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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식탁'을 추적하다 - 천운영 '돈키호테의 식탁' [북적북적]

'돈키호테의 식탁'을 추적하다 - 천운영 '돈키호테의 식탁' [북적북적]
북적북적 314: '돈키호테의 식탁'을 추적하다 - 천운영 '돈키호테의 식탁'


 
"인생 별거 있소? 살거나 죽거나지. 그러니 있는 그대로,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면서 평화롭게 함께 먹도록 합시다. 하느님이 아침을 여실 때 모두를 위해 여시는 것 아니겠소?"

산초가 그토록 좋아하는 오야 포드리다처럼. 온갖 고기와 채소를 넣고 한데 끓인 바로 그 음식처럼. 모두 다 같이 모여 한 솥 가득 끓인 고깃국을 사이좋게 나눠 먹는 세상. 그렇게 매일 아침을 함께 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산초는 갈수록 옳은 말만 하고, 갈수록 현명해진다.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도 스페인 사람으로 가장 유명한 이를 꼽아보면 누구일까요. 아마도 가상의 인물이긴 하나 이 사람 아닐까 합니다. 돈키호테.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그 이름은 산초입니다. 스페인의 대문호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읽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떨쳐 일어나 스스로 기사가 되어 모험을 떠납니다. 자기가 지은 이름이 돈키호테 데 라만차입니다.

4백여 년 전 출간돼 세계 최초의 근대 소설로 꼽히고 전 세계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이라는 건 제가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 돈키호테가 고향에서, 그리고 모험을 떠나 곳곳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마셨는지에 특히 주목한 책은... 아마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글로 쓰인 책은 이 책이 최초 아닐까 합니다. 오늘 북적북적의 선택, 천운영 작가의 <돈키호테의 식탁>입니다.
 
"좀 미친 짓이었다. 돈키호테와 같았다. 스페인어 전공자도 아니고 요리사도 아닌 내가 돈키호테의 음식을 찾아 나선다는 것. 그건 어떤 외국인이 전주에서 콩나물국밥 한 그룻 먹고서는 그게 <홍길동전>에 나왔다는 소리를 듣고, 전국 팔도를 누비며 홍길동의 자취를 쫓아 조선 시대 음식을 찾아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반벙어리 까막눈 주제에. 무려 400년 전 음식을 먹어 보겠다니. 그런데 그만둘 수가 없었다. <돈키호테>에 빠져들수록, 그 길을 따라다닐수록, 더 깊게 빠져들었다." -<들어가면서>에서

책을 쓰게 된 계기부터가 재미납니다. 어쩌다 스페인에 머물게 됐고 돈키호테의 고향인 라만차에 갔다가 들른 식당에서 '돈키호테'라는 이름이 붙은 음식을 주문해 먹고는 소설을 읽고 다시 그 식당에 가서 확인해보고 그렇게 소설 속 음식 추적에 나서는 그런 이야기.
 
"돈키호테가 살았던 곳이라 짐작되는 곳에서부터 출발해 산초가 섬의 총독을 지낸 사라고사 인근과 바르셀로나를 거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중부에서 남부 그리고 동부로, 다시 중부에서 남부로, 오르락내리락, 가고 오고 또 가고. 그 길에서 수많은 식탁에 앉았다. 가장 오래된 식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곳의 고풍스러운 식탁에도 앉았고, 우연히 만난 어느 양치기의 노모가 차려 준 소박한 식탁 앞에도 앉았다. 돈키호테의 식탁을 따라 걷다 보니, 시골 장터에서 돼지고기 염장하는 데 최고의 손맛을 자랑하던 둘시네아도 만났고, 멍청한 먹보가 아니라 타고난 와인 감별사에 심오한 음식 철학을 가진 산초도 만났다."
-<들어가면서>에서

4백 년 전 소설 속에 적혀 있는 음식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스페인 곳곳의 식당을 찾아다니는 여정을 무려 일 년에 걸쳐 진행했다니... 조금은 과장되고 위트가 넘쳐나는 필체이긴 하지만 작가는 어찌 보면 훌륭한 탐사취재를 수행했고 그 결과물을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책을 읽어나가면 나갈수록 그런 감회가 짙어집니다.
 
"두엘로스 이 케브란토스!


호박을 마차로 둔갑시킬 때 딱 이런 주문을 외웠을 것 같다. 직역하자면 고뇌와 충격, 탄식과 격파, 애도와 단념, 노고와 탄식, 뭐 대략 이런 단어들의 조합이다. 일단 '고뇌와 탄식' 정도로 정리해 보기로 하고. 토요일에는 고뇌와 탄식을 먹었다고? 대체 어떤 음식이기에? 책에는 베이컨 조각을 넣은 달걀 요리라고 되어 있는데, 대체 이름이 왜 이 모양인 것이냐.

스페인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이런 요리 먹어 봤어? 계란 요리라는데? 다들 대체 뭔 소리냐, 하는 얼굴들이다... 도대체 이 이름은 어디에서 기원한 걸까? 사실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다름 아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다. 이전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 후 1732년 당국에서 발간한 사전에 의하면 '라만차 지역에서 가축의 골수와 계란을 넣어 만든 오믈렛'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어느 시골 양반의 고뇌와 슬픔_돼지 삼겹살>에서
"모닥불을 지펴 냄비에 끓이고 있는 것은 소금에 절여 말린 염소고기, 일종의 염소 육포다. 언제든지 들고 다니다가 꺼내서 뜯어먹기도 하고 끓여 먹을 수도 있는 목동들의 저장식품. 목동들의 도시락. 그들은 양가죽 주위로 둘러앉아 염소 육포를 끓여 만든 스튜를 나눠 먹는다. 돈키호테는 앉아서 점잖게, 산초는 서서 게걸스럽게.... 다 같이 둘러앉아 염장 염소 스튜를 나눠 먹는다. 뿔로 된 잔을 돌려 가며 술도 나눠 마시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우물에 두레박처럼 찼다 비었다 쉬지 않고 돌았으니, 술 한 통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디저트를 먹을 시간. 목동들은 설탕을 입힌 도토리 열매와 딱딱한 치즈 반 덩어리를 내놓는다."
-<도토리가 불러온 황금시대_도토리>에서

염장 청어, 레케손 치즈, 와인, 파에야, 가지, 무화과, 마늘... 등등 음식과 식재료 17개를 추적한 이야기 17편이 실려 있습니다.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음식이 과연 4백 년 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지 그것은 어떤 요리인지, 그 어원과 조리법까지 추적하는 것과 함께 작가의 삶과 경험이 양념으로 녹아듭니다. 10여 년 전 스페인에 딱 한 번 가본 것 말고는 인연이 없었으나 스페인 요리를 매우 좋아한다고 믿고 있고 곧잘 찾아먹는 저로서는, 군침 도는 걸 넘어 마치 야심한 시각, 먹방 프로그램을 보고 몸부림치듯이, '아, 이 책은 밤에 읽으면 안 되겠는걸' 한숨 쉬는 게 여러 번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야, 이렇게 1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는 망상 혹은 공상도 해봤습니다.

이 탐사취재의 멋진 결과물 하나는 이 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라 메사 델 키호테', 역시 돈키호테의 식탁인데 작가가 연남동에서 2년여 운영했던 식당이라고 합니다. 올해 3월 이 책이 출간됐을 때는 이미 식당 문을 닫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고 하네요. 책은 참 재미났으나 식당에 못 가본 게 퍽 애석합니다. 식당 운영의 경험을 담아낸 산문집도 있다고 하니 조만간 읽어보려 합니다.

*출판사 아르테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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