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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먹고 마시고 똘똘 뭉쳐라!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 핀란드 사람들의 특별한 봄맞이 축제 '바뿌' 이야기

핀란드 사람들이 봄을 맞는 의미는 좀 각별하다. 1년의 반 이상 지속되는 춥고 어두운 겨울 동안 실내에 갇혀 지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봄은 일종의 해방이다. 그래서인지 매년 5월 1일 '바뿌(Vapuu)'라 불리는 봄맞이 축제 날이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거리로 뛰쳐나와 '부어라, 마셔라' 정신줄 놓고 노는 것이 오랜 전통이 되었다. 이날은 전통적으로 겨우내 우리에 갇혀 있던 가축 또한 처음으로 들로 방목되는 날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근로자의 날' 혹은 노동절로 알려진 5월 1일은 핀란드를 포함한 일부 유럽국가에서는 봄맞이 축제의 성격이 더 강하다. 평상시 조용하고 점잖던 핀란드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축제 기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4월 30일 전야부터 시내 전체가 난리 난 것처럼 시끄럽고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도 거리낌 없이 음주를 즐긴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날 거리에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곰, 다람쥐, 호랑이 등을 만나더라도 크게 놀랄 필요는 없다. 지난 30년간 매년 5월 1일, 분홍색 핑크팬더로 변장하고 헬싱키 시내를 활보하고 다녀 유명 인사가 된 사람도 있다.

핑크 팬더로 변한 야리 코포넨씨. (사진은 Jari Pink Koponen)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행동도 축제 기간에는 거의 다 용인된다. 오히려 일탈적 행동은 축제 분위기를 더 띄우기도 한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 19로 6명이 넘는 모임은 피해달라고 핀란드 정부가 시민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이에 상관치 않고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이며 즐거운 듯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민 초기에는 왜 이날 사람들이 갑자기 광분하는지 어리둥절했었다. 그러나 내 자신이 핀란드의 혹독한 겨울을 직접 몇 번 겪어보고 나니 저절로 이들의 멘털러티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축제는 집단이 함께하는 잔치다. 바뿌 축제의 정수도 공동체 구성원들의 '함께함'에 있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여러 모임에 참여하기를 힘쓴다. 그런데 이들은 모이는 장소로 야외를 고집한다. 봄 축제니 야외로 나가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인 것 같다. 문제는 핀란드의 5월 초는 아직 봄이라기에는 많이 쌀쌀하다는 거다. 통계적으로 보면 바뿌 날씨는 4번에 3번은 흐리고 추우며 눈이 올 때도 있다. 밖에서 벌벌 떨면서 고생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바뿌와 관련된 추억을 떠올리며 추워서 고생했다고 얘기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체감 온도가 더 낮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분을 내느라 겨울옷을 벗고 얇은 봄옷으로 단장하기 때문이다.

옷차림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많은 사람이 공동으로 쓴 흰색 모자다. 이 모자는 핀란드의 졸업식 모자다 (핀란드에서는 졸업식 날, 검은색 사각모 대신 흰색 모자를 쓴다). 졸업식도 아닌데 이 모자를 쓰는 이유는 재학생과 졸업생이 한자리에 모이는 거대한 학생 통합 봄 축제가 바뿌 기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 모자는 한때 '학생'이었다는 표시다.

(코로나 이전) 하얀 졸업 모를 쓰고 축제 현장에 모인 사람들. (사진은 wikimedia)

과거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 졸업 모를 쓴 사람이 흔치 않았다. 요즘은 고학력자가 늘어나며 성인 2명 중 1명은 이 모자를 쓰고 바뿌 축제에 참석한다. 그래서 이 모자는 언제부터인지 바뿌의 상징물이 되었다. 축제의 공식적 시작도 헬싱키 시청 앞 분수대 가운데 서 있는 바다의 여신상 '하비스 아만다'의 머리에 졸업 모를 씌우며 선포된다. 마치 왕관 대관식처럼 많은 인파가 몰려 축제 분위기가 한층 달아오른다. 하얀 모자를 쓴 큰 무리는 그 후, 헬싱키 해변에 있는 한 공원으로 몰려가 다음 날 새벽까지 질펀하게 논다.

이 졸업 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숨겨져 있다.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모자 테두리 색, 모자에 달린 술, 안감 색 등으로 소지자의 전공과 고향까지 드러난다. 흰색이 누렇게 바랜 정도로는 대략적인 졸업 연도도 추측이 가능하다. 누렇게 변해버린 졸업 모를 핀란드 사람들은 추레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추억이 묻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더 귀하게 여긴다. 혹시 모자를 분실할 경우 일부러 색을 누렇게 처리해서 만든 모자를 골라서 사기도 한다. 안감에 방수 처리가 되어있는 모자도 있는데 축제 기간 중 모자를 술잔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재미있는 배려다.

(코로나 이전) 학생 대표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특별한 방식으로 하비스아만다 동상에 모자를 씌우는 모습. (사진은 wikimedia)

축제 날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이다. 봄맞이 축제 날에는 여름을 대비해 많이 먹고 많이 마신다. 그렇다고 화려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다. 감자 샐러드, 소시지 등 소박한 음식을 주로 즐긴다. 서민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뭉끼(munkki)라 부르는 도넛도 바뿌를 대표하는 간식거리다. 우리나라의 꽈배기와 비슷한 맛이다. 기름에 튀기면 모든 것이 다 맛있다. 바뿌 날 도넛을 튀기는 냄새는 우리나라의 명절 때 전을 부치는 냄새처럼 잔치 기분을 한층 북돋아 준다.

내가 만든 못난이 도넛. (못생겨도 맛은 좋아~)
수제 시마, 건포도가 밑에 있는 것으로 보아 만든지 오래 되지 않은 것 같다. (사진은 eevi_alanissi_flick)

도넛과 곁들여 먹는 바뿌 음료로 '시마(sima)'가 있다. 시마는 북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바이킹이 풍요를 기원하는 봄 축제에서 마셨던 음료가 그 기원이다. 20세기 중반 탄산음료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시마는 핀란드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여름 음료였다. 레몬, 꿀(혹은 설탕), 이스트, 건포도가 주원료로 발효된 레모네이드라 할 수 있다. 알코올 성분이 미약(1% 미만)하게 있지만, 남녀노소가 모두 즐기는 데 큰 문제는 없다.

핀란드에 살면 살수록 '바뿌' 축제는 핀란드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하지제나 크리스마스보다 더 중요한 명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1년 364일 질서 정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1년에 하루 숨통이 트이는 날이랄까? 마치 사회 전체가 이날 단체로 '놀이 치료'를 받는 느낌이다.

바뿌 축제 동안 선을 살짝 넘으면서까지 신명 나게 노는 핀란드인과 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지키며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핀란드인은 일견 상반된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보완 관계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시대부터 축제는 비일상적인 일탈의 경험을 통해 집단의 구성원들이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개개인들은 공동체 구성원들과 축제를 같이 즐기며 서로 간의 긴장 관계를 풀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재정립할 수 있다.

바뿌 축제도 2차 세계 대전 후 패전국의 멍에를 지고 실의에 빠졌던 핀란드 사람들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준 명절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5월 1일에 그들은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우리도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 선조들이 즐겼던 다양한 전통 축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축제가 소리소문없이 거의 다 사라졌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광화문 혹은 시청 광장에 모일 때가 있지만 2002년 월드컵 때처럼 축제 분위기로 모이는 경우는 드물다.

좀 충격적이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공동체 지수' 순위에서 우리나라가 꼴찌라고 한다. 층간소음 분쟁, 혼밥과 혼술, 고독사 등은 이제 우리의 일상 용어가 돼 버렸다. 공동체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같이 웃으며 만날 수 있는 축제의 장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오늘도 나는 먼 나라에서 먼 조국을 생각해 본다.


<시마 레시피>
재료:
- 물 4 리터
- 레몬 2개
- 흑설탕 300 ml
- 백설탕 300 ml
- 드라이 이스트 1/4 티스푼
병에 보관할 때:
- 설탕 조금
- 건포도 조금
만드는 법:
1. 레몬을 잘 씻은 후 레몬 껍질을 필링 나이프로 얇게 벗긴다. 껍질을 다 벗긴 후에는 칼로 껍질 아래 있는 흰색 층을 제거한다. 레몬을 가로로 반을 잘라 씨를 제거한 후 얇게 슬라이스 한다.
2. 슬라이스한 레몬과 벗겨낸 노란색 껍질을 모두 큰 (적어도 6 리터) 냄비에 넣고 그 위에 설탕을 붓는다.
3. 끓는 물 2 리터를 그 위에 부어 설탕이 녹을 때까지 저어준다.
4. 2 리터의 찬물을 붓는다. 체온 보다 약간 따뜻한 (42도) 정도로 식힌다.
5. 그 위에 드라이이스트를 뿌리고 잠시 기다린 후 저어준다.
6. 냄비를 뚜껑 혹은 천으로 덮은 후 상온에서 24시간 둔다.
7. 그 후 고운 체에 걸러 레몬은 걸러내고 액체만 받는다.
8. 보관할 용기(병)를 뜨거운 물로 세척한 후, 용기마다 설탕 1 작은 스푼과 건포도 몇 개를 넣어 둔다.
9. 그 후 액체를 넣고 (주의: 너무 꽉 차게 넣지 않는다) 뚜껑을 느슨하게 닫은 후 냉장고 혹은 실온에서 발효시킨다. (주의: 뚜껑을 너무 꽉 닫으면 폭발할 수도 있다) 건포도가 표면에 올라오면 발효가 완성된 것이다. 냉장고에서 1주일, 상온에서는 3일 정도 걸린다.
10. 발효가 완성된 후 냉장 보관하며 1주일 안에 먹는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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