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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취미는 곧 생존이다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조심하세요! 여가를 잃으면 영혼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If you are losing your leisure, look out! -- It may be you are losing your soul.)
 
- 버지니아 울프 -

방금 깻잎 떡잎을 모종 화분으로 옮기는 일을 마쳤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내가 마치 홈 가드닝에 익숙한 사람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머리털 나고 처음 해보는 일이다. 한국에서 공수해온 깻잎 씨를 몇 년간 냉동고에 처박아 둔 채 그대로 방치했었다. 그간 공사다망한 삶을 살며 씨 하나 심을 여유를 제대로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올봄 드디어 깻잎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건 다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덕분(?)이었다. 코로나19는 우리 삶에 많은 부정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런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기도 한다. 동면에서 깨어난 건 깻잎 씨만이 아니다.
 
마음속 냉동고에 넣어두고 오랫동안 돌보지 못했던
내 삶의 여유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요즘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일이 많아졌다. 얼마 전 꽃샘추위로 호수가 얼어붙은 날(핀란드는 보통 4월 초순까지 겨울이다), 호수 위에서 겨울 윈드서핑을 타보았다. 예전부터 이런 스릴감 있는 행복을 직접 느껴보고도 싶었고, 얼음 위라 물에 빠질 위험도 없을 것 같아 중년 여성에게는 익스트림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겨울 윈드서핑에 도전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인잇 윈터 서핑

한 외신 기자는 핀란드에서 이 스포츠를 직접 체험한 후, 핀란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행복 제조기'라고 극찬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막상 해보니 시속 80km나 되는 강한 바람을 견디며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게 만만치 않았다. 얼음 위로 몇 번이나 곤두박질쳐 넘어졌다. 친절하게 개인 트레이너가 되어준 겨울 윈터 서핑 전 세계 챔피언 페오도르 기르이타스(Feodor Gurvits) 씨는 "한국인의 의지를 보여주라!"며 끝까지 격려해주었지만, 너덜너덜해진 몸 상태 때문에 이쯤 해서 그만해야 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보니 허벅지 뒤편이 자줏빛 멍으로 가득했다. 조금 무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나이에 '영끌'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 나에게 조용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코로나 시대에는 나뿐만 아니라 새로운 취미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요리, 홈 가드닝, 홈트레이닝은 이미 대세다. 취미 키트와 악기도 예전보다 많이 팔리고 있으며 '취목수'(취미로 가구를 만드는 사람들) 등 생활 공예를 즐기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한다. 이런 취미의 대중화가 코로나 시대에 가시화되기는 했지만, 몇 년 전부터 우리의 마음은 이미 '워라벨(일과 삶의 균형)'과 '저녁이 있는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국내 한 증권사에서 50세 이상, 잔고 1,000만 원 이상 고객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을 묻자 '평생 할 수 있는 취미를 갖지 못한 것'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코로나 시대의 '취미 붐'은 코로나 19가 종식된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나도 겨울 윈드서핑은 다시 도전할 거라고 장담 못 하지만, 홈 가드닝은 앞으로 내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 될 것 같다. 올해는 시에서 관리하는 주말농장도 분양받기로 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도시농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핀란드 사람들을 지켜보며 느낀 것 중 하나는 이들이 취미 생활을 심각한 수준으로 중시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핀란드 사람 중 60%는 여가가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유명한 소설가 카렌 블릭센은 "씻고 먹고 마시고 일하고 자는 일 외에 어떤 기대나 계산 없이 희망도 절망도 없이 자발적으로 매일 빠지지 않고 조금씩 하는 '그것'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했다. 핀란드 사람들도 취미가 자신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의례 자기소개를 할 때면 이름 다음에 꼭 취미를 얘기한다. 취미가 없는 사람은 소개 시 머쓱해질 수도 있다.

우리 딸이 중학교에 처음 올라갔을 때 학부모 참관 하에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이름을 밝히고 자신의 취미를 얘기한 뒤 자리에 앉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 딸이 벌써 긴장하는 듯 보였다. 초등학교 때 여러 취미를 시도했지만 계속 이어진 취미는 없었기 때문이다. 딸은 민망한 듯 자기 이름만 얘기하고 그냥 털썩 앉았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딸과 상의하고 당장 기타 교실에 등록시켰다. 핀란드 학교에서는 학부모 면담 시간에도 선생님이 꼭 아이의 취미에 대해서 물어본다. 취미가 아이들의 균형 잡힌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공부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아쉽게도 그동안 열심히 받던 피아노 레슨을 중단해야 했었다. 다른 시대, 다른 세상 얘기다.

다 큰 어른에게도 취미는 중요하다. 누구나 다 직업의 세계에서 성공할 수는 없지만 취미 생활에서는 작은 성공을 맛볼 수 있다. 또한, 건전한 취미 생활은 심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지능까지 높여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레시피로 요리를 해보는 것만으로도 지능이 4.71%나 향상된다고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패트리샤 린빌 (Patricia W. Linville) 교수가 주장한 '자아의 다양성'(self-complexity) 이론 또한 눈길을 끈다. 취미 생활을 통해 자아의 다양성을 가지게 된 사람은 취미 생활 없이 일에만 몰두해 자아상이 다양하지 못한 사람보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에 걸릴 위험이 훨씬 낮다고 한다. 단편적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기대고 있던 하나의 자아상이 무너질 때 도미노처럼 자존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취미는 이럴 때 우리의 방어벽이 되어 준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 국민들이 즐기는 공통적 취미가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여러 활동, 손으로 하는 공예, 콘서트나 전시장 방문 등 예술 감상과 독서, 그리고 생활 체육을 가장 좋아한다. 모든 국민이 1년에 최소 1권의 책을 읽으며, 2명 중 1명은 야생 베리, 야생 버섯 등을 숲에서 채집하고 낚시도 즐긴다. 10명 중 1명은 재봉틀이 취미이며, 5명 중 1명은 뜨개질을 즐긴다. 한국인의 취미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가장 많이 즐기는 취미는 등산, 운동, 영화/동영상 콘텐츠 시청, 음악 감상, TV 시청, 인터넷 서핑, 게임 등이 있다. 이중, 등산과 운동을 제외하면 신체적 움직임이 거의 없고 수동적인 취미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스테빈스(Robert A. Stebbins)교수가 쓴 『진지한 여가』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훈련이 필요하지 않고 오감을 통해 쉽게 즐길 수 있는 TV 시청, 영화 감상, SNS 등의 수동적 취미를 '가벼운 여가'라 부르며 경계하고 있다. 가벼운 여가만 즐길 경우, 신체적-정신적-사회적 건강 상태를 위협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인내와 노력을 통해 기술과 지식 및 경험 축적이 필요한 예술, 공예, 스포츠, 가드닝 등을 '진지한 여가' serious leisure로 분류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에게 깊은 성취감을 가져다주며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는 더 바람직한 여가 활동은 바로 '진지한 여가'이다.

흔히 가장 이상적인 취미 활동은 4가지 다른 종류의 취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 몸을 쓰는 취미, 머리를 쓰는 취미, 창의력을 기를 수 있는 취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취미가 바로 그 4가지에 해당한다. 이 점에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롤모델이 될 수 있다. 그는 그림 그리기, 벽돌 쌓기(몇 년에 걸쳐, 그의 사택 벽돌을 직접 다 쌓았다고 한다), 글쓰기, 반려동물과 금붕어 키우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상상하면 조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는 머리 위에는 새, 발 옆에는 개와 고양이를 두고 업무에 임한 적도 있다고 한다. 스스로도 "진정으로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원한다면 적어도 2~3개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취미는 '진짜' 취미여야 한다 (To be really happy and really safe, one ought to have at least two or three hobbies, and they must all be real)"고 이야기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처칠 총리는 서재에서 밤늦도록 그림 그리기에 몰두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림 그리기는 그에게 스트레스를 푸는 최선의 휴식이었고 그가 맡은 어려운 임무를 보다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였다. 그는 이런 취미 덕분에 정치에서 은퇴하고도 화가와 작가로 인정받으며 풍성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요즘 '기본소득'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발전하며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때, 기본소득으로 소득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그 기본 소득을 받고 나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건전한 취미 생활이다.

유명한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서는 취미 생활을 생존 욕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 쪽으로 분류했지만, 앞으로 취미 생활은 인류의 생존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욕구가 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의든 타의든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노동하는 인간)에서 호모 오티오수스(Homo Otiosus, 여가 지향의 인간)로 향해 가는 인류에게 취미는 중요한 '생존 기술'이 되어줄 것이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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