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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책임 회피, 그 얄팍한 생존의 기술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인-잇] 책임 회피, 그 얄팍한 생존의 기술
A지점 현장의 시업이 1시간이나 늦어졌음에도 아직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연락을 문자로 받았다. 급히 해당 지점장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확인했다.

"무슨 일이죠?"

"아, 협력업체 직원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업체 능력이 너무 떨어져 문제입니다."

"지점장이 직접 업체 선정한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제안 때와는 달리 너무 못하네요. (답답하다는 듯이) 아주 미치겠습니다."

"답답한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뽑고 왜 그 업체를 탓하나요. 잘못 선정한 우리 책임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두말하지는 맙시다. 아무튼 우리가 보는 안목이 떨어져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속상한 마음에 이번엔 협력업체 사장에게 전화했다.

"시업이 1시간 이상 늦게 된 거 아세요?"

"예, 압니다. (자기는 상관없다는 듯이) 그 직원 어제 잔무가 너무 많아 늦게 들어가서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잤다고 하네요."

"그 직원이 사장님 직원 아니던가요? 그런데 왜 남의 일 말하듯이 말씀하시는지요."

"아니 그게 아니라…"

"두말하지는 맙시다. 어쨌든 사장님이 직원 관리를 잘못한 것이잖아요."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속상한데 지점장과 협력업체 사장의 책임 회피하는 듯한 대답이 더 실망스러웠다.

'아주 큰 일도 아닌데 그냥 책임을 인정하면 누가 뭐라고 하나?
자꾸 듣기 싫은 변명만 하려고 하니 답답하네…'

최근 본 기사가 떠올랐다.

 

늑장 제설 욕 먹자 '예보 탓' 돌린 서울시…기상청 '발끈'

폭설로 인해 이틀에 걸쳐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서울시의 늑장 대응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는데도 서울시 관계자들은 "기상청 예보가 틀려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반응을 내놨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저절로 맑아진다. 어느 나라 어느 조직에서든 아랫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윗사람인만큼, 윗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해야 아랫사람도 바르게 행동하고 윗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아랫사람도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천만 시민의 책임자들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저렇게 납득하기 힘든 책임회피성 발언을 하는데 우리 같은 범인들이 이 행태를 본받아 "내 탓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윗사람만 탓할 수는 없다. 사람은 원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또 현실적으로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 (상황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보통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을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든 간에 일단 내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나에 대한 처분 권한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욕을 먹든, 징계를 당하든, 보직에서 잘리든, 최악의 경우 옷을 벗든 어떤 처벌이 주어져도 일단 받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니까. 다행히 그냥 간단한 잔소리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으나 어쨌든 아예 처벌이 면책될 가능성은 없다는 점에서 책임 회피보다 나한테 더 유리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면책 될 가능성이 있을까? 회사 일이란 여러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이루어지니 사실 마음만 먹으면 나 아닌 다른 톱니바퀴의 흠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런 이유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듯이 일단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살 길을 찾으면 찾아지게 마련이다.

현실이 이렇다면 우리는 책임 회피하는 사람을 무턱대고 손가락질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되겠다. 어쩌면 이것도 생존 기술의 하나. 그렇다. 선량하고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만이 있는 곳이 아닌 회사라는 정글에서는 섣부른 책임 인정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독박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독박을 면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기 십상이다. 마치 초보운전자가 다른 운전자를 배려해서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차에 붙였다가 미운오리새끼처럼 따돌림 당하거나 놀림감이 되어 도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듯이 말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실은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반드시 가려진다는 점이다. 책임 회피 잘 하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라면 '진실은 언제가 밝혀 진다'는 원칙, 이것은 변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다(노자도 말했다. 하늘의 그물은 듬성듬성해도 새어 나가는 법이 없다고). 진실이 밝혀지면 생존의 기술은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어진다. 잔재주로 그 당시 면책 받은 책임 회피자는 결국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조건 책임 회피하는 것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생존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 정말 억울하고 자신에게 치명적이 될 만한 것은 다툼을 해 보더라도 일상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잘못들, 자신의 착오 혹은 실수로 발생된 문제들, 누가 봐도 명백한 자기 잘못을 멋지게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세상 이치와 부합되는 그 기술 말이다.

 
인잇 필진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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