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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른'을 위한 동화 '불안한 사람들' [북적북적]

'그냥 어른'을 위한 동화 '불안한 사람들'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01 : '그냥 어른'을 위한 동화 <불안한 사람들>
 
"이윽고 은행 강도가 외쳤다. "아뇨……! 아니에요, 나는 강도가 아니에요…… 다만….." 그랬다가 숨을 헐떡이며 번복했다. "음, 어쩌면 강도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여러분은 피해자가 아니에요! 이제는 인질극 비슷하게 되어버렸네요! 거기에 대해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제 일진이 사납네요!"
그 모든 사태가 이렇게 시작됐다."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은 뭔가 하면 은행 강도가 성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은행 강도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은 없다. 어른이 되는 것이 끔찍한 이유는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고, 앞으로는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공과금을 납부하고, 치실을 쓰고 회의에 늦지 않고, 줄을 서고 서식을 작성하고, 케이블과 씨름하고 가구를 조립하고,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고 전화 요금을 내고 커피머신을 끄고 아이들 수영 수업을 잊지 않고 신청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상이 우리 머리 위에 "잊어버리자 마!"와 "잘 챙겨!"로 이루어진 폭탄을 새롭게 투하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내일이면 또 다른 폭탄이 위에서 쏟아질 것이기에, 우리는 여유롭게 생각하거나 숨을 돌리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그 산더미를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회사나 학부모 간담회나 길거리에서 가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남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아는 것 같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아는 척해야 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남들은 여러 가지를 감당할 여유가 되고 여러 가지를 잘 다룰 줄 알며 그러고도 에너지가 남아서 더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남의 집 아이들은 모두 수영을 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진작 우리를 말렸어야 했다."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고 인생의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달은 '멋진 어른' 말고, '그냥 어른' 말입니다.

드라마 같은 데 잘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고민이나 슬픔이 있는 등장인물이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장면입니다. 예전에는 그 장면을 '연출을 위한 연출'이라는 느낌으로만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니, 꼭 저렇게 포장마차에, 혼자 가서, 깡소주를 한 잔, 졸졸 따라야 해?'

언젠가 가족이 보고 있던 TV 앞을 지나가다가 바로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TV에서 나오고 있던 드라마의 앞뒤 내용도 모르는 제가 불현듯, '그래… 저렇게 혼자 소주잔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때가 누구나 다 있지' 끄덕이고 있다는 걸 문득 자각했습니다. 성인이,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진짜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여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상황과 취향의 문제이고, 저를 포함해 모든 성인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나홀로 포장마차'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임신했을 때 엄마가 맨 처음 하신 말씀이 '이제 너는 벽장에서 울 줄 알아야 한다, 율스. 애들 앞에서 울면 애들이 겁에 질리거든'이었어요."

어른이 되면, 남한테 말하지 않거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말할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많아집니다. 비교적 사소한 불평이나 불편은 가족친구와 나눌 수 있어도, 정말 가슴을 짓누르는 문제들은 혼자서 처리하거나 때로는 그냥 짓눌려진 채로 오랜 시간을 버티곤 합니다. 징징댈 수 없습니다.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 먹고 어떻게 이런 것까지 하소연할 수 있겠어' 어른으로서의 애매한 자각과 '해결되는 것도 없고, 이해 받을 수도 없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걸' 상당한 체념을 오락가락하다가 '에휴, 나만 참으면 될 일을 누굴 괴롭히겠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배려에 이르기까지. 나중에는 그게 뭐가 됐든 혼자 삼키는 것이 익숙해져서 더 이상 고독을 자각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이른 어른들은 귀갓길에 문득 나홀로 포장마차에 들르면서 살아갑니다.

'아이가 생기면 벽장 속에서 울 줄 알아야 한다.' [북적북적] 301회에서 함께 읽는 책, 프레드릭 배크만의 장편소설 [불안한 사람들]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 대사야말로 '어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어른의 정의를 축약한 데 그친 대사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방식을 이용해 위로까지 건네고 있습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울 일이 사라진 게 아니라, 아이들이 보거나 듣지 못하도록 벽장 속에서 혼자 울고 있다는 것을 이 대사가 알아줍니다. '그래, 너도 그렇구나. 알아. 나도 그래.'라고 말해줍니다.

올해로 꼭 만 40세, 그 자신 어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프레드릭 배크만은 2012년 펴낸 데뷔작 [오베라는 남자]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뒤 내놓는 작품마다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스웨덴의 인기 작가입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그의 2020년 최신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5월에 번역 출간됐습니다. 은행강도라고 불러주기에도 2% (훨씬 넘게) 모자라는 은행강도와 은행 근처에 매물로 나온 아파트 오픈하우스*에 찾아왔다 얼떨결에 그의 인질이 된 사람들, 그리고 이 강도를 검거하기 위해 인질들을 조사하는 경찰까지 모두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강도를 비롯한 등장인물 저마다 살아온 시간만큼 사연을 지니고 있고, 특유의 유머감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촘촘하게 깔려 있습니다. (*오픈하우스: 매물로 나온 집의 중개를 맡은 부동산업자가 구매 희망자들에게 그 집을 개방하는 때를 정해놓고 해당 시간에 찾아온 고객들을 안내하는 행사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은행 강도 사건도 아니었다. 은행 강도가 은행을 털 생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원래 은행을 털 작정이었다. 다만 은행 강도는 현금이 있는 은행을 선별하는 데 실패했다. 은행 강도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 중 하나가 어그러진 것이다.
……….. "나는 강도다! 6천 5백 크로나* 내놔!(*6천 5백 크로나: 우리 돈으로 86만 원 정도)"
런던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6천하고 5백? 0을 두어 개 빠뜨린 거 아녜요? 아무튼 여긴 현금 없는 은행인데, 진짜로 현금 없는 은행을 털 생각이에요? 바보예요, 뭐예요?"
당황한 은행 강도는 헛기침을 하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런던은 두 팔을 뻗으며 물었다. "그거 진짜 권총이에요? 그러니까 진짜로 진짜 권총이에요? 어떤 사람이 가짜 권총을 썼다고 무장 강도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 걸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본 적 있거든요!"

"용서해주세요." 은행 강도가 그들 위로 내려앉은 정적을 불쑥 깨고 말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못 들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두 들었다. 얇은 벽과 그 빌어먹을 오픈 플랜식 배치 덕분에 그가 한 말이 벽장 안, 현관홀, 화장실 문 너머에까지 들렸다. 그들은 공통점이 많지 않았지만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두 알았다.
"죄송합니다." 은행 강도가 아까보다 더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작됐다. 은행 강도가 아파트에서 탈출하게 된 사연이. 은행 강도는 그 말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를 용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톡홀름'은 증후군이 될 수도 있다."

인질들이 은행 강도의 탈출을 돕는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은 초반부터 명백한지라 그다지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의 핵심은 줄거리가 아닙니다. 강도, 인질, 경찰 등 12명 주인공들의 사연이 하나하나 풀려나가며 서로서로 연결되는 순간들이 포인트입니다. 이기적인 악인, 주책맞은 노인, 성마른 젊은이, 쪼잔한 불평꾼… 초반부엔 그저 얄팍한 스테레오 타입으로 등장하는 이 어른들 하나하나의 깊은 이야기가 진득하게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모두에게 반전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어른의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에 더 가깝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함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작가 본인이 전혀 감추지 않습니다. 강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강도와 인질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질들이 결국 서로서로를 돕고 달래고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친구들이 되어가는 전개는 '치밀'하다거나 '현실적'이라는 수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대신, 저 하늘에 부드러운 솜사탕 모양으로 떠서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는 구름처럼 아련한 희망사항 같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은 실제로 15년 전 총격 인질극에 휘말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다리에 총상까지 입었고, 당시의 충격으로 생긴 공황장애로 이후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 작품의 동화 같은 톤이 더더욱 새롭게 느껴집니다. 현실은 이 작품의 전개처럼 몽글몽글 아련하게 풀려나가지 못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고 아마도 작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타인의 악의와 인생의 불확실성이라는 공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왔을 끔찍한 경험의 기억으로 오랜 기간 고통을 겪은 작가가 결국 길어올린 이야기에 이처럼 위로와 희망이 담겨 있다는 것, 어른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동화가 탄생했다는 것이 참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어른들을 위한 소설을 동화라고 표현할 때 흔히 따라오는 '유치하겠거니' 하는 선입견도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동화의 톤으로 풀어내고 있을 뿐, 이야기 구비구비마다 사회와 인생 곳곳에서 발생하는 '어른의 사정'들을 다각도에서 날카롭게 짚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그저 재미와 웃음에 젖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새 묵직한 공감과 따스한 위로까지 얻도록 짜여 있는 설계가 성공적인 작품입니다. 이런 톤의 작품들에 대해 '불량식품 같은 가짜 위로, 손쉬운 위로'를 팔려고 한다고 의심하기 마련인 '어른의 시선'을 상냥하게 다독여 누그러뜨립니다.
"로게르는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는 안나레나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1990년대 초반에 그녀가 영양을 다룬 중요한 다큐멘터리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에 실수로 드라마를 덧씌웠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후로 그렇게 천천히 그녀를 돌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로게르는 그때처럼 지금도 그녀의 배신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예전부터 대화가 없었다. 안나레나는 아이가 생기면 나아지길 바랐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의 기분 상태에 온 가족이 숨죽이는 날들이 계속 이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감정적으로 과부하가 걸리다 보면 어른들은 한참 동안 자기 기분을 아무한테도 토로하지 못한 채 지낼 수 있고,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어떨 때는 아예 토로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안나레나를 향한 로게르의 애정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됐다. 화장실 수납장에 달린 조그만 거울문을 최대한 부드럽게 열고 닫을 수 있도록 나사와 경첩을 날마다 체크하는 그런 소소한 일들을 통해 드러났다. 로게르는 안나레나가 아무 때고 어려움 없이 수납장 문을 열 수 있는지 확인했다. 안나레나는 말년에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이 생겼지만 어디에선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견고하고 확실한 중심이 있어야 거기에서부터 점점 크게 원을 그려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나레나에게는 그 구심점이 화장실 수납장이었다. 로게르는 그걸 이해했다. 내력벽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물건은 나에게 맞출 수 없고 내가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게르는 항상 이사할 때마다 제일 마지막으로 화장실 수납장을 분해하고 새 집에 가서 제일 먼저 설치했다. 그런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거기 서서 깜짝 고백을 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갖고 있는 '나홀로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고 해서 어른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어른은 없습니다. 그런데 드라마의 클리셰로 다시 돌아가본다면,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는 드라마 주인공에게는 항상, 그가 홀로 거기서 그러고 있으리라는 걸 짐작해주는 속 깊고 넉살 좋은 친구가 한 명씩 존재합니다.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는데도, 드라마에선 꼭 그런 친구가 나홀로 앉아있는 포장마차의 휘장을 걷고 들어와 내 곁에 앉아줍니다. 그리고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나눕니다.

어쩌면 현실에는 그런 친구, 내가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있다는 걸 알아주는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누구에게나 바로 그런 친구 같은 손길을 건네 주겠다고 작정한 책입니다. 믿고 볼 수 있는 재미와 위로도 작정하고 준비한, 우리를 위한 동화입니다.
혼자 기울이고 있는 소주잔 너머로 실은 친구의 그림자가 비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몰래 피어오르는 걸 어쩔 수 없을 때, 이 책을 선택해 봐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출판사 '다산책방'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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