책 기조와 맞지 않다고 봤을 수 있습니다. 중국 당국이 텐센트에 개입했을 수도 있고, IT 규제 등 최근 중국 당국으로부터 갖은 규제를 받고 있는 텐센트가 알아서 몸을 낮췄을 수도 있습니다.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중국 네티즌들은, 특히 중국 내 엑소 팬들은 "텐센트가 거짓 광고를 했다", "엑소를 보기 위해 밤늦게까지 대기했는데 시간만 낭비했다"는 불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중국은 내년 하반기 시진핑 주석의 3연임, 장기 집권을 앞두고 국가의 기조를 바꿔 나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개혁 개방'에 대한 반작용으로 '공동 부유'를 내세워, 자본주의적 요소를 줄이고 사회주의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2차 문화대혁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거로의 회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면에는 중국인들이, 특히 미래를 이끌 청소년들이 무분별한 자본주의 문화, 서구 문화에 물들지 않게 함으로써 당국의 이들에 대한 사상 통제가 가능하도록 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 역시 사회 통제의 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베이징 소식통은 "사드 보복 차원을 넘어, 한류 문화 중에서도 사회 통제에 위협적이라고 판단될 경우 당분간 계속 빗장을 걸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습니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을 때,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지렛대로 이용하기 위해 조금씩 한류 콘텐츠를 받아줄 수 있지만 이전처럼 전면적인 개방은 어려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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