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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성급한 위로, 마음의 상처만 깊어집니다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인-잇] 성급한 위로, 마음의 상처만 깊어집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은 무엇일까?

입장과 형편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바라는 바가 좌절될 때 또는 억울하게 책임을 져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 살면서 누구나 고난을 겪듯이 회사생활을 하면서 대부분 이런 속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진급 누락, 징계, 만년 과장, 보직 해임, 문책성 (지방) 전출 등이 그런 것들인데 어느 정도 회사생활을 한 직장인이라면 이 가운데 어느 하나는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 참담한 일을 당했을 때의 기분, 정말 속이 쓰릴 정도로 아프다.

최근 내 친한 동기 중 한 명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 작년에 진급이 또 누락되어 자리 보존 여부가 불명확한 상태에서 의도치 않은 사건이 벌어져 결국 보직 해임된 뒤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진 나는 밥맛을 잃을 정도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울적한 마음에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기댄 상태에서 "음…"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이때 전화가 왔다.

"발령 봤지. 어떻게 하냐? 전화는 해봤어?"
"아니."
"어서 해라. 그래도 네가 제일 친하잖아. 위로는 해줘야지."

난 "그래야지"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그 친구에게 바로 전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속은 상했지만 지금은 전화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건 과거 내가 문책성 지방 전출을 당했을 때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다. 차장 시절 새로 온 팀장과의 불화로 본사 핵심 부서에서 지방 지점 평사원으로 방출된 적이 있었다. 아래 글은 당시 지인들에게 위로 전화를 받고 난 후의 심정을 적은 것이다.

 

할 일 없는 내 자리에 전화가 울린다. 받고 싶지 않다. 또 누군가가 내가 한직으로 밀려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위로하는 전화일 것 같아서이다. "괜찮니?", "그러게 왜 팀장과 그랬어?", "좀 있어봐. 잘 되겠지.", "아니, 네가 왜 거기에 가 있어?" 대부분 마음을 달래주는 엇비슷한 말을 건넨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내 처지에서 보면 난 전화해준 그분들에게 굉장히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위로 전화'를 받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기는 커녕 오히려 나 자신이 더 초라해져 가슴앓이가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 상대방의 상처가 깊을 때는 그냥 모르는 척 놔두는 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보다 낫다.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것이다. 그런데 경험상 지금 막 겪고 있는 괴로움 혹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덜어 주거나 달래줄 수가 없다.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상대방이 제대로 괴로워하고 슬퍼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그 시간이 없이 그 괴로움과 슬픔을 한시라도 없애야 하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비록 선한 의도일지라도) 위로의 말은 상대방에게 또 다른 마음의 상처만 줄 뿐이다. <슬픔의 위로>의 저자 매건 더바인도 이러한 내 생각과 결이 같은 글을 썼다.

 

위와 같은 위로의 문장은 결국 "그러니 그렇게 슬퍼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준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지우고 축소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슬픔은 해결하고 원만하게 매듭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평생 안고 갈 경험이다. 슬픔에 젖은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슬픔의 현실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난 그 친구를 위해 당장 무엇을 해 보겠다는 충동을 억누른 채 발령이 난 뒤 며칠을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을 더 보냈고 그 뒤 연락하여 담담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와 같은 시간을 둔 이유는 그 친구가 험한 꼴을 당한 후 밑바닥까지 내려간 자신을 추스르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슬픔, 아픔 혹은 고통을 겪는 이는 누구나 자신이 이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을 뺏고 바로 조언에 들어가면 나의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은 탈이 나게 마련이다. 사실 위로도 위로 나름으로 본인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억울함과 슬픔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에게 위로라는 건, 듣기 거북한 좋은 말에 불과하다. 위로의 말은 양면이 있어서 아무렇게나 쓸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말일 뿐이다. 요컨대 위로의 말만 듣고 멍든 가슴이 아물었다는 얘기는 실제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지난주 설 연휴였다. 예전처럼 온 가족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휴대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나의 처지, 친척들의 상황은 서로 알고 있다. 시나브로 장기간 휴직 중인 직장인, 파산 직전에 몰린 자영업자, 고용 한파에 취업 못한 젊은이, 주거 불안을 몸소 겪고 있는 세입자, 이런 고통받는 분들이 꽤 많아져서 이제는 이들이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이웃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유독 이렇게 아픔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이때 나를 한번 뒤돌아 보자. 혹시 내가 연휴 동안 누군가에게 섣부른 위로를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다짐해 보자. 다음부터는 설익은 위로를 절대 하지 않기로 말이다. 그냥 <슬픔의 위로> 저자 말대로 곁에서 묵묵히 있어주고 일상적인 일들을 도와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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