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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격리 장병 생활여건 보장 대책'으로 병사 마음 얻을 수 있을까

T. R. 페렌바크는 미군 교과서처럼 읽히는 명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6·25전쟁 참전을 앞둔 1945~1950년의 미군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군인이 되어서도 민간인 신분을 버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의 정규군", "군복은 입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민간인", "미국 사회가 오랫동안 열망해서 마침내 이루어낸 군대", "이 군대는 제멋대로이고, 군기가 빠졌으며, 모두가 평등했다"…

원래 미국은 정규군에 대해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규군을 자유와 평화, 민주주의를 해칠 수 있는 잠재적 폭력으로 여겼습니다. 독립을 쟁취한 직후 정규군을 아예 해체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특출난 외부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수백만 명의 정규군을 유지하게 됐습니다.

미국은 병영의 사회화, 민간화를 강요했습니다. 미군 장병들은 군복을 입었을 뿐 병영 밖 민간인과 다름없는 인식과 생활을 추구했습니다. 페렌바크의 눈에 비친 바로 그런 군대가 된 것입니다. 이후 미군은 6·25전쟁, 베트남전 등 가혹한 실전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사회화된 군의 전투력과 자긍심을 끌어올렸고, 사회와 공존하는 강군의 길을 걸었습니다.

사회 저변에 반군(反軍) 의식이 깔려있고, 군대의 울타리가 무너진 1945~1950년의 미군. 현재 우리 군의 사정과 흡사합니다. 우리나라 대중의 반군 의식은 과거의 미국 못지않습니다. 곰팡이 투성이 격리시설, 숟가락 들기 민망한 도시락, 화장실 못 가는 훈련병, 부러진 슬개골…. 곳곳에서 터져 나온 병사들의 아우성은 군의 사회화를 드러내는 한 단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제(7일) 국방부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내놓은 격리 장병 생활여건 보장 대책은 일회성 해열제에 불과합니다. 치료제가 될 수 없습니다.

7일 열린 장관 주재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격리 장병 생활여건 보장 대책이 발표됐다.

군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때

5·16 군사정변부터 노태우 정부까지 군부의 시대를 살았고, 김영삼 정부에서 하나회 숙청과 율곡비리 수사로 군의 탈정치화를 달성했습니다. 이후 문민의 군에 대한 통제, 즉 문민 통제가 20여 년째 이뤄져 군의 정치 개입, 북한의 침략을 억지했습니다. 안보와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민주국가의 필수 제도인 문민 통제의 성공입니다. 문민 통제가 민주국가 강군의 하드웨어라면, 장병들의 사기는 소프트웨어입니다. 바야흐로 소프트웨어를 일대 개혁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부대 내 부조리를 익명 신고할 수 있는 자생적 SNS '육대전'

군은 한때 기술, 조직, 기강 등 다방면에서 민간보다 우위였지만 이제는 멀찍이 뒤처졌습니다. 군대에서 배워 사회에서 써먹을 게 더이상 없습니다. 군 PC방인 '싸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에 이어 휴대전화 사용이 가능해지면서 군과 사회 간 울타리도 무너졌습니다. 군 안에는 자율과 평등, 공정이 이식되고 있고, 병사들은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군인이지만 울타리 밖 민간인과 같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합니다.

군은 열심히 병사들의 변화를 뒤쫓았어야 했는데 안주했고, 그 결과가 요즘 불거지는 사건들과 병사 사기 저하가 아닌지 치열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대책으로 방역 군 인권이야 보호할 테지만 코로나19가 끝나면 또 다른 부조리가 터져 나올 터. 미봉책이 아니라 청년들의 군에 대한 불신, 그리고 대중의 반군 정서를 걷어낼 수 있는 밑바닥부터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사회화된 군인의 자긍심을 끌어올려라

시민과 군인이 하나 되는 것,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1945~1950년의 미국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열망합니다. 군의 전투력이 담보된다면 시민, 사회와 하나된 군의 힘은 민주주의와 안보를 동시에 지키는 보루가 됩니다.

병사들이 잘 먹고 잘 자는 복지를 제고하고 익명 신고 앱 개발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과거의 민족적, 반공적 애국심에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미군처럼 6·25 같은 전쟁을 경험하며 사회화된 군의 결속을 다질 잔인한 기회도 없습니다.

참모총장, 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같이 땀 흘리며 병사들의 마음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한두 달로 해치울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육해공군이 하나같이 싫어하지만 해병대의 사례를 아니 들 수 없습니다.

상륙주정을 타고 울릉도 해안 상륙을 시도하고 있는 해병대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 도솔산전투, 짜빈동전투, 연평도포격전의 승리를 선배들이 일군 전통으로 여기고, 이런 전통 지키는 것을 명예로 압니다. 헐한 무기로 무장했지만 선배 해병들의 승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후배 해병들은 유사시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병대의 명예입니다. 병영에 사회와 똑같은 자율과 평등을 허용해도 명령과 복종, 기강의 위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국방부와 각군 지휘부는 병사들에게 자율과 평등, 복지를 보장하되 장병들이 기꺼이 전투할 수 있는 자긍심과 명예를 고양할 묘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지휘관 군복에 흙먼지, 진흙 묻힐 각오쯤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민들도 지지합니다. 시민의 지지와 병사의 자긍심은 강군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식당에서 밥 먹는 제복들 밥값 대신 내주는 풍경, 한국에서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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