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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가 대답하다

표정훈 | 비문학 작가, 책 칼럼니스트

[인-잇]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가 대답하다
작가라고 나 자신을 소개하면 이런 질문을 받고는 한다.

"무슨 글을 쓰시나요?"

내 대답은 늘 같다.

"문학 작품을 빼고 뭐든 다 씁니다. 저는 물 쓰듯이 글을 씁니다."

'물 쓴다'와 '글 쓴다'라는 표현 가지고 말장난을 한 것이다. 요즘엔 물이 귀해져 '물 쓰듯 한다'는 말의 뜻이 예전처럼 다가오진 않는다. 뭔가를 아끼지 않고 펑펑 써댈 때 저런 말을 쓴다. 그러니까 나는 글을 펑펑 써대는 편이다. 그렇게 쓰면 글 품질이 아무래도 떨어지지 않을까? 이런 걱정을 늘 안고 산다.

물 쓰듯이 글을 쓰다가 글 품질이 떨어지면 누구보다 편집자가 먼저 눈치 챈다. '이 작가가 예전 같지 않구나. 성의를 다해 쓰지 않는 것 같다.' 독자들도 알아차린다. 독자들의 반응이 편집자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한두 번이면 몰라도 계속해서 글 품질이 떨어지면 업계에 소문이 난다. '표정훈 작가는 이제 끝났다더라.'

상황이 여기에 이르면 글 시장에서 더 이상 일을 맡기 어렵다. 어느 날부터인가 원고 청탁이 뚝 끊어진다. '열심히 많이 써왔는데 왜 이러지?' 이런 질문을 던져본들 이미 늦었다. 어느 분야든 시장은 무서운 곳이다. 시장은 인정사정없다. '당신이 내놓는 상품이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이런 평가를 가차 없이 내린다. 직업적 사형 선고 비슷하다.

그렇다면 품질 관리를 위해 글 생산량을 줄이는 게 능사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의 전집은 66권이다. 소설 장편만 100편, 중·단편은 약 350편이다. 그는 보조원까지 두고 매일 400자 원고지 40장에서 80장 사이를 썼다. 별명도 '인간 타자기'였다. 손에 경련 증세가 온 다음부터는 구술하여 보조원이 받아 적게 한 뒤 나중에 직접 고쳤다.

영국 작가 에드거 월리스(1875∼1932)는 서른 살부터 27년 동안 장편만 170권 넘게 발표했다. 초기 축음기인 왁스실린더에 구술 녹음한 뒤, 비서에게 타이핑을 맡겼다. 전화를 받은 비서가 "월리스 씨는 한창 집필 중"이라고 답하자 상대방이 이렇게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탈고할 때까지 전화 끊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만큼 빨리 썼다는 뜻이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 그는 소설, 여행기, 수기(手記) 등 257편과 희곡 25편을 발표했다. 이렇게 다작하는 작가들과 정반대인 작가들도 있다. 마거릿 미첼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유일한 발표작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작가 하퍼 리도 마찬가지였으나, 세상을 떠나기 7개월 전 '파수꾼'이 출간됐다.

작가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작품이 많지 않은 경우도 있다. 프랑스 작가 레몽 라디게는 스무 살 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시집 한 권, 희곡 한 편, 소설 '육체의 악마'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에는 각각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입 속의 검은 잎'이 나온 윤동주와 기형도가 있다.

프로야구에서 3할 이상을 치면 좋은 타자로 평가받는다. 열 번을 쳐서 그 가운데 세 번이 안타가 되면 좋은 타자다. 바꿔 말하면 열 번 가운데 일곱 번을 아웃당해도 좋은 타자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작가는? 쓰는 글마다, 내는 책마다 안타일 수는 없다. 작품도 별로고 판매량도 신통치 않거나, 작품은 좋은데 잘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꽤 유명한 작가라면, 작품이 예전 같지 않은데 많이 팔릴 때도 있다. 작품도 좋고 판매도 잘 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작가, 문서, 글쓰기, 작문, 키보드, 타자기, 글씨, 만년필 (사진=픽사베이)

바로 그렇기에 작가는 꾸준히 부지런히 계속 쓰는 수밖에 없다. 작품이 많지 않은 작가들 대부분도 알고 보면 발표하지 않은 원고가 많다. 설령 지금 당장은 쓰고 있지 않더라도 작품에 대해 늘 생각해야 한다. 듣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작품의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글 쓰기 가장 좋은 자기만의 루틴을 만들어 지켜야 한다. 오전 8시에 눈을 떠 가볍게 목욕을 한 뒤 아침을 먹는다.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정장 차림으로 정각 9시에 서재로 들어가 점심 때까지 3시간 동안 집필에 몰두한다. 스무 살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 동안 이러한 일과를 반복했다.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이다.

7시에 일어나 8시에 아침을 먹고 9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아주 잠깐의 식사시간 외에는 꼼짝 않고 서재에서 글을 쓴다. 하루 2000단어 이상, 많으면 4000단어까지 썼다. 글 진도가 나가지 않아 한 글자도 못 쓰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에조차 위와 같은 일정을 정확히 지켰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다.

"기분에 좌우되지 말고 계획에 따라 작업하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그만 써라. 언제나 제일 먼저 할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그림 그리고 음악을 듣고 친구 만나고 영화를 보는 등 다른 모든 일들은 그다음에 하라." 미국 작가 헨리 밀러의 조언이다. 작가 바버라 애버크롬비는 미국에서 '작가들의 멘토'로 유명하다. 그는 '작가의 시작'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작가 생활 초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식탁에서도 글을 썼고, 젖을 먹이면서도 글을 썼으며 침실의 낡은 화장대에 앉아 글을 썼고, 나중에는 작은 스포츠카 안에서 학교가 파하고 나올 아이들을 기다리며 글을 썼다. … 돈이 없을 때에도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 말고는 가계에 도움을 주는 게 없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글을 썼다. 내가 정말 작가인지 아니면 교외에서 미쳐가는 애 엄마일 뿐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진짜 작가'는 그저 계속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애버크롬비의 말이 맞다. 작가 스티븐 킹은 성탄절, 독립기념일, 그리고 자신의 생일만 제외하고 매일 글을 쓴다. 자주 게을러지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하루를 쓰지 않으면 글쓰기 리듬을 회복하는 데 이틀이 걸린다. 이틀을 쓰지 않으면 사나흘 걸린다. 작가란 무엇인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작가다. 글을 쓰고 있을 때만 작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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