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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잊지 말아야 할 얼굴"…김태현 스토킹 살인사건 취재기

막지 못한 스토킹에 스러진 세 모녀를 추모하며

'서울 노원에서 세 명 시신 발견.'
 
목요일인 3월 25일 밤 10시 50분쯤. 한 취재원으로부터 짤막한 첩보를 입수한 취재팀은 전후 사정 파악을 뒤로하고 차량에 탑승해 곧장 서울 노원구로 향했습니다. 즉시 단체대화방이 꾸려졌고 취재가 시작됐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가 발견된 건지 쉴 새 없이 전화를 돌리면서 행선지를 바로 잡았습니다. '경찰, 서울 노원구서 세 모녀 살해 후 자해한 피의자 체포'. 이날 밤 11시 59분, '김태현 스토킹 연속 살인사건'으로 기억될 이 사건의 1보를 SBS가 띄웠습니다. 타사에서 2보가 나오기까진 2시간이 넘는 공백이 있었습니다.

취재팀은 밤새 세 모녀가 발견돼 현장감식이 한창인 현장을 지켰습니다. 날이 밝고 주민 인터뷰를 통해 쏟아진 오보들 속에서 SBS가 사건을 제대로 알려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첫날 새벽의 고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한 아파트서 세 모녀 숨진 채 발견

26일 오전 7시 30분쯤 연합뉴스가 기사를 띄운 뒤로 아파트 앞엔 취재진이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기자들은 현관 앞을 지나며 입을 여는 이웃주민마다 몰려 녹음기를 들이댔습니다. '큰딸의 헤어진 남자친구의 범행이 틀림없다' '약 1년쯤 전 이사 왔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무분별하게 기사화 됐습니다.

전 남자친구의 집착이 맞다면, 범행 동기는 언뜻 비교적 쉽게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취재팀은 당사자들이 고인이 되어 나서서 해명할 수 없는 사건일수록 신중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습니다. '과연 주민이 20대인 딸의 사생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까?'하는 현장 기자의 고민도 더해졌습니다. 취재팀은 사정을 알만한 주변인들, 특히 피해자 중 큰딸의 친구들을 수소문했습니다. 남자친구였다면 가까운 지인들이 모를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모녀' 살해 피의자, 범행 뒤 휴대전화 삭제
"김태현이요?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어렵게 연결된 통화 너머로 큰딸의 친구들은 피의자의 이름 앞에서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언론 취재를 일절 거부하던 친구들은 정확한 정보 전달이 곧 고인의 명예와도 연결된단 끈질긴 설득에 망설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연애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단 친구는 '확실히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오히려 친구들은 잘못된 정보로 마구 찍혀 나오는 기사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당일 SBS는 8뉴스 리포트에서 큰딸 김 모 씨가 최근 스토킹 때문에 전화번호까지 바꾼 점을 근거로 이 사건이 스토킹 범죄임을 분명히 알렸습니다. 여러 친구들 인터뷰를 통해 헤어진 남자친구가 아니란 점도 바로 잡았습니다. 같은 시간 다른 지상파방송 뉴스에서 "용의자는 숨진 큰 딸의 헤어진 남자친구"라고 전한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SBS는 최초 신고자와 신고자의 부탁을 받고 경찰보다 먼저 25일 집 앞에 도착했던 친구 등 2명을 대면 인터뷰해 김태현의 스토킹이 3개월 간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친구들이 밝힌 스토킹 정황은 여러 형태로 퍼지며 공분을 자아냈습니다. 이날 마침 피의자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시작됐습니다.

취재팀은 세 모녀 유가족과의 접촉을 위한 시도도 계속했습니다. 부검 뒤 2일장으로 짧게 치러진 장례식장을 찾아 사실 보도를 위한 진심을 전하려는 노력 끝에 애초 언론 보도에 큰 거부감을 드러냈던 유가족의 인터뷰 승낙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먼저 두 딸의 친가 쪽 유가족 2명을 인터뷰해 안타까운 사정을 전했습니다(3월 30일 보도). 피해자 중 어머니의 언니를 만나 외가 쪽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4월 6일 보도). 단란했던 가족의 생전 상황을 전하는 유가족 인터뷰가 전해지며 피의자의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 높아졌습니다.

서울 아파트 스토킹 피살 피해자(큰 딸)과 지인 대화

결정적으로 취재팀은 큰딸이 지속적인 스토킹에 시달리며 친구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입수해 공개(3월 31일 보도)하며 스토킹이 어떻게 집요하게 이뤄졌고, 피해자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알렸습니다. '아파트 1층에서 스윽 다가오는 검은 패딩', '집에 갈 때마다 돌아서 간다'는 등의 메시지에는 피해자의 피해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머뭇거리던 다른 언론사들에서도 해당 사건을 스토킹 범죄로 좁혀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상이 공개되기 전 김태현이 급소만을 노린 점 등 범행이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자칫 엽기적인 범죄 행각만 각인되지 않을만한 수준에서 경찰 수사 내용을 연속으로 전했습니다. 범행 동기와 연속 살인은 우발적이라고 주장하는 등 피의자 조사에서의 김태현의 진술 내용을 취재해 보도했습니다. 또 김태현이 집주소를 알게 된 경위와 여러 증거 인멸 정황, 계획범죄 정황이 확인된 점, 프로파일러 투입과 사이코패스 검사 검토 등 수사 과정 전반에 대해 가장 먼저 파악해 알렸습니다.

재발방지를 위한 고민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희생이 헛되지만은 않았으면 한다'는 유가족들의 뜻을 전하면서 9월 시행을 앞둔 스토킹처벌법의 허점을 짚었습니다(4월 6일 보도). 실제 스토킹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는 여성을 인터뷰해 우려와 걱정에 대해 듣고,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아직 빈틈이 크단 걸, 남은 사람들이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단 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9일) 오전 10시, 서울 노원경찰서에서 열린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이 사건은 스토킹 범죄가 맞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김태현 스토킹 연속살인사건'으로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회자될 사건의 성격을 정의한 겁니다. 이보다 1시간 앞선 시간, 서울 도봉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서울북부지검으로 구속 송치되면서 피의자 김태현은 '스토킹 혐의를 인정하느냐'란 질문에 "죄송하다"고만 답했습니다. [ ▶해당 영상 보러가기]

세 모녀 살인사건 피의자 김태현

죄 없는 세 모녀, 유난히 화목했다는 한 가정을 잔혹하게 무너뜨린 범인은 카메라 앞에서 절을 해가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검찰 수사 뒤 시작될 재판에서 달게 벌도 받을 겁니다. 그런데 공허합니다. 질문마다 꺼내는 "죄송하다"는 말이 가볍고 허무하게 들립니다. 싸늘한 주검으로 식어버린 세 생명을 되살릴 방법은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 지인들에게 고인이 된 어머니는 두 딸이 희망이라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는 25살, 23살 된 딸들 사진이 가득합니다. 사별한 아버지의 빈자리를 서로 채워가며, 어머니는 딸들을 위해서 또 딸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범행 당일도 어머니는 밤 늦게까지 일을 하고 귀가했습니다. 큰딸도 잔업까지 치르고 밤 10시 반이 넘어 퇴근했습니다. 지친 밤이지만 그래도 집에 가면 쉴 수 있어서, 서로가 있어서 좁은 집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겠습니다. 김태현은 그런 이들을 죽인 겁니다.

방음도 잘 되지 않는 낡은 아파트인데 세 생명이 흉기에 찔려 꺼지는 동안 이웃주민의 신고는 1건도 들어온 게 없었습니다. 경찰의 탐문수사 과정에서 한 주민이 "비명소리를 듣긴 했지만 예사롭게 생각했다"고 말했을 뿐, 범행 이후 사흘 간 현장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연락 두절을 수상하게 여긴 큰딸의 친구들이 지난달 25일 신고해 현장이 적발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김태현이란 이름을 우리가 알게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수사기관에 접수된 신고가 단 1건도 없었던 건, 올 1월부터 3개월 간 이어진 스토킹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밝은 성격으로 주변에 걱정을 끼치길 꺼렸단 큰딸 A 씨는 친구들에게 스토킹에 대해 털어놨지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경찰서를 찾거나 112신고해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한 친구는 "A가 대수롭지 않게 얘길 해서 그냥 웃고 넘겨버린 게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은 아주 오랫동안 '그때 만약 알았더라면'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어 괴롭겠습니다.

우리나라 수사기관과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등 여러 관련 행정 부처들, 입법을 책임지는 결정권자들 역시 이 친구들의 괴로움을 나눠져야 마땅합니다. 집에 돌아갈 때마다 길을 돌아서 가야 했던 큰딸 A 씨가 신고한 이력이 없단 건 '신고를 하지 않았다'보다는 '신고할 수 없었다'로 받아들여야 맞습니다.

'스토킹 범죄 처벌법' 통과

공교롭게도 세 모녀가 살해된 바로 다음날인 지난달 24일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국회 문턱을 넘었습니다. 22년 만에 드디어 스토킹 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스토킹은 처벌 가능한 행위가 아니었던 까닭에 경범죄처벌법상 지속적 괴롭힘 혐의만 적용돼 위반해도 '10만 원 이하 벌금이나 구료 또는 과료'를 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생명과 안전이 스토킹에 짓밟혔지만 모두가 혀를 찰만한 사건이 떠오른 때만 잠깐 이슈가 됐다간 다시 입법 논의가 수그러들면서 22년이란 시간을 그냥 지나쳐 왔기 때문입니다.

취재팀이 인터뷰한 한 스토킹을 경험한 여성은 "경찰서에 가서 스토킹 때문에 왔다고 하니까 '처벌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라고 말하더라"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토킹은 당하면서도 신고는 엄두를 내지 못할 행위로 굳어져 버린 게 아닐까 합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 싶을 수 있지만 우리 사회가 스토킹을 엄중히 다뤘더라면 과연 이번 사건이 일어났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고한 세 생명을 이렇게 아프게 보내게 된 걸 취재팀은, 기자이기 이전에 각자의 시민으로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제 2의 세 모녀'가 없으려면 남은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올 9월 시행을 앞둔 스토킹처벌법의 빈틈부터 메워야 합니다. ▽'지속적 또는 반복적' 행위여야 스토킹으로 인정하는 애매한 정의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죄가 안 되는 반의사불벌 조건 ▽접근금지 조치를 위반해도 과태료만 물고 형사처벌은 안 하는 처벌조항 ▽생략된 피해자보호 조치 등에 대해 개선이 필요합니다.

김태현 (사진=연합뉴스)

2021년 4월 9일, 김태현은 카메라 앞에서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건 그 얼굴 뿐만이 아닙니다. 3개월 간 스토킹을 견디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 큰딸 A 씨의 표정, 사회가 미처 보지 못한 피해자의 얼굴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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