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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곰팡이 기숙사에 밀어 넣곤 "가족처럼 대했다"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가족처럼 대했고, 가족처럼 보살폈다."

지적장애인 수십 명이 신안군의 한 섬에서 10년 넘게 노동력을 착취당한 2014년 신안군 염전노예사건. 이 사건의 가해 염주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한 이 말은, 이후에도 도돌이표처럼 되풀이 됐다. 중세 노예제를 방불케 하는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것에 한 번, 그 이후에도 장애인 노동력 착취 사건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라지만, 가해자들 항변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는 것에 가장 크게 놀라게 된다. '내가 이 세상 떠나고 내 자녀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게 성인 발달장애인을 둔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이 라는 걸 생각해보면, 가해자들의 '가족' 운운하는 항변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인 학대 가해자만 비난할 일일까. 가족이 역할을 못할 때, 가족 대신 그 역할을 해야 할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도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014년, 지적장애인들이 노예처럼 부려지던 곳을 관할하던 파출소 경찰공무원, 노동청 근로감독관, 지자체 사회복지공무원이 학대사실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눈 감았다는 것이 이듬해 염전노예사건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서 확인됐다. 영화나 소설 속이 아닌, 현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피해 회복과정은 또 어떤가? 잃어버린 세월을 되돌려 줄 수는 없더라도 그 착취당한 기간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가해자로부터 받아내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 아니겠는가. 그러나 노동력을 20년 착취했든, 30년 착취했든, 10년분 임금만 반환하겠다는 가해자의 '소멸시효'항변을 법원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장애인들이 이런 법원의 비상식적인 판결을 막아달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헌법재판소 역시 작년 12월 23일 '입법적으로 해결할 문제'라며 국회로 책임을 떠넘겼다. 이를 받아든 국회에서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두 차례 발의됐지만 상임위 문턱조차 넘지 못한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입법, 행정, 사법 등 삼권을 담당하는 국가부처 및 헌법재판소까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해자들이 내뱉는 이 말은 우리 모두를 조롱하는 듯하다.

"가족처럼 대했고, 가족처럼 보살폈다"

지난 해, 이 말을 또 들었다. 장애인학대사건은 아니었다. 이번엔 이주노동자였다. '이주노동자 기숙사 산재사망사건'. 작년 12월 20일 포천에 있는 농장 기숙사에서 사망한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헹 씨를 고용했던 농장주는 지난 12일, 류호정 국회의원이 사건이 있었던 기숙사를 방문하자, "언론에 보도된 것과 달리 자신은 이주노동자들을 가족처럼 대했고, 가족처럼 보살폈다"며 억울해했다.

최정규 인잇
기숙사 내부. 곰팡이와 결로로 뒤덮여 있는 모습.
최정규 인잇
열악한 기숙사 내부 모습. (2021년 1월 12일 촬영)

이미 속헹 씨 사망 이후 고용노동부 의정부지청이 진행한 현장조사를 통해 해당 기숙사가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기숙사 관련 조항을 위반했다는 점이 확인됐다. 계속되는 한파에 전기공급장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난방이 되지 않았다는 동료 이주노동자들의 증언도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실제 현장에 찾아가 두 눈으로 확인한 기숙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열악했다. 이주노동자 5명 월급에서 각각 월 13만원씩을 공제하고 제공한 기숙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기숙사 안은 곰팡이와 결로로 뒤덮여 있었고, 시멘트 바닥 화장실에는 세면 도구가 변기 옆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농장주가 억울하다며 "가족처럼 대했고, 가족처럼 보살폈다"고 항변하자, 류호정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가족이라면 이런 데 살게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농장주만 비난할 일이 아니다. 열악한 농촌현실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 인력 고용을 허가하면서 농장주가 유상으로 비닐하우스 기숙사를 제공해도 되도록 허용한 것은 바로 정부였다. '가족같이 대했다'는 농장주에 일갈한 류호정 의원을 포함한 21대 국회의원 3백 명 역시, 속헹 씨가 숨지기 전 비닐하우스 기숙사를 개선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속헹 씨가 숨지자 정부가 나서기는 했다. 고용노동부는 속헹 씨 사망 후 지난 1월 6일, 비닐하우스 내 가설건축물을 기숙사로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비닐하우스 '밖' 가설건축물에 대해서는 현장조사를 통해 기숙사 허용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했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건축법령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가 이주노동자 기숙사 등의 주거용도로 가설건축물을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고용노동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고영인 의원실 제공. 국토교통부 건축정책과 2021년 1월 12일자 답변.

기숙사는 다중이용시설로 건축법상 요건을 갖춰야 허가받을 수 있다. 기숙사로 쓰이는 건물이 최소한 주거시설로 허가 받은 건축물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입국한 이주노동자 20만 명의 기숙사는 속헹 씨 죽음 이후에도 건축법에 의해서가 아닌 고용노동부 공무원들의 현장점검에만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피해 이주노동자의 고용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가족처럼 대했고, 가족처럼 보살폈다"

인잇 네임카드 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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