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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병든 사회'와 불화했던 시인 최영미

"어쩌다 시인이 된 것이 내 불행"

[그사람] '병든 사회'와 불화했던 시인 최영미
1. 이준석 돌풍이 불면서 386세대는 한순간에 낡은 세대로 몰리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이 막강한 세력으로 군림하는 것은 하나의 집단으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금씩 분화해 왔고 '조국 사태'로 더욱 갈라졌지만 이들이 386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경험과 정서이기 때문이다.

그 세대가 공유하는 경험 중 하나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이다. 1994년에 나온 이 시집은 한 시대의 마침표 부호 같은 것이었다. 마침표가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출발이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책 한 권 이상의 의미가 있다. 386세대라는 말이 살아 있는 한 최영미라는 이름도 기억될 텐데 386세대 주류와는 다른 길, 다른 삶을 살아온 이 사람이 최근 <공항철도>라는 시집을 냈다. 좀처럼 정치 현안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던 이 사람이 2016년 촛불 시위 때부터 SNS를 통해 입을 열기 시작했고 이 시집에서는 그런 태도가 더 뚜렷해졌다. 불과 서른의 나이에 단호하게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했던 이 사람이 벌써 올해 환갑이다. '잔치가 끝난 뒤' 이 사람이 30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그사람 최영미 시인

청바지에 목선이 깊게 드러나는 옅은 하늘색 니트를 입은 이 사람에게 세월이 살짝 비껴가는 듯싶었다. 몇 올의 흰 머리카락이 아니면 누가 이 사람을 올해 환갑이라고 믿을까. 신작 시집은 역대급 폭망이라고 했다. 나온 지 한 달이 넘도록 1쇄도 다 팔리지 않았다며 반응이 신통치 않다고 했다. 그래도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표정이 편안하고 생기발랄했다. 고은을 상대로 한 미투 재판에서 이겼고 새로 만든 출판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일까.

-최영미는 진보나 보수 같은 이념으로 평가받지 않던 작가인데 이번 시집에서는 정치적인 의사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대단히 뭘 한 것은 아니지만 '돼지들에게'를 포함해서 꼭 정치적인 발언은 아니래도 시로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해 할 말은 해왔다고 생각해요. 시 아닌 다른 활동을 한 건 거의 없어요"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촛불 시위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나갔고 기대가 컸는데 인사 문제 등에서 실망이라고 했다. 이 정권에서 출세하려면 부패와 타락이 필수라고 독설을 날렸다.

2. 1994년 출간된 이 사람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초대박이 났다. 지금까지 팔린 게 60만 부에 육박한다.

-그 시집으로 얼마나 돈을 얼마나 벌었습니까.
"그때 책값이 3천 원이었어요. 인세 10%였으니까 세금 떼면 1억 조금 넘게 들어왔을 거예요. 그 덕에 10년간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살았죠"

방송과 신문에서 이 사람을 모시기 위해 경쟁하듯 줄을 섰고 뉴스 진행을 맡아 달라는 요청, 광고 모델 제안도 있었다. 드라마,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도 이어졌다. 돈과 명성을 거머쥘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 사람은 대부분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사람 콧대가 높아도 너무 높았다.

그사람-최영미

광적으로 책에 몰입하는 소녀였지만 작가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이 사람이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지만 문학소녀의 꿈은 구체적이지 않았다. 1980년 서울대에 입학했고,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 붙잡혀 무기정학을 당했다. 마르크스 자본론 번역팀에서 활동했다. 운동권의 맨 앞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운동권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조금 일렀던 결혼은 환멸을 남긴 채 6개월도 안 돼 끝났고 언론사를 포함한 몇 군데 취직 노력은 실패했다.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직장도 없고 돈도 없는 청춘이었다. 고시원에서 일기장을 뒤적이다 어느 순간 자신이 시 같은 것을 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시들이 <창작과 비평>을 통해 발표됐고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사실 그렇게 많이 나갈 시집은 아니었어요. 많이 나가면 10만 부 정도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편집자가 그랬어요. 문학 외적인 요소 때문에 이 시집이 잘 나간 거라면서 최영미의 미모보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게 더 영향이 컸다고요. 창비에서 광고도 많이 했고요. 다른 출판사에서 냈으면 그렇게 많이 안 나갔어요. 창비여서 그렇게 나간 거죠."

김용택은 자기보다 목 하나가 더 긴 이 사람을 '완전한 서울여자'라고 표현했는데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라서 이렇게 말한 면도 있지만 실제로 이 사람은 차가운 도시 여자의 이미지가 강했다. 강렬했고 방자했고 도도했다.
 
"최영미는 응큼 떨지 않는다. 의뭉하지 않으며 난 척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직할 뿐이다. 이것저것 집적거리지 않는다.…최영미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감당하기 힘든 정서의 소유자이다. 그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내겐 벅찬 일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발문> 中

수줍음 많은 김용택이 '가장 감당하기 힘든 정서'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최영미에게는 사람들을 한순간에 오그라들게 만드는 압도적인 당당함이 있었다. 세상을 자기 눈 아래에 둔 것 같은 이 사람 태도는 찬사보다 질시를 부르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거지. 쟤가 도대체 누구야. 갑자기 누가 나타나서 시집을 냈는데 막 나가? 당연히 불편하죠. 문단 선후배나 사람들이 불편했을 거 같아… 여성 시인이 등단한다는 게 바늘 구멍 같은 거예요. 주요 문학 잡지 통해 등단하기도 힘들고 1-2년 만에 시집 내주지 않아요. 그런데 나는 1년 만에 나왔고 첫 시집이 1만 부도 나가기 힘든데 갑자기 몇십만 부하니까"


3. 처음에는 동료 문인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언제부턴가 불편했고 점차 발길을 끊었다.

"처음엔 술자리에 자주 나갔는데 여기도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1년 반-2년쯤 지나서. 두 번 나가면 한 번은 불쾌한 일이 생겼어요. 옛날부터 내가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에 민감해요. 원래 깔끔을 떨어요. 결벽증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나 안 사귀는 사람이지…"

이 사람에게 우리 문단의 앞날을 기대했던 사람들도 이 사람의 까탈스럽고 유난스런 모습에 지쳐갔고 나중에는 이 사람이 지겨워졌던 모양이다. 최영미는 문단과 자신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문단 사람들은 그런 이 사람을 싫어했다.

2011년 홍대운동장에서 축구산문집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나올 때" data-captionyn="Y" id="i201564812"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10625/201564812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755" v_width="500">
"그러니까 아예 문단에 발을 내밀지 않았어야 했어요. 아예 글쟁이가 되지 않았어야 했어요. 내 성격과는 안 맞아요. 원래 위아래 관계를 내가 잘 몰라요. 제가 선배 대접도 안 했고…"

2018년 미투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서울시에서 주는 성 평등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윤정모를 포함한 여성 작가 36명이 이 사람에게 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사람의 폭로가 사실인지 확인되지도 않았고 한국문학 100년의 상징적 존재인 고은에 대한 일방적 매도라는 것이다. 성추행 가해자인 고은을 편들고 피해자인 자신을 비난하는 동료 여성 문인들을 보면서 말문이 막혔을 것인데 이것이 최영미가 문단에서 처해있는 현실이었다. 미투 사건으로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는 물론이고 미투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조차 문인 단체 어디에서도 응원한다거나 축하한다는 성명서 한 장 나오지 않았다. 무관심으로 포장된 무서운 냉대였다.

"나는 재판 이기고 문단에서 그래도 연락 올 줄 알았는데 전화가 하나도 안 오더라구요. 몇 년간 연락 끊겼던 사람 전화도 받고 심지어 헤어진 남자친구한테도 문자를 받았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축하 전화 한 통 없었어요"

스스로 미움을 사는데 능하다고 했다. 남에게 고개 숙이지 않았고 고분고분하지 않았다고 했다. 잘 모르는 사람과는 악수를 하지 않았다. 악수가 악수로 끝나지 않고 성희롱이나 유쾌하지 않은 접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란다. 상대방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잠재적 성추행 가해자로 보는 것으로 여길 만한 자세이니 결코 유쾌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더 조심하고 선배한테 깍듯하게 하고 인사 잘 했어야 했는데…내가 인사성이 없어요. 그런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우리 아버님이 큰 조직에서 일한 분이 아니라 밖에 나가면 인사 잘해라 그런 말 안 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굉장히 내 스스로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2006년, 시집 <돼지들에게><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나올 무렵" data-captionyn="Y" id="i20156480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10625/20156480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752" v_width="500">
이 사람의 지금 처지는 어떤 면에서 자업자득이다. 남에게 상처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말을 삼키지도 않았다. 불편한 것,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견디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는 촉수가 발달한 사람이다. 원래 예민하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는 혼자 사는 여성이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니다. 살면서 겪은 이성과의 불쾌하고 다시 떠올리기 싫은 경험들이 이 사람을 더욱 날카롭고 까칠하게 만들었다.

"나의 첫경험도 성추행이었어요. 기가 막힌 현실 아니예요. 제가 그 말을 했더니 어떤 여자 편집자가 그러더라고요. 자기도 첫경험이 성추행이래. 아마 대한민국 여성 대부분의 첫경험이 성추행일 거예요. 너무나 슬픈 현실 아니예요. 내 몸을 처음 만진 남자가 왜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전혀 원치 않는 남자가 내 몸을 만져야 하나. 정말 병든 사회 아니예요."

가족 간의 불화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살 터울 동생 최영주와 이 사람은 앙숙이었다.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언니는 동생과 한 번도 놀아 준 적이 없다. 스무 살 이후에는 서로 바빠 얼굴 보는 일이 드물었다. 최영주는 인물 좋고 학력 좋고 머리 좋은 언니가 어렵게 사는 것은 게으르고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014년 최영미의 자전적 소설 <청동정원>을 읽고 나서야 언니를 이해하게 됐다.

"그게 (그 소설 쓴) 가장 큰 수확이었어요. 그런데 거꾸로 뒤집어 말하면 내가 어떻게 같은 밥을 먹고 산 동생한테도 이해받지 못했을까. 한편으로 약간의 슬픔이 있었어요. 나는 왜 이렇게 오해를 받아야 하나. 내 반경 5백 미터에는 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여자로 태어난 것,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서울대에 들어간 것, 어쩌다 시인이 된 것이 자신의 불행이라고 했다. 남에게 주목받을 만한 외모를 갖고 태어난 것도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남들이 보면 부럽게 생각할 조건들이 이 사람에게는 불행의 이유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시인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했는데 시인이 아닌 무엇이 되었다면 이 시대, 이 땅과 덜 불화하며 살 수 있었을까.

그사람-최영미

4. 밥을 벌어먹기 위해 글을 쓴다. 돈 떨어지면 글을 쓴다고 했다. 전업 작가, 아니 생계형 작가로 살고 있다. 이 사람에게 가난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어렸을 때 남의 셋집을 전전했고 고2가 될 때까지 아버지가 번듯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고 춘천과 속초라는 낯선 동네에서 산 것도 집값 때문이었다. 2005년 <흉터와 무늬>를 쓸 무렵에는 한 달에 70만 원으로 버텼다. 이 돈조차 없어 어머니와 지인들에게 손을 벌렸다. 연 소득이 1천 3백만 원이 안되고 집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근로장려금을 2016년, 2019년 두 차례 받았다. 한 달 수입이 백만 원 남짓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자기가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가 근로장려금 받는다고 굉장히 가난한 줄 아는데 저, 가난하지 않아요. 지난번 광주에 갔는데 어떤 독자분이 라면을 주는 거예요. 굶는 줄 알고…딸린 식구가 없으니 교육비 나갈 거 없고…부모님 아프시고 난 다음부터가 문제가 됐지만요."

지지리 궁상을 떨어도 가난해 보이지 않는다. 가난 앞에서 기죽지 않는다. 많이 벌어서 많이 쓰는 사람이 있고, 적게 벌어서 적게 쓰는 사람이 있는데, 적게 버는 사람이 많이 버는 사람에 비해 꼭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때로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고 신용 불량이 된 적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지금껏 사는 공간이 작아서 불편한 적은 없었고, 돈이 없어 밥을 못 먹은 적이 없고,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는데 돈이 없어 사지 못한 적도 없다고 했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사고 싶은 물건이 없다고 했다. '집이 동서남북에 널려 있어도' 결국 자는 것은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이니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의 품격은 돈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이다.

생계 걱정이 없었다면 이 사람의 문학적 성취는 더 괄목했을 것이라고 이 사람 지인이 말했다. 먹고 사는 걱정 때문에 글 쓰는 일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하는 이 사람을 보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가난이 글을 쓰게 만들지만 가난이 문학에 몰입하는 것을 막는다.

2006년 유럽 프랑스 여행하며, 리용에서 황인욱의 처제 정혜욱을 만나, 그녀가 찍은 사진.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몇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소설, 그리고 산문책을 냈지만 첫 작품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다. 스스로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고 성과를 냈다고 자평했지만 비평가들과 언론은 이 사람의 후속 작품에 대해 후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독자들의 반응도 기대에 못 미쳤다. 문학 작품보다는 '공짜 호텔' '근로 장려금 신청' 같은 달갑지 않은 가십성 기사로 화제가 되었다. 잊혀지는 듯했던 이 사람이 관심을 모은 것은 2018년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괴물'을 발표하면서다.

문단 원로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하면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리는 것이 아니라 바위로 계란 깨트리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명예가 돼지의 명예보다 결코 작지 않다고 했다. 미투와 관련해 이 말만큼 당당하고 통쾌한 말은 없었다.
 
나는 내 명예가 그의 명예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슨 무슨 상을 받지 않았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바위로 계란을 깨트린 거지… <바위로 계란 깨기> 中

자신을 사랑해도 지독하게 사랑한다. 자기가 쓴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최영미다. 모든 작가들이 자기 생각, 자기 경험을 말하지만 이 사람만큼 자신에 대해 집요하게 말해온 작가는 찾기 힘들다. 어떤 때는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하니 자기에 대해서만 쓰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님 글을 보면 자기애가 강하신 거 같습니다.
"당연하죠. 모든 작가들이 자기애가 강하죠. 이런 질문을 하는 논설위원님도 자기애가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회생활 하니까 그걸 잘 표현하지 않는 것이 훈련이 되어 있죠. 그런데 나는 사회생활 거의 안 했잖아요. 그래서 나를 표현하는 걸 억압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냉정하게 생각할 때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자기애가 특별히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보통 이하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은 자기를 주시하고 주시하고 또 주시한다. 젊고 아름다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추하고 더러운 모습도 응시한다. 자기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람의 모습이야말로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모습이다
 
"나는 나에게 반했다. 유리창에 비친 아름다운 옆얼굴, 나를 매혹시킨 윤곽선의 실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는 사실에 놀라 눈을 깜박이며, 나는 나의 영상을 열렬히 탐미했다. <흉터와 무늬> 中

소설이나 시라는 장치로 가리려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문학은 과장이고 상상이고 거짓이야'라고 말하지만 그 장치를 통해 정말 자신을 가릴 생각이 있는지 종종 의문스럽다.

이 사람의 인생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누구의 표현처럼 다양한 면모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듣는 사람이 당혹스러울 만큼 병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다가 어떤 부분에서 너무도 뻔한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아니라고 부인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아예 입을 봉해버린다.

그사람 최영미 시인

인터뷰 도중 곳곳에서 '여긴 빼고 갑시다' 이건 삭제해 주세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라는 식으로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했다. 이 사람이 오프를 요구한 것은 대부분 사람과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의 입에서 사람 이름이 나가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다. 진보 진영 인사들의 이름이 대화 도중 곳곳에서 나왔다. 굳이 가릴 것 없이 모두 공개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그러면 우리 사회가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쓰신 소설을 보면 숨기고 싶은 것들도 다 공개한 거 같아요. 그런 이야기 쓰실 때 꺼려지지 않았습니까.
"쓸 때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대로 다 써요. 쓰고 난 뒤 치명적인 것은 책에는 안 넣고 시크릿 파일로 만들어 놨어요. 지금 그 정도 갖고도 그러는데 그게 공개되면 사람들이 정말 뒤집어지겠지"

이 사람의 시크릿 파일에 있는 내용이 궁금했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것도 있고 이 사람 작품에서 군데군데 힌트 같은 것도 있다. 다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진실을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라는 이 사람 신작시집의 마지막 작품 <최후 진술>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가 더 궁금했다. 자기만의 독백인가, 아니면 누구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말인가.

5. 이민 가고 싶다는 말,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거의 입에 달고 산다. 이 땅은 "내게 더러움만 보여준 땅"이고 "지겨운 이 땅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산다는 게 치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자신의 불행의 원인으로 꼽았고 미리 쓴 2022년 신년 인사에서 "행복도 진심도 바라지 않을 테니 다만 이 곳을 떠나게 허락해 주소서"라고 기원한다. 삶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시인의 한탄 정도로 받아들이지만 틈만 나면 나오는 이 사람의 서구 예찬을 들으면 이 사람은 정말로 이 땅을 떠나는 게 소원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서양 고전 문학은 줄줄 읊어 대면서도 우리 문학에 대해 별 관심 없다는 말을 별 망설임 없이 하는 이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

-작가로서 이 사회에 기여한 게 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에 대한 연민은 차고 넘치는데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연민, 동정, 관심을 표하는 발언은 많지 않은 듯해서 묻습니다.

이 질문이 떨어지자 정색을 하고 이 자리에 왜 자신을 불렀는지 물었다. 최영미라는 시인이 궁금하기 때문에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굳이 기여한 것을 물어본다면 저는 제 시들이 한국 사회를 보다 투명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투명하게 나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그게 한국 사회에 기여했다고 생각해요. 미투 관련해서도 약간의 기여는 했다고 생각해요. 내 모든 것을 걸고 싸워서 이겼고 그 부분에서 하나의 작은 바퀴를 굴렸다고 생각해요. 내가 문인이 된 것도 이거 하라고 된 건가 하는 생각도 해요"

우리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인위적으로 인류애의 전도사가 되고자 하지 않고 페미니즘으로 포장해서 팔아먹는 문학에 대한 반감이 있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페미니스트인 척, 정의로운 척하는 위선자들이 많다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시 한 편을 찾아 읽었다.
 
"나는 남의 고통을/ 사려 한 적이 없어
검은 상복을 걸치고/ 아픔을 말하나 아프지 않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언어들/심각하고 장황한
유행을 따라가는 눈물/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면>

그사람-최영미

6. 동생 최영주는 언니에 대해 "투명한데, 여러 색깔로 투명해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친절, 배려, 연민 같은 색깔이 강한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했더니 이 사람 어머니가 "최씨 집안 딸 셋 가운데 제일 착한 사람이 영미"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서울대 서양사학과 후배인 황인욱은 이 사람을 은인이라고 불렀다. 1990년대 황인욱이 시국 사건으로 갇혀 있을 때 최영미는 외로운 처지의 수인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집을 보내며 격려하고 위로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면회를 다녀오기도 했고 석방 운동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아버지가 외국에 공부하러 간 것으로 알고 있는 황인욱의 딸을 보고 가슴이 아파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2006년 유럽 프랑스 여행하며, 리용에서 황인욱의 처제 정혜욱을 만나, 그녀가 찍은 사진.
최영미 시인이 황인욱에게 보낸 편지

부모의 간병을 하면서 이 사람이 부드러워지고 둥그러워졌다. 201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춘천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 사람과 아버지의 관계는 그리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자유분방한 사람이었고 때때로 가정의 평화보다 자신의 감정에 더 충실했던 사람이다. 딸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아버지가 쓰러진 뒤 보여준 이 사람의 행동은 집안의 장녀로서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4년 아버지는 "내가 너를 서울대에 보낸 것을 후회한다" "너 그렇게 외로워서 어떻게 살았니?"라는 말을 남기고 타계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  2017년부터 2020년 봄까지 일주일에 평균 5일 어머니 도시락을 싸서 요양병원에 갔다가, 코로나 이후 면회가 금지된 뒤 최근엔 일주일에 세번 어머니가 먹을 도시락을 싸서 병원에 전달한다. 나이 든 어머니는 이 사람에게 아기 같은 존재다. 어머니의 배설물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은 대중들이 알던 까칠한 최영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근 10년에 걸친 부모님 간병 과정에서 인생을 새로 배우는 모양이다. '효녀'의 얼굴을 하고 매일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 최영미는 다소 낯설다. 남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모습 역시 의외다. 태어날 때부터 선천성 심장 장애가 있던 언니, 그 언니가 열여섯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이 사람은 아픈 언니에게 친절하거나 따뜻한 동생이 아니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얼굴을 돌려 외면하던 냉정하고 못된 동생이었다. 아픈 친언니에게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이 사람을 효녀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사람-최영미

-예전에는 예민하고 날카롭고 까칠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부모님 간병이라는 경험을 하면서 인상이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든 거죠. 그냥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사람들에게 옛날보다 편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거든요. 내가 옛날에 얼마나 불편했으면 사람들이 저럴까. 한 마디로 인생에서 별로 기대하는 게 없어져서 편해진 거 같아요. 상대한테 기대 안 하고, 나한테 기대 안 하고…하고 나니 슬픈 얘기네요"

이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아남고 버텨 온 것이 증거다. 자신의 허리를 쉽게 굽히지 않았고 남에게 손을 벌리지도 않았다. 은근히 투항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냉소로 답했다. 권세와 명예를 앞세우고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접근하는 사내들의 부자지를 가차 없이 걷어차기도 했다. 고립을 피하기 위해 '우리'라는 가면을 쓰려고 하지 않았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우리'라는 울타리에 들어가려 애쓰지도 않았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에 질려서 자신의 색깔을 지우려 들지도 않았다. 등 돌려 질질 짜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동정을 구하는 일 같은 것은 이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이 사람 시에서는 눈물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눈을 씻고 봐야 한두 번 보일까 말까다. 그 눈물도 이 사람이 흘리는 눈물은 아니다. 눈물을 보인 적도 거의 없고 남들의 눈물에 쉽게 공감하지도 않는다. 여성적인 것이라고 불려왔던 가치들에 대해 무게를 두지도 않는다. 여성적인 언어로 노래하지만 이 사람의 시가 연약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사람 최영미 시인

7. 인터뷰를 하던 스튜디오 안이 너무 춥다며 냉방을 줄여 달라고 했다. 그 전에 이미 한기를 느껴 머플러를 두 장이나 목에 감았는데 그래도 추웠던 모양이다. 인터뷰 중간에 식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점심을 조금 부실하게 먹어서 시장하다고 했다. 중간에 식사를 할 계획은 없었지만 조금 이른 저녁을 같이 먹었다. 마실 것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에두르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자기 기분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의 장점이다.

그런 이 사람 태도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2002년 한 일간지가 이 사람에게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만나 인터뷰 기사를 쓸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원고료 100만 원, 두 번째는 자신의 원고에 손을 대지 않겠다는 각서를 편집 책임자가 쓸 것을 요구했다. 돈은 몰라도 각서를 쓰라는 요구는 언론사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다. 그런 요구가 불쾌함을 넘어 무례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은 모르는 걸까. 해외 취재를 갈 때 비행기 일등석을 요구하기도 했고, 방송에 출연할 때 15분 이내에 준비를 마쳐 달라는 스태프에게 "난 15분으로는 준비 못 해. 30분은 돼야 해"라고 말했다. 이런 경험을 말하면서 본인도 불쾌했고 상대방도 불쾌했을 거라고 말했다.

대학 시절 같은 과 4년 선배인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후배들 사이에서 이 사람에 대한 카더라 수준의 여러 가지 풍문이 떠돌았다. 평창동에 사는 엄청난 부잣집 딸이라더라, 마르크스 자본론을 번역했다더라, 유부녀라고 하더라 등이었다. 모든 게 화제가 될 만한 내용이었는데 지금 보니 맞는 것도 있고 틀리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같은 과 선배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 나돌 만큼 이 사람은 멀리 있는 존재였다. 스스로 고립을 고집했고 그 고립 따위는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중학교 때 오락부장이었고 애들 웃기는 거 좋아하고 친구도 많았어요. 나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게 굉장히 낯설었어요. 대학 입학하고부터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죠. 운동권 주류 문화와 어울리지 못했어요. 나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시대에 젊음을 보낸 게 문제였어요."

이창동 감독이 영화에 출연할 것을 제안했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문성근의 상대역이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지난 이야기 중에서 콕 집어 후회한다는 말을 한 것은 이 대목이다. 이창동은 이 사람 표정이 풍부하고 숨겨진 끼가 있다며 그 영화에 출연하면 당신의 인생이 바뀔 거라고 했단다. 이창동 제안을 거부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은 지금 같은 인생이 아닌, 다른 인생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사람-최영미

8. 출판사 대표라는 직함을 얻은 이후 이 사람 목표는 재고를 줄이는 것이다. 2019년 50평방미터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샀다. 이제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한다고 했다. 내 책은 안 읽는 사람이 손해라는 짱짱한 자존심도 이제는 슬며시 내려놓았다. 자신의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본인도 잘 안다. 열광하는 팬들이 여전히 있지만 그 수가 예전처럼 많지는 않다. 당장 팔려나가는 시집의 양을 보면 안다. 첫 번째 시집이 50만 부가 팔렸고 그 다음 시집은 그것의 10분의 1이 팔렸고 그 다음은 더 줄어들었다. 이번에 나온 시집은 1쇄도 다 나가지 않았다고 한숨을 쉬었다.
 
밥물은 대충 부어요. 되든 질든/ 되는대로/ 대강, 대충 살아왔어요/ 대충 사는 것도 힘들었어요. 전쟁만큼 힘들었어요/ 목숨을 걸고 뭘 하진 않았어요 (왜 그래야지요?) 서른 다섯이 지나/ 제 계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답니다 <밥을 지으며>

동생 최영주는 이 사람이 "정신적 고통엔 강해도 육체적 고통에 몹시 약한 사람"이라고 했다. 정신적 고통에 강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저 많이 겪고 그래서 익숙해진 거겠지. 대충 사는 것도 전쟁만큼 힘들었다는 이 사람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겠다 싶었다. 시대와 불화하고 자신과 불화하던 사람, 마치 그 증거처럼 얼굴 한 켠에 늘 그늘이 느껴지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투쟁으로 젊은 여성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이 "헛되다 생각했는데 잘 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허무하지만은 않아요"라고 말할 때 이 사람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졌다.

(이 인터뷰는 6월 16일 목동 SBS 본사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 1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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