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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반갑고 귀한 삶의 손님들 '그냥, 사람'

[북적북적] 반갑고 귀한 삶의 손님들 '그냥, 사람'
 
[골룸] 북적북적 278 : 반갑고 귀한 삶의 손님들 '그냥, 사람'

"선생님은 감수성이 뛰어나신 것 같아요."
조금 부끄러워진 내가 손사래를 치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비장애인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는 당사자니까…"
그녀의 말엔 조금의 비아냥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이 처연해졌다. 한동안 그 말이 내 몸 속을 돌아다니며 잊힌 기억들을 툭툭 건드리고 다녔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中)

[그냥, 사람]은 홍은전 님이 썼습니다. 평소와 달리 '홍은전 작가님'이라고 시작하지 않는 이유는 '작가'보다는 '기록자'라는 호칭을 더 좋아할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제 짐작일 뿐이긴 합니다. 직접 묻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작가'가 어딘가 '기록자'보다 '있어보이는' 호칭이죠? 적어도 저는 그런 '느낌적 느낌'을 갖고 있었다는 걸 문득 깨달았습니다. (편을 가르고, 재단하고, 순위를 매기는 버릇을 참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작가'를 글을 쓰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생각한다면, '기록자'는 그들 중에서도 얼마나 어렵고 또 무섭도록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 얼마나 서릿발처럼 외롭고 날카로운 자리인가. 기자인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기록자에게는 지레 치고 앞서 나갈 수 있는 곳도,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때로 어떤 작가들에게 허용되는 것처럼, 상징과 비유의 조금은 비겁하게 넉넉한 품 안에 숨을 수도 없습니다.

"환규를 처음 만난 것은 4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였다. 피레네 산맥의 중턱에서 탈진하기 직전의 그에게 물을 나눠준 인연으로 우리는 40일 동안 함께 걷게 되었다. 그는 충남 서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스무 살 청년이었는데, 대규모 공장의 노후화된 설비를 점검하고 교체하는 것이 그의 일이라고 했다. 그에게서는 부모의 도움 없이 자기의 삶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단단한 자부심이 흘렀다.
……….
"어제 만난 순례자가 그라뇬에서 어떤 한국 남자가 피아노 치는 걸 들었는데, 그날의 연주가 살면서 들은 제일 아름다운 음악이었대."

그것은 물론 환규 자신에 대한 이야기였고, 환규는 자신의 연주가 누군가를 감동시켰다는 사실에 몹시 감동했다.

"누나, 저 꿈이 생겼어요."

그날의 감동이 되살아난 듯 한껏 들뜬 목소리로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하기에 스물네 살은 미안하지만 좀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를 고치는 사람이 되려고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나는 당황했다.

"그 피아노, 조율이 안 돼 있었거든요. 조율 안 된 피아노가 그 정도면 조율이 잘된 피아노는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겠어요?"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피아노를 고치는 일이라니. 한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세계였다. 나는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여 목울대에 힘을 꽉 주고 냉면을 오물거렸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동시에 환해졌던 그 순간에 대해 종종 생각했다. 반으로 접혀 있던 어떤 세계가 확 펼쳐진 듯한 느낌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진짜 노동자'의 세계인가 했고, 그러면 언제나 함께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어째서 그 세계를 마흔이 되어서야 접했고, 그 만남은 어째서 이곳이 아니라 저 먼 곳 스페인에서였을까."
([엄청나게 멀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中)

홍은전은 인권활동가입니다. 노들장애인야학에 교사로 참여한 이래, 인권 뿐 아니라 동물권이 유린되는 영역까지 활동의 범위를 다양하게 넓혀왔습니다. 이 책은 그가 지난 5년 동안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것입니다. 그가 다양한 현장에서 만나고, 배우고, 가르치고, 삶을 나눈 사람들이 두루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을 책 한 권으로 간접적으로나마 한꺼번에 모두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죄스럽게 여겨질 만큼 벅찬 선물이었습니다.

"내가 야학에서 본 것들 가운데 모르던 것은 없었다. 장애인들은 듣던 대로 차별 받았고 멸시당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이는 20년 동안 한 번도 집 바깥을 나가지 못했다고 했고, 어떤 이는 언니의 결혼식에도 부모의 환갑잔치에도 초대받지 못했다고 했다. 장애인의 삶은 충격적이었지만 그 충격은 장애인의 열악한 삶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것을 온통 '문제'라고 말했던 것에서 나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자라온 세상에선 누구도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를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현실을 바꾸거나 최소한 직면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세상의 끝인 줄 알았던 거기가 최전선이었다."
([인간의 끝, 인간의 최전선] 中)

중증 장애인, 중화상 생존자, 세월호부터 고속도로 교통사고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 속 각종 사고의 희생자들과 그들과 이별한 사람들, 에이즈 감염인, 지금 있는 공원을 없애고 축구장을 짓겠다는 구청에 항의하는 동네 주민들, 용접공,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사람들…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고도 '알 것 같다'고 지레짐작하기 쉬운 그 명칭들 뒤에서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걸어 나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책에 대해서 약속드릴 수 있는 게 있습니다. 홍은전 님의 기록을 한 자 한 자 천천히 흡수하다 보면,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삶과 환경에서 살아왔는지와 관계없이 갑자기 이들 사이로 당신 자신과 당신이 사랑하고 기억하는 누군가가 문득 떠오를 것이라는 점입니다.

"상호는 다음 끼니를 언제 먹을지 알 수 없었던 기억이 몸에 새겨져 있어 자주 폭식을 했다. 또 수시로 박탈감과 무력감에 화가 나서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충동으로 이어지면 그걸 참아내느라 눈알이 시뻘게질 정도였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말하는 고통이었고, 긴 시간 일상을 공유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증언이었다. 나는 내가 했던 박상호의 인터뷰 녹취록을 읽고 또 읽었다. '시뻘게진 눈알' 같은 건 어디에도 없고, 당신은 왜 모멸을 견디지 못했느냐고, 왜 '인간답게' 죽음을 무릅쓰지 못했느냐고 다그치는 듯한 나의 질문들만 가득했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시뻘게진 눈알] 中)

저는 SBS 기자로 입사한 이래 경제부에 가장 오래 있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은 경제 관련 취재와 방송을 계속 해왔습니다. 가장 재미있다, 빠져든다고 느꼈던 때가 돈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커다란 그림들이 갑자기 잘 보일 때였어요. 돈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서 배워가는 신선한 충족감 같은 게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어떤 일을 바라보는 경우에 실은 그 코끼리의 다리나 발톱 밖에 보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는 경우가 분명히 많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선배 한 분과 나누던 중에 그 사람이 그러는 거예요. "돈의 관점에서 본 세상이 정확할 때는 많은데, 그것에 너무 빠져버리면 사람이 안 보여."라고요.

그때 정말 흔한 말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말이 내게서 희미해지고 있지 않나, 과장 조금 섞자면 지금도 매일 되새기고 있습니다.

돈의 시선에서('돈'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갈 수도 있겠죠.) 세상을 봐야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 눈에 사람이 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기자로서, 둘 중 어느 한 쪽도 존재하지 않는 척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결과물을 내는 게 아마 제가 도달해야 할 가장 어려운 레벨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점검하면서 살고 일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제가 얼마나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말해주겠지요. 그리고 그 점검이 꼭 필요한 제게는 이 책이 맑고 깊은 샘물처럼 다가왔습니다.


"돈을 모으고 있어. 시설 나온 지 10년 되는 날까지 2천만 원을 모으는 게 목표야. 그걸 야학에 줄게. 시설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나와."

꽃님 씨는 야학 제일의 자린고비였다. 가게에 걸린 옷 하나를 마음에 두고 며칠을 끙끙 앓던 그에게 그렇게 궁상스럽게 살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던 게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됐어. 언니 옷이나 사 입어요."

하지만 그가 정색하며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웃음을 거두었다.

"이거 비밀이야.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너하고 나하고 끝이야. 너한테 말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흔들릴까봐서야. 이렇게 말해두면 흔들릴 때마다 도움이 되겠지."

어느덧 5년이 흘러 무수히 흔들렸을 그가 굳건한 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꽃님 씨가 말했다.

"그 돈, 지금 이 방에 숨겨져 있어. 내가 매달 수급비 50만 원에서 20만 원씩을 빼서 현금으로 모았거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조선시대야? 왜 돈을 집에다 보관해요!"

꽃님 씨가 항변했다.

"통장에 넣으면 재산으로 잡혀서 수급권 탈락해."

나는 또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났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운 중증장애인이었고 누워서 생활했다. 활동지원사 없이 혼자 남겨진 밤이면 옆집에서 다투는 소리만 들려도 저러다 불이라도 지를까 걱정돼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꽃님 씨가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현금 2천만 원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외친 것이다.

"불이 나면 어쩌려고요! 도둑이 들면 어쩌려고요!"
([꽃님 씨의 복수] 中)

'인권활동가가 쓴 책'이라고 권했을 때 '읽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무거워지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 비슷한 생각이 먼저 들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이 문제의 단면이지 전부는 아닌데.' 의견의 차이를 발견하는 대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참여하고 주장해 온 활동들에 동의하는 사람이든, 부분적 견해차를 가진 사람이든, 아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든 이 책을 모두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홍은전의 운동들에 제.대.로. 동의하지 않거나 따라서 협의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책 한 권으로 소개해주는 이 사람들을 모두 만나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 가는 버스를 예매하려고 고속버스운송조합 홈페이지에 접속했을 때였다. 팝업창에 '휠체어 장애인 이용 안내문'이 저절로 열리기에 읽어 내려갔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이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당당하게 '공지'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내 생각이 틀렸다. 버스회사들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단어 하나까지 애써 고른 흔적이 역력했다. 모욕감 같은 것이 훅 끼쳐왔다.

그 순간 바로 옆에 걸린 또 다른 안내문이 눈에 들어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버스를 경험하세요. 첨단 안전장치 설치, 독립 공간 제공, 전좌석 개별 모니터, 영화, 드라마 등 제공.' "
([당신처럼] 중)

일본 도쿄에 20년 전 처음 가보았을 때, '아 여기는 분명히 우리보다 선진국이구나' 하루 만에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보다는 그 도시의 풍경이 우리 서울과 비슷하게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그 하루 동안에도 복잡한 도심 속에서, 고급 호텔에서, 여러 장애인과 휠체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아픈 아이가 있는 제 친구가 서울에서도 인기있는 지역의 초등학교에 아이의 입학을 신청했습니다. "처음이라 저희도 모르는 게 많지만, 같이 해나가보자."는 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문득 20년 전 첫 도쿄 방문이 생각났습니다. 여전히 도심에서 장애인이 인구비율 대비 비슷하게라도 보이는 사회는 아니지만, 그래도 20년의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았고 이 변화는 거저 다가온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문을 열어준 꽃님들과 홍은전들, '그냥, 사람'들을 만나는 영광이 이 책 속에 있습니다. 이번주에도 [북적북적] 함께 해주셔서 기쁩니다.

*'봄날의 책'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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