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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② 착취와 이용 사이, 토론 없는 평행선

[취재파일] 김학의 사건 ② 착취와 이용 사이, 토론 없는 평행선
피고인 (윤중천)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 복무를 마친 후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원래 거주하던 집을 개축하여 빌라로 분양하는 등의 사업을 하며 수완을 발휘하였고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 인·허가라는 개발사업의 진입장벽을 넘으면 건설 규모에 따라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장벽 너머의 부(富)를 꿈꾼다. (...)
그런데 피고인은 그 경쟁에서의 승리를 인·허가권자와 인맥, 친분, 압력 등에 의하여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그를 위하여 유력자, 재력가와 친분 형성, 그들에 대한 접대에 골몰한다. 화려한 시설과 멋진 조경을 갖춘 원주 별장을 꾸미고, 필요에 따라 선택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 외제 고급차를 타고 골프를 치면서 상대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은밀한 친분을 얻기 위해 성을 접대 수단으로 사용한다. (...)
돈이 전부이기에 그것을 얻으려다가 생기는 상처는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접대를 위해 성을 거래한 여성들의 마음이든, 자신의 허세를 믿어 준 상대의 신뢰이든, 가벼운 애정을 큰 사랑이라고 믿고 건넨 돈이든 모두 거래일 뿐이라 여긴다.
-건설업자 윤중천 1심 판결문 中

착취와 이용

'김학의 성접대 사건'의 핵심 인물, 건설업자 윤중천에 대한 1심 판결을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제33형사부는 (손동환 부장판사) 판결문 양형 이유를 이렇게 시작한다. 시골 출신의 자수성가한 사업가, 인맥을 활용해 장벽 너머의 부를 꿈꿨으나 '돈이 전부'였기에 성과 인간을 '착취' 대상으로 대했던 비인간적인 인물. 수차례 걸친 수사기관 조사와 과거사 재조사,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나온 증거와 기록들을 검토한 재판부가 그려낸 윤 씨 인간성의 단면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윤 씨가 벌인 성접대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성범죄'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확보된 이메일, 녹취록 등 객관 증거들과 일부 달라진 여성들의 진술 등을 감안할 때, 성접대에 동원된 여성들이 윤 씨의 재력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공소시효와 고소기간 도과 등을 이유로 윤 씨의 성범죄 혐의들에 대해 면소나 공소기각을 선고했다. 하지만 판결문의 논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재판부는 설령 공소시효가 살아있는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윤 씨의 '성접대'를 '성폭행'으로 단정짓기 어렵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1심의 논리는 2심과 3심에서도 대부분 그대로 인정됐는데, 2심 재판부였던 서울고법 형사6부는 (오석준 부장판사) 고뇌를 드러내기도 했다. 선고 과정에서 재판부가 "피해 여성이 매우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에 공감한다"면서도 "사실 인정과 법률적 판단은 공소가 제기된 범행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이다.

이처럼 '착취'와 '이용'이 뒤섞인 김학의 성접대 사건의 복잡한 양태는 재판 1년여 전 진행됐던 김학의 과거사 재조사 과정에서도 논란이 된 것으로 보인다. SBS가 입수한 1천248쪽 분량의 <김학의 전 차관 성접대 의혹 사건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에는 여성들을 '성매매 행위자'로 본 [1안]과 여성들을 '성범죄 피해자'로 본 [2안]이 함께 기재돼 있다. 하지만 극명한 시각 차를 드러내는 두 개의 안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보고서 속에서 평행선만 그리고 있다.
 

판단력 있는 성인 vs 파괴된 여성

윤중천의 성접대에 동원된 여성 A 씨와 B 씨의 행위를 '성접대'로 판단한 [1안]은 현직 검사인 조사단원에 의해 작성됐다. 반면 여성들이 겪은 일들을 '성폭행 피해'로 판단한 [2안]은 변호사 출신의 민간위원에 의해 작성됐다. 같은 조사기록을 제공받은 이들은 '무고'와 '성폭력'이라는 정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이렇게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 데에는 이 사건 여성들에 대한 근본적 시각 차가 자리하고 있다. [1안]은 여성들을 '판단력을 가진 성인'으로 전제하고 있는 반면, [2안]은 '윤중천의 폭력성에 점차 파괴되어간 약자'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김지은 씨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1심과 2·3심 판결 사이 시각 차와도 유사하다. 안 전 지사 1심 재판부는 김 씨를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인'으로 상정하고, 김 씨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들을 근거로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2·3심 재판부는 김 씨를 '위력에 짓눌려 제대로 항거할 수 없었던 여성'으로 가정했다. 이 가정을 토대로 안희정 2·3심 재판부는, 1심이 성폭력 피해자의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행위 이면에는 사실 위력에 의해 짓눌린 인간성의 단면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안 전 지사 행위를 '성범죄'라고 판단했다. 김 전 차관 사건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성폭력 피해자'라고 판단한 [2안]에서는 '피해자다움'과 '성인지 감수성'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안 전 지사 2·3심에 등장했던 논리들이다. 보고서의 해당 대목들을 통해 이러한 [1안]과 [2안] 사이 근본적 시각 차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위 대목은 이 사건에 등장하는 여성 A 씨에 대해 '성매매 행위자'라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 [1안] 중 일부이다. 여성들을 '판단력 있는 성인'으로 전제하는 [1안]은 이 사건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나서도 이를 오랜 시간 동안 주위에 알리거나 문제 삼지 않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자신의 성을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니었다면, 여성들은 자신들이 진술한 충격적인 성폭력 피해 이후 최소한의 후속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1안]은 또한 여성들이 윤중천의 원주 별장에 지속적으로 찾아갔으며, 때로는 원주 별장 사진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는 '외면적 행위'들을 근거로 이 사건이 '성폭력'이 아닌 '성접대'라고 판단한다. 여성들은 모두 판단력을 가진 성인으로, 이들의 객관적 행위를 근거로 봤을 때 이들을 성폭행 피해자라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들이 피해자라기보다는 '무고'의 가해자에 가깝다는 아래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반면 [2안]은 윤중천과 주변 유력자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파괴되어간 듯한 여성들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윤중천이 행사한 재력과 '남성성', '인맥' 등 사회적 권력에 주목한다. 윤중천이 지속적으로 행사한 폭력 속에서 여성들은 정상적인 판단력과 인간성이 파괴되었고, 지배-예속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보고서의 아래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이러한 전제를 토대로 [2안]은 특수상황을 감안해 이 사건 '성폭력' 범죄를 증명하는 데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윤중천과 김학의의 권력에 지속적으로 길들여졌던 여성들에게는 강간죄 성립에 필요한 폭행이나 협박 정도를 좀 더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2안]은 이와 함께 2013년 사건이 처음 불거졌을 당시, 검찰이 지나치게 여성들의 진술을 탄핵하는 데 집중했다고도 주장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진술해 다소 부정확할 수도 있는 성범죄 피해 진술을 조사 과정에서 검사가 지나치게 배척했다는 시각이다.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원종진 취재파일용-김학의 진상조사 결과보고서 CG

시각 차만 있고 논쟁은 없었던 조사 과정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 관계자는 이러한 [2안]의 시각이 "부당한 공격"이라는 입장을 SBS 취재진에게 밝혔다. 이 관계자는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성관계를 대가로 돈을 받은 증거, 김학의를 두둔하는 듯한 녹취록 등 객관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질문했던 것"이라며 "현행법상 이를 '성범죄'로 의율하는 것은 법률가로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팀원들 대다수는 형사 강력 분야에서 일해온 검사들이었는데, '김학의 같은 잘 나가는 귀족 검사들은 저렇게 일 안 하고 접대나 받으면서 승승장구했구나' 하면서 박탈감과 반감도 느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전 차관을 봐주기 위해 '성범죄'로 송치된 사건을 무혐의 처리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성들을 성범죄 피해자가 아닌, 성매매 행위자라고 판단한 [1안]과 유사한 결론이다. (보고서에는 경찰로부터 '성범죄'로 송치된 사건을 검찰이 '뇌물'로 적극적으로 지휘하지 않은 점에 대한 지적도 제기된다. 이 주제에 대한 검토는 뒤에 이어지는 취재파일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런데 조사단 보고서에는 이러한 [1안]과 [2안] 사이 시각차만 나열돼 있을 뿐 이에 대한 토론 과정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조사 참여자들이 완전한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딪치는 쟁점에 대한 정리와 상호 의견 제시가 있은 뒤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상식적인 보고서의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1안]과 [2안]은 완전히 다른 구성으로 작성된 채 병렬적으로 기재돼 있다. 두 안 사이 접점을 찾거나 상호 간 차이에 대한 토론을 벌인 아무런 흔적도 보고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수백 페이지에 걸쳐 논쟁 없는 평행선만 그리던 보고서는 느닷없이 야권 인사들에 대한 수사 권고를 앞세운 결론 부분으로 향한다.

박준영 변호사/김학의 사건

박준영 변호사 등 당시 조사단 운영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단원들은 "민간위원들이 포함된 '과거사 조사' 과정에서는 이처럼 대립하는 시각들을 치열한 논쟁을 통해 확장시키며 '법적 처벌' 너머 의미들을 생산해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처럼 유·무죄나 판단에 대한 합의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시각 차를 가진 전문가들이 토론을 통해 사회적 의미나 과제라도 찾아 보고서에 기재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사 조사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다른 조사단원은 "보고서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논쟁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한다. 검사 출신의 단원이 보고서 작성을 거의 도맡아 했고, 보고서 제출 기한이 다가와서야 다른 조사단원들이 '성범죄'를 강조하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다는 주장이다. 박준영 변호사는 "조사 내용을 각자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일들에 가려, 조사단이 목표로 했던 '미래지향적 과거사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SBS는 다른 조사단원들에게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을 여러 차례 물었으나 답을 하지 않았다.
 

조사의 정치화…'과거사가 된 과거사 조사'

이러한 지적은 당시 조사단이 처한 상황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2018년 11월 김학의 사건을 재배당받은 조사단은 4개월간 진척을 보지 못하고 2019년 3월경 기한 종료 압박을 받는다. SBS가 입수한 당시 조사단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 내역에 따르면, 뚜렷한 성과 없이 기한이 종료될 위기에 놓인 조사단원들은 기한을 연장하기 위한 방법에 골몰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충분히 조율되지 않은 '김학의 공개 소환'이 논의되기도 한다.

▶ 김학의 긴급 출금하고 "징계 받으면 할 수 없다" (관련 기사)

3월 초 조사단에서 중도에 나온 박준영 변호사는 이 무렵 "조사단원들만 알 수 있는 내부 정보들이 '단독 보도'의 형태로 언론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조사단은 점점 사안에 대한 폭넓은 조사와 이를 토대로 한 논쟁 대신, 외부 여론과 정치 역학에 더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에 대한 책임은 비단 조사단원들뿐 아니라 조사단 운영 전반을 조율했어야 할 상위 단체, 법무부 과거사위원회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아직 조사도 진척되지 않았던 김학의 사건에 대해 '엄정한 수사'를 지시한다. 바로 그날, 조사단 활동기한 연장에 부정적이던 법무부는 기한 연장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생명을 연장한 조사단은 점점 더 여론과 정치를 주된 추동력으로 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최근 검찰 수사 대상이 된 '윤갑근-윤중천 유착' 보도와 '김학의 임명에 최순실 배후' 보도는 이 시기에 맞물려 나왔다. 이와 함께 조사단 밖에서는 공수처 설치를 비롯한 검찰개혁의 근거로 '김학의 사건'이 빈번히 언급됐다. 진상을 있는 그대로 조사하기보다는, 여론과 정치에 편승해 사법적 처벌 범위와 강도를 조절하는 쪽으로 조사단 활동이 휩쓸리게 된 것이다.

세금을 들여 여러 전문가들에게 과거사 진상조사를 맡긴 건 객관과 중립을 지키며 사안의 진실을 밝혀내라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과 정치에 조사단 운영이 잠식되면서, 조사단은 백서조차 발간하기 어려운 초라한 기록유산만을 남겼다. 논쟁과 토론의 과정을 끝까지 밀고 가는 대신 구호와 정념에 포획되고 말았던 조사단의 전문가들. 2년이 지난 오늘 '과거사가 된 과거사 조사단'을 목도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 '김학의 사건' 취재파일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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