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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독일, 동독군 해체하며 서독군까지 줄인 이유

우리는 통일에 준비돼있는가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독일, 동독군 해체하며 서독군까지 줄인 이유
지난 글( '모병제로 군 감축?…통일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것')에서 현 시점에서 군 감축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와 남북 간 군 통합의 방향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통일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지만, 통일 뒤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는 '1국가 1군대' 원칙이 지켜져야 하고 이를 위해 남한군 중심의 통일한국군 재편은 필수적입니다.

군 통합에 있어서는 서독군 중심으로 동독군의 일부를 흡수통합한 독일의 사례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독일군 통합의 과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일의 군 통합

1989년 당시 독일은 50만 명 규모의 서독군과 17만 5천 명 규모의 동독군을 통일 이후 37만 명으로 줄이기로 국제적인 합의를 이뤘습니다. 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서 통일 독일이 다시 위험한 세력이 될 것을 우려하는 주변국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통일을 성취시키고자 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독일은 이에 따라 서독군을 감축하는 과정에서 동독군도 흡수 통합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됐습니다.

서독 국방부는 군 통합 준비를 위해 1990년 8월 17일 동독 국방부와 협의하에 '연락반'을 구성했습니다. '연락반'은 군인과 민간인 20명으로 구성됐는데 동독군을 인수하고 동독 지역에 새롭게 조직할 통일독일군 준비작업을 하는 것이 임무였습니다. '연락반'은 동독 국방부 건물에서 업무를 수행했는데, 10월 3일 통일까지 2개월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동독군의 병력과 무기, 예산과 시설, 전화-통신망, 경제활동 내역 등을 조사해 통일독일군 구성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서독은 동독군 흡수통합 작업을 담당하기 위해 연방군 동부지역사령부를 설치했습니다. 동부지역사령관으로 임명된 쇤봄(Schönbohm) 장군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 되는 1990년 10월 3일 0시를 기해 동독군을 아무 문제없이 인수하고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동부지역사령부는 통일 직전인 9월 중순 선발대를 동독 국방부로 파견하고 동독군 장군들과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과 함께 동독군은 공식 해체됐습니다. 이에 앞서 에펠만 동독 국방장관은 동독군의 모든 장성을 1990년 10월 2일부로 전역시킨다는 명령을 하달했고, 정치장교와 55세 이상의 군인들도 통일 직전에 전역시켰습니다. 예외적으로 동독 의무감(소장)이 대령으로 통일독일군에 편입되기도 했지만, 동독군의 고위직과 정치 부문 장교들은 거의 군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동독의 국경수비대도 9월 30일 해체됐고 국경수비대 소속 직업군인들은 통일독일군에서 한시적으로 특수한 민간인 신분을 얻었습니다.

10월 3일부터 동부지역사령부에서 근무하는 2천여 명의 서독 출신 장교들이 구 동독군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사단급 이상의 모든 지휘관과 참모에 서독 출신 장교들이 임명됐으며, 연대 대대급의 지휘관 대부분도 서독 출신 장교가 임명되고 동독군 출신 지휘관들은 고문으로 배치됐습니다. 동부지역사령부는 통일 직전에 전역한 동독 장군들을 민간 고문관으로 임명해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독군 재임용

동독군의 병력은 17만 5천여 명이었지만 통일 시점까지 잔류한 동독군은 8만 9천여 명이었고, 이 가운데 5만여 명이 통일독일군에서 계속 근무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통일 독일의 국방부가 담당해야 할 과제는 이 5만여 명 가운데 몇 명을 어떤 기준으로 통일독일군에 잔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동독군의 통일독일군으로의 편입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1단계는 지원 단계로 통일(1990년 10월 3일) 이후 1991년 1월까지 3개월에 걸쳐, 1991년 6월 이전 정년 대상자를 제외한 모든 구동독군 출신 장병들에게 2년 계약근무자로 지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통일 독일은 구동독군의 조기전역을 유도하기 위해 1990년 12월 31일 이전에 전역을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7개월분의 퇴직금과 현역 당시 급여의 75%를 연금으로 지불하는 명예퇴직제를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통일독일군으로 편입됐던 구동독군 가운데 절반 가량이 1990년 말까지 군을 떠나 2만 5천 명 가량만 남게 됐습니다.

2단계는 계약근무자 선발 단계로 2년 계약근무를 희망한 2만 5천 명(장교 1만 1천700명, 부사관 1만 2천300명, 병 1천 명)의 구동독군 병력을 서독군 부대에 6∽8주 배치해 사상성과 근무 자질을 검사했습니다. 그 결과 1만 8천 명(장교 6천 명, 부사관 1만 1천200명, 병 800명)의 병력이 2년 계약근무자로 선발됐습니다.

3단계는 최종 선발 단계로 1차 선발된 인원을 대상으로 2년 간 관찰하고 근무 실적을 평가한 결과에 따라 1993년 9월 30일 최종 선발이 이뤄졌습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구동독군 출신 가운데 장교 3천27명, 부사관 7천639명, 병 207명 등 총 1만 873명이 통일독일군에서 계속 근무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잔류한 구동독군 출신 가운데 1998년에는 최초의 대대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통일독일군에 편입된 구동독군 출신 장교들은 서독군 출신 장교들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1∽3계급씩 강등 조치됐습니다. 구동독군 장교들이 서독군 장교들에 비해 대체로 진급을 빨리 했기 때문입니다. 또 통일독일군의 장비는 군복에서부터 무기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서독군의 것들로 채워졌습니다. 구동독군의 유품으로는 구소련제인 미그-29 전투기가 유일하게 현역에서 사용됐습니다.

통일독일군으로 편입된 구동독군 장병들에게는 재교육이 실시됐습니다. 장병들을 민주국가의 시민으로 육성하기 위해 민주주의 가치와 국가기구 기능, 군의 국가 보위 임무, 민주사회에서 군의 역할, 나토와 통일독일군 간의 관계 등의 교육이 실시됐습니다.

또 통합된 동서독군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 구동독군 출신 장병들의 처우 개선을 통한 사기 진작책이 마련됐습니다. 구동독군 장병들은 통일독일군으로 편입되면서 급료와 연금 등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점차 서독군 수준으로 대우가 향상됐습니다. 구동독 지역으로 파견을 꺼리는 서독 출신 장병들에게는 수당을 지급해 구동독 지역 파견을 활성화하고, 구동독 지역의 징병자는 대부분 구서독 지역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등 동서독 지역 인적 교류 활성화를 위한 조치들도 취해졌습니다. 이 밖에 육군장교학교나 해군기술학교, 군사연구소 같은 다수의 군기관을 정치적 고려 차원에서 구동독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조치들도 행해졌습니다.

북한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서 경례하는 북한군들(사진=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북한군 재임용

현재 북한군은 2020년 국방백서를 토대로 할 때 모두 128만여 명에 이릅니다. 육군 110만여 명과 해군 6만여 명, 공군 11만여 명, 전략군 1만여 명입니다.

남북한은 독일과 같은 전범국이 아니므로 독일처럼 통일한국군의 규모를 주변국과 합의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통일한국군의 규모를 지금의 남한군과 북한군을 합친 200만 명 가까이 유지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남한군 중심으로 군을 재편하기 위해서는 북한군의 대규모 감축이 불가피한데, 장교들에게는 명예퇴직을 유도하되 잔류 희망자는 선별 작업을 거쳐 통일한국군으로 인수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북한군 장교들에게 명예퇴직을 유도할 경우 명예퇴직금도 적절히 지급해야 합니다. 이른바 북한군 재편 비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이런 점을 고려하면 통일 이후 국방비가 절감되리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통일이 안착된 뒤라면 모르되 통일 과정에서는 북한군 재편 비용으로 국방비가 오히려 더 증액돼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진=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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