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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인사이트] '모가디슈'보다 더 영화 같은 탈출…워싱턴 공항서 만난 카불 탈출 선발대

[워싱턴 인사이트] '모가디슈'보다 더 영화 같은 탈출…워싱턴 공항서 만난 카불 탈출 선발대

적십자 직원에 통역 자원 봉사자까지 북적…워싱턴 공항 도착한 아프간 피란민 200명

아비규환의 카불공항에서 탈출한 선발대가 지난 주말부터 워싱턴 덜레스공항으로 입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지역 뉴스의 보도를 보고 곧 아프간 사람들이 입국한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는데, 덜레스공항에 지인 배웅을 나갔다가 평소와 달리 공항에 히잡을 쓴 여성이 굉장히 많아졌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입국장 앞에는 적십자사에서 피란민들에게 구호품을 나눠주는 헬프 데스크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일정표를 보니 정오쯤부터 중동에서 들어오는 비행기가 몇 개 있는 걸 확인하고는 혹시나 아프간 피란민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취재팀과 함께 촬영장비를 챙겨나와 입국장에서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상적인 여행객처럼 들어오리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큰 실수였습니다. 카타르 도하에서 온 비행기에 피란민들이 탔을 가능성이 제일 커보였는데, 2, 3시간이 지났지만 아프간 피란민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워싱턴 특파원들은 오후 시간에 한국 아침 뉴스를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이 시간 취재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 보통 철수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SBS 마이크를 보고는 공항에 마중 나온 아프간인들은 물론 중동의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하나들씩 몰려들어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보통 SBS 마이크를 본 백인들은 같은 이름의 호주 방송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동에서는 K팝 인기가 높아서인지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SBS를 '인기가요'를 방송하는 한국 방송사라고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카불에서 탈출한 200명이 덜레스공항 안에서 대기하고 있지만, 입국 수속에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줬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나올지 이들도 정보가 없었습니다.

입국 대기 중인 200명을 두고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무작정 기다리기는 했지만, 마중 나온 아프간 인들이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얘기를 해줘 큰 도움이 됐습니다. 히잡을 쓴 소녀 3명이 카불에서 탈출한 친구를 기다렸는데, 이들은 여성을 사람 취급 안 하는 탈레반의 무자비한 행태에 대해서 극도의 적개심과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아프간에서 여성은 그냥 죽은 목숨이라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아프간 남성은 영어를 거의 못했지만, 같이 나온 다른 젊은 남성에게 통역을 해달라고 하면서 지금 카불공항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줬습니다. 이들은 페이스북과 바이버 등에 만들어진 아프간인들의 단체방을 통해서 현지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달받고 있었습니다. 아프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이 고향인 사람들과도 일부 얘기를 나눴는데, 잘 몰랐던 파키스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한 파키스탄계 미국인은 친척들 사이 K팝이 대단한 인기라고 했는데, 사진 찍어서 친척들에게 보내주고 싶다고 해서 SBS 마이크를 들고 기념사진까지 찍기도 했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조금 지나자 CNN과 Fox 지역 채널 카메라 팀이 등장했습니다. 이들도 피란민들이 언제 나올지 정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방송센터에서 지휘하는 PD가 오후 늦게 피란민들 입국 소식을 듣고 현장에 나가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일단 여기 있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오후에 미국 국방부 브리핑에서 워싱턴 덜레스공항에 지난 24시간 동안 아프간 피란민을 태운 비행기 3편이 내렸다고 발표한 걸 보고 나온 듯 했습니다). 졸지에 외신들과 현장에서 같이 대기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CNN은 라이브 방송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영상을 라이브 송출하면 센터에서 보고 기사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정규 방송에 바로 화면을 띄워서 앵커가 진행을 한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혼자 나와서 인터뷰도 하고 영상도 찍으면서 라이브 송출도 하는데, 멀티 플레이가 대단하기도 했지만, 사실 취재의 밀도가 높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충 훑으면서 찍고 빠지는 수준이었습니다. 입국장 내부에 카불에서 탈출한 200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더니 놀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본부에 전화 보고를 하고는 이들도 결국 못가고 피란민들이 나올 때까지 현장에 같이 묶여 있게 됐습니다.

속절없이 시간이 지나고 밤 10시가 넘어갔는데, 젊은 아프간인들이 꽤 많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페이스북 아프간 그룹을 통해 통역 자원봉사가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고 뛰어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후에 있던 적십자 직원들까지 다시 나와 구호물품을 점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간 피란민들이 입국장 밖으로 나오는 게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이들은 새벽 1시 반이 넘어서야 하나둘씩 입국장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김수형 취파

"총 맞아 죽는 걸 봤다", "수송기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피란민들의 충격적 증언

아프간에서 온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제대로 못 먹고, 못 씻은 티가 확연했습니다. 핸드 캐리 가방을 한 개라도 든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냥 배낭 하나 정도를 가지고 사실상 몸만 비행기에 싣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저기 감격적인 재회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입국자들과 가족들은 드디어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적인 재회를 하는 장면을 보는데도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습니다. 지옥 같은 곳에서 돌아온 이들의 마음고생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던 장면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적십자사에서 나눠준 물과 과자를 먹자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행복해했습니다.

김수형 취파

인터뷰에 응한 선발대는 모두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거나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하지만 이번에 도착한 사람 가운데 비자도 없는 서류 미비자가 워낙 많아서 이렇게 늦게 내린 거라는 설명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공항까지 가는 길이 너무 위험했고, 공항 내부로 진입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자신의 영주권, 시민권 서류를 들고 흔들며 공항 내부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했고 미군의 도움으로 진입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은 거의 전부 미군을 돕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했고, 미군들과 소통하는데도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번에 카불에서 탈출하지 않았으면 탈레반의 보복 1순위가 됐을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젊은 청년 마이완드는 공항 외곽에서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현재 카불공항 내부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공항 외부는 탈레반이 지배하는 기묘한 상황입니다. 탈레반들은 인파가 몰리면 기분 내키는 대로 총질을 하고 수류탄까지 던지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외신에 들어온 영상을 보면 탈레반이 여성을 골라 매질을 하는 장면도 있는데, 여성들은 거의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습니다.

김수형 취파

마이완드는 본인이 직접 촬영한 미군 수송기 C17 내부와 제3국 대기시설 사진도 보내줬는데, 모두 사람들로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수송기 사진은 2/3쯤 찬 사진이라고 했는데 이륙 때는 700-800명이 탑승해 발 디딜 틈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마이완드의 아버지는 탈레반이 총질을 할 때 파편에 맞아 눈 주위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습니다. 촬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 찍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다친 사람들을 제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카불 탈출 선발대 워싱턴 도착

또 다른 피란민 사쿠르 씨는 공항에 상당히 초창기에 진입한 사람이었습니다. 첫 수송기가 이륙할 때 사람들이 매달려 추락사했던 비극적인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활주로에 남녀노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수송기 어떤 부분이든 붙잡고 매달렸는데, 결국 일부는 그대로 이륙했다가 추락사했다고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진술했습니다. 본인도 시신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사쿠르 씨는 다행히 일가족을 모두 데리고 나올 수 있었는데, 지치고 힘들어보였지만 무사히 나온 걸 진심으로 신께 감사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아프간 여성인 앗시아 씨는 공항에 몰려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간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출국에 필요한 서류도 없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단 살기 위해 미국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공항 주위에 있는 거라고 설명해줬습니다.

김수형 취파

최근 한국 영화 '모가디슈'를 봐서 그런지 이들의 증언이 더 생생하게 와 닿았는데, 모가디슈보다 더 영화처럼 들렸습니다. 공항으로 목숨을 걸고 가서, 탈레반의 감시를 뚫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일이 21세기에 실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참담하게 느껴졌습니다.
 

정보 오판까지 시인한 바이든…대통령의 신념은 어떻게 정부 기능을 마비시켰나

바이든 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아프간 철군을 주장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얘기입니다. 국익이 없는 곳에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돈을 쓰면서 싸우지 않겠다는 그의 신념에 상당수 미국인들도 동감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최근 AP 여론조사에서는 아프간전에서 미국이 싸울 가치가 없었다는데 미국인 62%가 공감하고 있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소신을 펼치는 방식이 형편없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전체적인 준비 부족과 정보 실패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수형 취파

특히 바이든의 신념 때문에 정부 기능이 마비됐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오합지졸 아프간 군이 30만 대군이라는 수치에 현혹돼 적어도 18개월은 버틸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철수 작전도 상대적으로 느긋하게 전개했습니다. 아프간 현지 외교관들이 긴급하게 반대 채널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이마저도 묵살됐다고 미국언론들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결국 탈레반이 미국의 예상을 완전히 깨고 카불까지 점령하면서 최악의 철수 작전을 펼치는 딱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노련한 앵커인 ABC 방송의 조지 스테파노풀러스와 단독 인터뷰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나에게 아무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소신 관철을 고집하는 대통령의 심기 경호를 위해 관료 조직이 정보를 어떻게 왜곡했는지 보여주는 또 한 사례가 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혹은 바이든이 반대 의견을 보고 받고도 묵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미군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게 됐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맺은 평화협정 때문에 탈레반의 용인 하에 교전 없이 탈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미국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이 적군의 아량 덕분에 아비규환 속 탈출 작전을 한다는 건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처음으로 진보, 보수 양쪽에서 협공을 받으면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좋든 싫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진다고 말한 대로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카불 탈출 작전은 공화당의 핵심 의제인 난민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테파노풀러스는 미국의 조력자였던 아프간인이 8만 명은 될 텐데 어떻게 할 거냐고 대놓고 질문했었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그 정도는 너무 숫자가 많다며 난색을 표시했습니다. 5만 명에서 6만 5천 명까지는 수용 가능하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아프간에 남은 사람들은 미국의 배신에 분노할 것이고, 미국 땅에 들어온 피란민들을 불법 이민자 취급하는 미국 내 보수 진영의 비판 목소리는 더 커질 게 분명합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중간선거에서 쟁점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입니다. 게다가 수용 한계 능력에 다다르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들에게 일정부분 손을 벌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문제는 미국은 물론 해당국에도 정치적인 후폭풍이 만만치 않은 이슈입니다.

아프간 철군을 두고 다른 동맹국도 버리는 거 아니냐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바이든이 직접 나서 이 부분은 그나마 어느 정도 진화하는데 성공한 분위기입니다. 대외정책의 핵심을 중국 견제에 두고 있는 바이든 정부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결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상호방위조약을 맺지도 않은 타이완까지 바이든 대통령은 공격당하면 대응하겠다고 발언하면서 중국이 직접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도 앞으로 문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단기 악재인가, 최악의 수렁에 빠지나…기로에 선 바이든

아프간 사태를 단기 악재로 끝내는 건 미국에 최상의 시나리오입니다. 이미 체면은 구겼지만 미국인의 희생 없이 아프간 조력자까지 최대한 많이 구해오는 방안입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스스로 내세운 시한 8월 31일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이 기간까지 탈출 작전 종료가 불가능하다는 게 거의 확실해지고 있는데 탈레반이 그 이후에도 협조를 잘 할지는 그때 가봐야 합니다. 이런 예민한 상황에서는 국지적인 충돌이 판세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상황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와중에 엉뚱하게도 IS같은 테러집단이 미국인을 납치해서 전 세계에 중계라도 해버린다면 바이든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추가 파병을 해야 하고 정치적인 내상은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역시 만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최악의 코로나에 대처하는 것도 버거웠는데 여기에 대형 대외 변수 악재까지 등장한 겁니다. 진영 논리를 떠나 외국인 기자 입장에서는 코너에 몰린 바이든이 이 문제를 원만하게 풀어나갈지, 더 깊은 수렁에 빠질지 매우 궁금합니다. 이런 대형 악재에 대처하는 미국 정부의 브리핑 시스템도 인상적입니다. 요즘 매일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에서 동시 브리핑이 전개돼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하루걸러 한 번씩 직접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언론 대응이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도 지켜볼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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