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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생각해서 그래"…피해자도 모르는 가스라이팅

<앵커>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또 통제해서, 무력하게 만드는 것을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종의 심리적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피해자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고, 또 그것을 알아차리더라도 법적으로 처벌이 어렵습니다.

이 문제, 안서현 기자가 집중 취재했습니다.

<기자>

2명의 20대 가스라이팅 피해자를 만났습니다.

둘 다, 교제하는 내내 늘 사과하는 쪽이 자신이었다고 회상합니다.

[A 씨/23세 여성 : 처음에 제가 화가 나고 제가 속상해서 시작한 싸움이었는데, 결국에는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말하게 되는 게 좀 힘들었어요.]

"너 생각해서 이러는 거다"라는 식의 메시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B 씨/22세 여성 :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왜 맨날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항상 그게 (전 남자친구의) 말버릇이었던 것 같아요.]

가스라이팅, 메시지

점점 자신이 잘못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습니다.

주변에서 충고도 들었지만, 당시에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B 씨/22세 여성 : (가스라이팅이) 아닐 거라고 제가 계속 그랬거든요. 에이, 설마…….]

[A 씨/23세 여성 : (친구들이) '이거 너한테 교묘히 이렇게 하려는 거야, 가스라이팅이야'라고…….]

'가스라이팅'이라는 말,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영화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표현입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집 안 가스등을 어둡게 한 뒤, 방이 어두워졌다고 하는 부인에게 '그렇지 않은데 왜 그러냐'는 식으로 스스로를 의심을 하게 만들고 결국 아내가 판단력을 잃게 해 남편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듭니다.

"네가 문제"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 시켜서 둘의 관계를 '갑-을 '관계로 바꿔 통제를 하는 겁니다.

[A 씨/23세 여성 : 사람 만나는 것도 되게 많이 줄었고, 그 안에 갇혀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 관계 안에서.]

[B 씨/22세 여성 : '누구 만나러 가는데?', '뭐 입을 건데?', '저번에 내가 짧다고 한 거 아니야?' 이러고, 제가 진짜 그 옷을 입고 나갔는지 '사진 계속 찍어서 보내라'라고…….]

눈에 보이는 폭력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세뇌인 만큼 피해자가 알아채기도 쉽지 않습니다.

가스라이팅

[박종석/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피해자는 자기가 당하고 있다는 걸 몰라요. '가스라이팅' 자체가 강압적으로 억제력을 행사하지 않고, 마치 자기가 스스로 이해해서 나(가해자)를 따르는 것처럼 굉장히 교묘하게 사람을 조종하거든요.]

남성, 여성 모두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연인 관계뿐 아니라 가정과 직장 내에서도 빈번히 발생합니다.

[30대 여성/가정폭력 피해자 : '네가 엄마냐?', '아이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 '결혼 생활을 끝내고 나가려면 너는 몸만 나가야 된다' 이런 메시지를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혼 소송이 끝나고 내가 양육권과 친권을 갖고 왔는데도 '내가 항상 아이 엄마로서 잘하고 있나?' (자문하게 되는…….)]

그런데 가스라이팅만으로 처벌이 가능할까요?

영국에서는 가스라이팅을 포함한 정신적 통제를 그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법을 개정했습니다.

최고 5년의 징역형이 부과됩니다.

'강압적 통제'라는 개념을 도입해, 폭력이 없더라도 심리적으로 자유를 구속하는 게 죄가 된다고 본 겁니다.

예를 들자면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고립시키는 행위나 일상생활 통제, 그리고 SNS 계정 감시 같은 게 강압적 통제가 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민윤영 교수/단국대 법과대학 법학과 : '심리적 폭력과 신체적 폭력 중에 뭐가 더 심한가요?' 이게 아니라, 가정 폭력의 본질은 강압적 통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신체적 폭력이 되는 거예요.]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폭력에는 둔감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가스라이팅 같은 강압적 통제에 대한 처벌이 아직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도 가스라이팅의 심각성을 사회가 받아들이는 공론화 과정을 거친 뒤 마지막 단계로 법을 개정했습니다.

우리도 가스라이팅처럼  반복적으로 심리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그 자체로 범죄가 될 수 있고, 나아가 언제든지 교묘한 인권 침해로 변모할 수 있다는 걸,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영상취재 : 이승환·김태훈·설민환, 영상편집 : 소지혜, VJ : 김초아, 작가 : 김유미·이지율, CG : 홍성용·최재영·이예정·성재은·정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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