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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뭘 해도 미쳤다 말 들을 것"…소리에 미친 사람

김영일 악당이반 대표

1. 잘 나가는 사진가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진값 비싼 것으로 더 유명했다. 1990년대 사진 한 장에 1천만 원, 가족사진은 3천만 원을 받았다. 이 돈 안 내면 누구 사진도 안 찍었다.

-사진 한 장에 1천만 원 받았다는 말은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만…

"지금도 값이 절대 싸지 않은데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을 불렀습니다. 그 사이에 사진값이 좀 올랐습니다. 예전에는 1천만 원 받았는데 지금은 2천만 원이고요. 가족사진은 3천만 원 받았는데 이제는 5천만 원 받습니다."

- 정말 2천만 원 받습니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누가 사진 한 장에 2천만 원을 낼까 싶은데요.

"네 안 주면 안 찍습니다. 그 가격은 굉장히 소문이 났기 때문에 누구만 깎아주고 그럴 수 없습니다."

인터뷰 당시 모습들

값이 비싼 만큼 최고의 장비로 최고의 작품을 만든다는 취지의 설명을 꽤 길게 했다. 예를 들면 사진 한 장을 찍는데 3만 와트의 전력을 사용하고 이를 위해 발전차를 동원하고 일본으로 보내 프린팅을 하고 프레임도 특별 제작한다는 것이다. 사진 촬영에 필요한 장비만 한 트럭이라는데 사진 한 장 찍는데 카메라 한 대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은 꿀꺽 삼켰다. 장비와 인력에 돈이 많이 들어서 정작 자신의 손에 떨어지는 돈은 300-4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이 사람을 30년 이상 알고 지내는 동료 겸 후배에게 정말 그렇게 받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다만 이 사람에게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늘 줄을 서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92년 개최한 이 사람의 첫 작품전 <김영일 초상 사진전 PORTRAIT 33>은 장안의 화제였다. 배삼룡, 황병기, 장선우, 홍신자, 정경화, 김지미, 박정자 같은 당대의 문화계와 연예계 스타 33명이 이 사람 카메라 앞에 섰다. 사진 한 컷 박는데 몇 시간이 걸렸지만 서른을 갓 넘긴 이 청년 사진가 앞에서 기꺼이 포즈를 취했다. 일종의 마케팅 전략일 수 있지만 그 업계에서 이 사람 명성과 존재감은 대단했다. 이 사람 말을 빌리면 우리나라 어지간한 재벌과 명사들 대부분이 이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대통령 세 명의 사진도 찍었는데 '나랏님'들에게는 사진값을 제대로 받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 사람 이야기는 잘 믿어지는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 사람 말을 그대로 받아써도 되는 것인지 조심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았다. 사진값은 그 시작일 뿐이다. 사진가로서 이 사람은 인물 사진, 광고 사진 등에서 이름을 날렸고 특히 '창간돌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거의 모든 잡지 창간호의 사진 작업을 도맡았다. 그럴 때는 한두 달 일하고 억대의 돈을 받았다. 사진으로 시작한 인생 1반은 명성과 돈, 자존심까지 모두 챙긴 화려한 시절이었다. 이때의 성공 방식이 이 사람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2. 1994년 잡지에 실을 사진을 찍기 위해 채수정이라는 국악인을 만났다. 젊은 여성 국악인이 목 푸는 차원에서 노래한 <편시춘(片時春)>이라는 단가 소리를 듣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대통령, 재벌 사진을 찍을 때도 긴장하지 않았는데 이 젊은 국악인의 소리를 듣고 나서는 셔터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며 마치 바울이 예수를 만나 한순간 눈이 멀었던 것처럼 국악과의 만남을 설명했다.

그 이후 삶이 달라졌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명인, 명창의 소리를 들었고 점차 귀가 열렸다. 이 좋은 소리를 담아두고 싶어 몸이 달았다. 독학으로 녹음기술 공부를 시작했고 외국에서 열리는 레코딩 관련 워크숍을 찾아다녔다. 한 대에 1억 원이 넘는 녹음기와 마이크를 비롯해 최신 레코딩 장비를 구입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이 사람 성격이 발동된 것이다.

김현채 연주자의 가야금 연주를 녹음하는 모습

그렇게 익힌 기술과 장비로 300여 종의 국악을 녹음했다. 소리가 담긴 마스터 테이프를 가지고 음반사를 찾아가 출반을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국악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게 거절 이유였다. 남들이 거절하면 내가 직접 국악 음반을 내겠다고 마음먹고 지난 2005년 국악 전문 음반사 악당이반(樂黨利班)을 세웠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나누자는 뜻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사진이 1반이면 국악은 2반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장비에 대한 집착이 보통 유난스럽지 않다. 필요한 장비라면 달나라에 가서라도 구해오고 돈이 없으면 몸을 팔아서라도 사오겠다는 말을 했다. 최고의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장비가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마이크 하나에 1천만 원, 녹음장비 하나에 1억 원, 영상렌즈 한 세트에 2억 원을 주고 산다.

국악 음반 시장에서 이 사람은 고급화 전략을 구사했다. 사진예술에서 익힌 성공방정식을 국악 음반에서도 적용한 것이다. 우리 국악을 스스로 허접쓰레기 수준으로 대접한다는 이 사람의 지적은 통렬하다.
"저는 퀄리티는 절대 양보할 수가 없어요. 그건 영상뿐 아니고 사운드도 마찬가집니다. 음향기술은 5.1채널을 넘어 7.1, 9.1채널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2채널로 녹음해놓고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만들어서 세계 시장에 나가면 누가 봐주고 누가 그걸 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내 자신이 나를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우리를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이 사람이 국악 음반을 고음질 SACD(super audio cd)로 만들기 전까지 우리나라 음악가 중에서 SACD로 음반을 낸 사람은 성악가 조수미가 유일했다.

"유니버설이나 이런 데 보면 자기네 음악가 중에 상위 1%에서 3% 사이만 SACD를 만들어줍니다. 우리 연주자들은 돈 싸 들고 가서 SACD 만들어 달라고 해도 안 만들어 줍니다."

그때 이 사람은 SACD로 국악 음반을 냈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지만 이 사람은 최고 음질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고 제작 시스템을 갖췄다. 음질 고급화는 기본이고 재킷 사진 한 장, 글자 한 자까지 신경 써서 명품 음반을 추구했다. SACD 음반 23종을 포함해 지금까지 총 170종의 음반을 내놨다. 음반 내는 데만 40억 원이 넘는 돈을 썼다.

인터뷰 당시 모습들

3. 국악을 명품으로 만들려는 이 사람의 시도는 SACD를 만들어 음질을 높이고 디자인을 고급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녹음 방식의 차별화도 추구했다. 소리를 섞어도 안 되고, 인공적으로 늘이거나 줄여도 안 되고, 잘라 붙여도 안 되고, 깎아도 안 되고, 덧붙여도 안 된다는 이 사람 철학은 확고하다. 일체의 기계적 조작 없이 연주자가 만들어낸 그 소리 그대로 세상에 전달해야 하고 후세에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감미료나 첨가물을 넣지 않고 본래의 물맛으로만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대부분 음반사는 음반을 제작하면서 믹싱 과정을 거칩니다. 저희는 그런 거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 하다 걸리면 그 엔지니어는 저랑 평생 얼굴 못 보는 겁니다. 믹싱이라는 게 결국 소리를 줄이고 키우고 늘이고 깎는 것인데 이렇게 만든 음반 들어보면 통조림 같아요. 통조림이라는 게 잔뜩 들어있긴 한데 안에 고형물이 돼서 다이나믹도 없고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만드는 것들을 통조림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요."

국악의 진정한 맛은 한옥 연주에서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사람이 pure recording, 순수 녹음이라고 이름 붙인 이 방식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음반을 녹음, 제작하면서 기술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고 어찌 보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국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는 최적의 장소는 한옥이라는 이 사람 주장도 찬반이 엇갈린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국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공연장에서 연주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인데 한옥 공연을 고집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람 회사에서 음반을 낸 사람들은 무명의 국악인들이 대부분이다. 이미 유명해진 사람들은 전성기를 지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저희 회사에서 나온 100장의 음반이 복도에 디스플레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어느 한 그룹이 쑥 빠져 있습니다. 그게 주로 대학 교수들입니다. 또 하나 없는 게 우리가 인간문화재라고 부르는 분들의 음반이 거의 없습니다. 문화재라고 이름 붙여진 분들은 음악적 측면에서 보면 이미 오래전에 전성기는 지났다는 뜻입니다."

내 연주 자신 있고 남의 아이디어 훔친 거 아니고 내 소리 세상에 들려주는 데 두려움 없는 사람이면 학력이나 출신 성별 나이 따지지 않을 테니 찾아오라는 것이다. 싹수가 보이는 유망주들을 지켜보다가 그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다.

"국악 대회에서 아직 입상도 못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리에 재능이 있고 열심히 하는 친구들을 꾸준히 지켜보다가 때가 되었다 싶으면 제가 먼저 연락을 합니다. 언제 와서 소리 녹음 한번 하자고 그러면 '예? 제가요?' 대부분 이렇게 놀랍니다."

음반 제작은 1천500만 원에서 2천만 원이 든다. SACD는 제작비가 두 배다. 음반 제작은 기본적으로 무료고 이익은 매출 기준으로 반반씩 나눈다. 다만 본인의 필요에 의해 음반을 만들 경우에는 제작비의 절반을 받는다.

국악 꿈나무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생각은 음반을 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악기가 없어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악기 지원도 한다. 음반에 회사 이름보다 연주자의 이름을 더 크게 넣는다. 공을 독차지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이익을 독점하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이익을 나누려고 한다. 음원을 다운 받으면 연주자에게 매출의 절반을 준다. 문제는 1년에 음원 다운 받아 생기는 수익이 얼마 안 된다는 점이다. 음원에서 나오는 1년 수익이 한 사람 당 5천 원이 안 된다. 그러니 나누고 말고 할 게 없는 것이다.

내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좋지만 산조에 대한 이야기만은 제대로 전해달라고 했다. 국악 가운데서도 이 사람의 산조 사랑은 유별나다. 산조는 한 사람의 연주자가 죽을 때까지 평생 단 한 곡만 만든다. 스승의 틀 안에서 음악을 짜고 궁극에는 스승의 틀을 벗어버리는 산조의 철학을 이 사람은 각별하게 사랑한다. 정연한 질서가 있지만 언제든 소멸될 수 있는 산조의 유연함과 비장함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소멸과 창조의 과정을 반복하는 이 음악은 영원한 현재형의 음악이라며 산조를 위해서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했다. 산조에 대한 이 사람의 긴 설명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산조라는 장르의 음악도 사랑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해석한 산조의 정신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4. 가업을 잇거나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국악계에서 이 사람은 이방인이다. 국내에서도 변방 음악 취급을 받던 국악을 고급화했고 새로운 음반 제작 시스템의 도입이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도 맞다. 국악을 들으려면 연주자는 물론이고 소비자도 이 정도의 투자와 노력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사람은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퓨어 레코딩과 현장 레코딩이라는 철학은 기존과는 다른 국악계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 누구 못지않게 우리 소리를 사랑하고 국악에 투자한 것을 부인할 사람도 없다.

지난 2012년 국악 음반 <정가악회 풍류3 가곡>으로 그래미상에 출품했고 예선을 통과했다. 접수가 된 것일 뿐 수상 후보가 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어쨌든 이 사람이 SACD 국악 음반으로 최고 권위의 상에 도전한 것 자체를 폄하할 일은 아니다. 그래미상을 받으면 대중들이 국악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출품했단다. 이때 경험을 이 사람은 '남의 잔칫집에 가서 전 부치다 온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국악이라는 장르를 들고 미국 음악이 주류인 동네에서 인정받으려 노력하는 일의 어려움과 덧없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당신이 거둔 구체적인 성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사람 답변이 궁색해진다. 그래미상에 출품한 음반도 판매량이 수십 장에 불과하다. 이 사람이 만든 170종 음반 가운데 100장 이상 팔린 것이 거의 없다. 어떤 것은 3장, 어떤 것은 8장이 팔렸으니 사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폭망이다. 지금까지 국악 음반 사업에 투자한 돈이 110억 원이라고 했다. 2003년 설립한 사진 콘텐츠업체 '그루비주얼'에서 나오는 매출의 10%를 악당이반에 쓴다. 이것만으로 턱없이 부족해 개인적으로 사진 작업을 해서 버는 돈은 물론 집안의 돈까지 가져다 썼다. 그나마 이삼 년 전부터 디지털 음원 전환 사업 등으로 만성적인 적자구조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

이 사람 사무실 창고에는 12만 장의 시디들이 포장도 뜯지 못한 채 상자째 쌓여 있다. 이 시디들은 이 사람 노력의 산물이지만 명백한 실패의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리 그 취지가 고귀하다 하더라도 이 사람의 노력은 '플라스틱 쓰레기'로 남아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인터뷰 당시 모습들

은둔의 삶을 살려고 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언론 인터뷰를 할 만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렇다 할 직함을 가진 적도 없다. 몇 번인가 자리를 제안받은 적이 있는데 응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말 국악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장관상을 준다고 하는데 거절했다. 앞으로도 국악으로 상을 받고 훈장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대신 우리 소리를 이용해 지식재산권을 수출한 공을 쌓아서 수출탑상은 받고 싶다고 했다.

"저는 우리 음악을 알리고 싶었지 제가 전면에 떠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디 행사에 오라든지, 상 받으러 오라고 하는데 가지 않았고 앞으로 갈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뭘로 상을 받습니까. 제가 한 거는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그저 실어 나르기만 했을 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자꾸 나서서 왔다 갔다 하고 전문가 행세를 하는 것은 망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살아온 방식이나 추구한 가치만으로 충분히 주목받을 사람이다. 거기에 이 사람의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졌다면 훈장을 받아도 몇 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만든 음반이 베스트셀러가 되지도 못했고 이 사람이 국악계의 생태계를 확 바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악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고도 할 수 없다.

녹음 우거진 숲속 산사의 소리를 담고 있다

5. 우리 소리와의 인연은 국악에서 멈추지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 보니 우리 자연에서 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산 정상에서 나는 소리부터 바다에서 들리는 소리까지 우리 소리의 다양함과 아름다움에 빠졌다. 이 사람처럼 밝은 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있는 모양이다. 파도 소리가 모두 다르다고 했다. 서해는 소리가 멀리서 오고 동해는 발 밑에서 들리고 남해는 파도 소리가 울렁거린다고 했다. 높이에 따라서 같은 풀벌레 소리들이 다르다며 직접 소리를 흉내 내며 설명했다. 우리 땅, 우리 바다, 우리 산에서 나는 소리들을 하나하나 고음질로 거두어서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소리들이 1천700종이다. 일부는 무료로 공개하고 고음질은 돈을 받는다.

문무대왕릉의 파도 소리를 기록하는 김영일

"저는 우리나라 판소리고 뭐고 이런 거 싸게 안 팔려고 합니다. 900원은 그냥 현상 유지하려는 것이고 일종의 떡밥이지요. 저는 이것을 9불, 99불이 아니고 990불을 받아내겠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업적으로는 안 돼요. 그렇지만 산업적으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생 3반은 이제 만 예순 살이 된 이 사람이 새로 열어 가려는 인생이다. 인생 세 번째 무대의 목표는 소리로 돈을 버는 것이다. 소리로 돈을 어떻게 벌겠느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발상을 바꾸면 얼마든지 방법이 있다고 본다. 효과음 한 세트 만들어주고 몇천만 원 받는 사운드 디자이너가 우리나라에서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느냐며 그럴 인재와 자원들은 널려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사람들과 자원들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은 게 문제라는 것이다.

지난해 뜻을 같이 하는 영상 전문가, 음향 전문가, 기획자들과 <쓰고쓰다>라는 이름의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소리와 같은 무형유산기록 콘텐츠를 이용해 사업을 하자는 협동조합이다. 조각 난 파일처럼 흩어져 있는 무형의 자산들을 모으면 귀한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이 사람 생각이다.

"다들 음악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제가 콜롬부스 달걀처럼 이런 소리들이 얼마든지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협동조합을 만들었고 그 일이 이제 태동돼서 막 시작이 됐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국악이나 음악만이 아니라 소리로서 하는 것이죠."

대취타를 이용해 곡을 만든 BTS의 예를 들면서 우리 국악을 현대적으로 활용하는 방안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소리를 활용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우리 소리가 8종이다. 중국이 6종, 일본이 4종, 미국은 1종도 없다. 이렇게 소중한 자산을 우리만 몰라본다고 했다.

"이게 조상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 중 하납니다. 대취타는 살아있는 왕을 위한 노래인데 BTS가 그걸 썼어요. 종묘제례는 죽은 왕을 위한 레퀴엠인데 아직 이게 한 번도 세계 시장에 오픈되지 않았어요. 거기서 뭘 꺼내 쓸지는 BTS 마음이고 블랙핑크 마음이에요."

'상업적으로는' 안되지만 '산업적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사실 그 말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사운드 바이오, 게임 음향, 영화, 광고 등을 예로 들었다. 현재 추진 중인 몇 가지 프로젝트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설명을 했다. 의욕은 느껴졌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소리를 통해 돈을 벌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람이 책임감을 언급했다.

"예전에는 되든지 안 되든지 제가 혼자 달싹거리면서 했는데 조합은 사람 모아놓고 수십 명이 하나를 향해서 가는데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정말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거지요."

자기 멋에 빠져 육십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남들과 다른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돈과 열정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살아왔다. 그 대가로 자기만족을 얻었고 일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남들보다는 자신을 앞세우며 살아온 사람인데 이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국악에서 소리로 확대된 인생 3반은 인생 2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지만, 달리 보면 인생 2반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인생 3반이기도 하다. 이 사람이 내뱉듯이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 당시 모습들

"더 이상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양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음반이 더 이상 상업 물품이 아니라며 음악가의 명함 같은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자신이 그렇게 공을 들여 고급스럽게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이제는 명함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의 변화에 자신이 제대로 대응해왔느냐는 진지한 반성인 셈이다. 그 반성 끝에 나온 대안이 인생 3반, 소리로 돈 버는 세상을 열겠다는 것이다.

사회적 협동조합 <쓰고쓰다>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산조 전집 완성과 함께 4반이 되기 전에 할 일이다.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으면 여기에 지금까지 모은 모든 음원과 음반, 자산을 넘길 생각이라고 했다. 자녀들에게 줄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5년이 지난 시간보다 훨씬 투철하고 집약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역량과 자산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앞으로 5년 동안 모두 불태우겠다는 독한 다짐으로 들렸다.

6. 중학교 때 성적은 전교에서 손꼽을 정도로 좋았지만 실질적인 공부를 하고 싶어서 상고를 선택했다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면 국영수 공부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쳇바퀴 돌 듯 살아갈 것이 싫었다. 여기서부터 이 사람 범상치 않다. 상고에 가서 공부를 해보니 '재화를 만지는 일은 자기와는 안 맞는 거 같아' 재수 끝에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문학평론가 김현의 책을 읽었고 예술과 미학에 관해서 그 사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했다.

대학 시절 '라이방' 쓰고 '할리'를 몰고 다녔다. 그 당시 이 사람을 가깝게 지켜본 사람의 증언이 없었다면 이 말도 의심했을 것이다. 아무리 부잣집 아들이라도 1980년대 초반에 대학생이 최고급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이다. 이 사람 인생 어떤 대목도 진지하지 않거나 평범했던 시절은 없었다. 선글라스 끼고 할리를 몰고 다니는 학생이었다고 하면 겉멋 들고 여학생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모습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런 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말하는 것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고 후배들이 보기에 카리스마가 넘치는 선배, 말 건네기가 어려운 선배였다. 80년대 초반 대학가는 시위로 얼룩진 시절이었는데 이 사람은 곧잘 시위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댔고 그 때문에 경찰서 신세를 몇 번인가 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과의 다름을 즐기는 사람이다. 남들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간다고 할 때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고 남들이 버스 타고 다닐 때 최고급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남들이 공부할 때 이 사람은 놀았고, 남들이 돈 벌겠다고 용을 쓸 때 이 사람은 돈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육군사관학교 9기 출신의 장교였다. 한국전쟁에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무공훈장을 여러 번 받았고 5·16군사쿠데타에도 참가했지만 군이 민정 이양 약속을 지키지 않자 중령으로 예편했다고 했다. 집안은 대대로 부자였다. 일제시대 종로사거리에 금은방 세 개를 경영하는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는 축음기로 음악을 듣던 분이었고, 아버지는 귀한 음반이 있으면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구해왔다는 이야기도 했다. 부친이 이 사람 결혼 선물로 최고급 오디오 기기인 마란츠7을 사줬다. 눈과 귀가 예민하고 소리와 그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있었다는 이야기보다는 무슨 일을 했는가에 집중해서 말했다. 미국 유학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사진학과 졸업생으로 미국 유학은 자신이 1호라고 했다.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 물었는데 이 사람은 학교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졸업을 한 것도 아니고 그 학교에서 성실하게 공부를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란다. 미국에 유학(留學)을 갔는데 '유학(遊學)'이 되었다고 말했다. 학교에는 적만 두고 사실은 3년 반 동안 놀다 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놀다 왔다고 했지만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대륙을 가로로 3번, 세로로 6번 가로지르며 미국이라는 사회를 경험하고 이를 카메라에 담았다. 미국 대학 도서관을 뒤져 자신에게 필요한 자료를 수집해서 읽었다. 인류학에 관심을 가진 것도 이 시기다. 번듯한 대학에서 학위를 따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허송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도서관에 처박혀 학위를 따고 이력서에 적을 경력 하나를 추가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이 사람은 삶이 극적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줄도 안다. 국악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익히게 된 것인지 아니면 타고난 재주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구사하는 단어가 풍부하다. 어떤 말은 만들어내기도 한다. 풀벌레들의 날갯짓을 이 사람은 썰개질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단어라 무슨 뜻이냐고 했더니 자신이 즉석에서 만들어낸 말이라고 했다. 영어를 써야 할 때는 영어를 쓰고 한자어를 써야 할 때는 한자어를 쓰고 우리 고유어를 써야 할 때는 우리 고유어를 쓴다. 때로는 창을 섞기도 하고 때로는 몸짓과 손짓을 더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 도중 몇 번인가 자신의 감정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감정도 풍부하고 이를 표현하는 표정도 풍부하다.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7. 인생 3반을 시작한 이 사람에게 그러면 인생 4반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했다. 무엇이냐고 했더니 죽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으로 인생 1반, 국악으로 인생 2반, 그것을 활용해 인생 3반을 열어보겠다는 사람이니 인생 4반은 더 그럴듯한 것을 말할 줄 알았는데 죽음이라니…. 이 말을 듣는데 가슴이 덜컹하는 느낌이었다. 입만 열면 100세 인생을 말하는 판에 겨우(?) 환갑 됐다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인생을 전속력으로 달려온 사람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이미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살아온 사람이기에 더 이상 쏟아부을 것이 별로 남지 않았고 그래서 앞날에 더 많은 시간이 굳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거기에 허풍이든 과장이든 뭐가 섞였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 말을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끝간 데 없이 나는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죽을 자리 정해놓고 그 앞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쓸 거냐 끝없이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수집한 소리 콘텐츠를 욕심 내는 대기업들이 있다. 외국에도 있고 국내에도 있는데 이 사람은 그런 사람들, 특히 외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산을 넘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자신이 수집하긴 했지만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거 제거 아닙니다. 우리 민족 전체 자산이고 제가 만든 거 아닙니다. 다 우리의 자연에서 나온 것이고 우리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거고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피땀 흘려 다 함께 만든 겁니다."

인터뷰 전날 늦게까지 진도에서 녹음 작업을 하고 올라와서 3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다고 했다. 점심을 안 먹은 지 17년이 됐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라는 것이다. 2020년까지 산조 전집을 내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재작년부터 좋아하던 술을 딱 끊었다. 독한 사람이다.

남부럽지 않은 부자라고 알았는데 정작 이 사람은 자기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얼마 전까지 서울에서 2억 9천만 원 전셋집에 살다가 치솟는 전셋값이 버거워 회사 근처로 전세를 옮겼다. 전세를 옮기고 나니 3천만 원이 남았다고 좋아했다. 아내에게는 생활비로 2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국악에 투자하고 소리에 투자하느라 두 아이 학원도 마음대로 못 보냈다. 큰아이가 고3 되었을 때 아내가 처음으로 우리도 집을 사자고 했을 때 이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돈이면 음반을 몇 장 더 낼 수 있는데 그 돈을 집에다 넣느냐고 했습니다. 요즘에는 이제 인구가 줄어드는데 지금 집 사면 바보 된다고 아내에게 하는데 누가 바보인지 모르겠습니다."

파주출판단지에 이 사람 인생 전체를 쏟아부어 만든 3층 건물이 있다. 스튜디오 겸 사무실로 쓴다. 그동안 모은 모든 자료와 장비가 보관된 곳이기도 하다. 가난한 음악가들에게 싼값으로 스튜디오를 빌려주기도 하고 협동조합을 같이 하는 젊은 몽상가들과 함께 꿈을 꾸는 둥지 같은 곳이다. 이 건물 짓느라 평생 처음으로 빚을 졌다. 소리 작업에 최적화해서 지은 건물이라 건축비가 제법 들었다고 했다. 올해 지나면 은행 빚이 6억 정도로 줄어들 것이라고 했지만 평생 처음으로 진 빚이 꽤 신경 쓰이는 눈치다. 여기에 있는 장비들이 얼마냐고 물으니 이것은 몇 억, 이것은 몇 천만 원이라는 말이 툭툭 튀어나왔다. 사람 기 죽이는 데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다.

인터뷰 당시 모습들

8. 이 사람 눈빛이 가끔 희한하게 번뜩였다. 무언가에 완벽히 몰입한 사람의 눈빛인데 그런 눈빛이 오래 지속되면 진짜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은 사진에 미쳤고, 소리에 미쳤다. 이제는 사람에 미쳐있다. 이 사람도 그것을 잘 안다.

"뭘 해도 저는 미쳤다는 말을 들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왕이면 미쳤다는 소리 듣는 거 그 미친 짓의 꼭짓점을 멀리 갖다 놓거나 높이 갖다 놓는 겁니다. 그러면 낮은 데서부터 보는 사람은 저 위의 것을 보면 요즘 애들 말로 헉! 할 것이고 높은 것부터 보면서 이걸 이해해주는 사람은 투자자가 될 겁니다."

8시간 넘게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내가 모르는 세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 내가 상상도 못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가 모르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판소리 한마당을 제대로 들은 느낌이었다.

*이 인터뷰는 지난 3월 26일 악당이반 스튜디오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김영일 대표와의 인터뷰, 2편 영상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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