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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동지가 된 '돈 버는 기계', 메가폰 잡아든 이유

"우리들의 욕망을 인정하라" - 알 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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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상식의 열기가 대성당을 채우기엔 성당이 너무 크고 높았다.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 본 듯한 연예인들의 공연과 명사들의 축하 인사가 1시간 넘게 이어졌지만 성당 안의 썰렁한 공기는 좀처럼 달궈지지 않았다. 겨울 초입을 맞은 대성당은 바깥이 안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11월 14일 제1회 미누상 수상식이 열린 서울시청 맞은 편 성공회 대성당에는 50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로 거리를 두고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알 마문 감독은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이지만 특별히 옷을 갖춰 입지 않은 듯 점퍼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보다 하루 전날 대한민국 정부는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50년 전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사람들을 온몸으로 대변했던 한 청년에 대한 뒤늦은 예우였고 거의 모든 언론은 그때의 외면을 반성이라도 하겠다는 듯 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다음 날 열린 미누상 시상식에 관심을 보인 언론은 거의 없었다. 정부 인사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그 흔한 축하 화환 하나 보내지 않았다. 이 땅에서 가장 외면 받는 사람들의 잔치다웠다.

한국 이주노동자운동의 상징인 '미누상' 첫 번째 수상자임에도 마문의 표정은 기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시상식의 맨 마지막 순서에 알 마문 감독이 무대에 올랐다. 그의 수상 소감은 다소 밋밋했다. 한글을 잘 못 쓰는 자신의 대본 작업을 도와주는 동료들이 고맙고, 뜻 깊은 상을 받아 기쁘고, 앞으로도 이주민 노동자들을 더 열심히 도와서 그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채 3분이 되지 않는 그의 수상 소감은 그의 사연 많은 한국 생활 22년을 담기엔 너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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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상은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과 문화예술운동에 헌신하다 강제추방된 뒤 숨진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미누 씨를 기리기 위해 올해 만들어진 상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국내 인권단체들과 이주민단체가 힘을 합해 주는 상이다. 이 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큰 영광일 텐데 마문의 표정은 꼭 기뻐 보이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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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쉑 알 마문(Shekh al mamun)은 브로커에게 나름 거금을 주고 한국행 티켓을 구했다. 관광비자로 들어왔지만 한가하게 관광을 다닐 처지는 아니었다. 사촌 형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경기도 마석 가구단지에 노동자로 취업하는 것으로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비자가 만료된 석 달 후 불법 체류 노동자가 되었다. 가구공장 직원, 이주민 노동운동가, 가구공장 공장장, 독립영화 감독, 칼럼니스트, 문화 행사 기획자가 그가 한국에서 거친 직업이다. 지금 그의 직함은 민주노총 산하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 이주민 문화예술단체 <아시아 미디어 컬처 팩토리> 기획국장이다. 요즘은 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2004년 한국 여성과 결혼했고 2009년에는 한국 국적을 얻었다.

2. 스물두 살에 한국에 왔다. 방글라데시에서 대학을 한 학기 동안 다녔지만 거기에서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싶지는 않았다. 많은 형들과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외에 나가고 싶었다. 나라가 가난하니 자신의 삶도 가난할 것이 뻔해 보였고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은 나라에서 돈을 벌고 싶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은 없었다. 아시아에 있는 나라니 막연히 유럽에 비하면 조금 적응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이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촌 형이 먼저 한국에 가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긴 했는데 무엇보다 하루라도 빨리 방글라데시를 벗어나고 싶었어요. 유럽에 갈 수도 있었지만 유럽에 가기 위해서는 반년 정도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한국 비자는 일주일이면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한국행을 선택했어요"

처음 받은 월급이 70만 원, 방글라데시 노동자 급여의 10배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액수였다. 1998년 당시는 고용허가제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노동 3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지였다. 툭하면 매 맞고 돈 떼이고 쌍욕 듣던 시절이었지만 마문은 그 시절을 특별히 어려웠던 시절로 기억하지는 않았다. 공장 밖으로 나서면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있었고 늘 강제추방의 공포에 시달렸지만 공장 안에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인정이 있었다. 한국 동료들은 그가 핸드폰을 장만할 때 기꺼이 이름을 빌려주었다. 가끔 동료들과 회식이 있긴 했지만 그는 회사와 기숙사를 오가며 2년을 보냈다. 쉴 때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며 한국말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꿈이 여행가라고 했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처해있는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절박함을 잊은 듯싶은데 한때 그에게 가장 큰 목표는 가난한 고국을 떠나는 것이었다. 방글라데시를 떠나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원단 가게를 했을 테고 그것이 아마도 그가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퇴직금 지급을 미루던 업체 사장은 노조를 찾아간 지 하루 만에 퇴직금 270만 원을 내놨다. 노동조합의 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3. 2001년 밀린 퇴직금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마석에 있는 이주민 노조를 찾은 것이 이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퇴직금 지급을 미루던 업체 사장은 노조를 찾아간 지 하루 만에 퇴직금 270만 원을 내놨다. 노동조합의 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밀린 퇴직금을 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인권운동가들을 만났다. 돈 버는 기계, 피부색 다른 2등 인간 취급을 받던 알 마문을 이 사람들은 '마문 동지'라고 불렀다. 마석에서 활동하던 인권운동가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마문은 새로운 세상에 눈 뜨게 된다.

"제가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공장과 기숙사에만 있었다면 이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은 저를 '사람'으로 봐주고 진심으로 제 걱정을 해주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너무 행복했습니다."

당시 마석 가구단지에는 수백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었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이주민 노조운동이 활발했다.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이 이주민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 때 방글라데시 출신 불법 체류 노동자를 ' 동지'라고 불러주던 사람 중에 서선영도 있었다.

"당시 마석 이주민 노조가 당국의 집중적인 단속으로 위기였는데 마문 씨가 조합 일에 적극 나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문 씨는 의협심이 강하고 뚝심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주민 노조를 어떻게 꾸릴 것이냐를 두고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저희들은 이주민 노동자들이 지원을 받는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조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지라는 호칭은 당연한 것이지요." <서선영 충북대 사회학과교수, 당시 마석 외국인 노동자 지원 활동가>

당국에 적발되면 곧바로 강제추방될 불법 체류자 신분이었지만 마문은 이주민 노조운동의 선봉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노동자로서 누려야 될 당연한 권리를 알게 됐고 국적이나 피부는 물론 체류허가 유무와 무관하게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문을 돕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그에게 운동의 주체로 설 것을 요구하는 한국인 활동가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문에게 이런 천지개벽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조활동가 마문의 투쟁은 2003년 말부터 380일 넘게 진행된 외국인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졌다.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외국인 고용허가제 실시와 함께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강제추방 중단을 요구하는 싸움이었다. 그는 이 농성 투쟁의 조직국장이었다. 마문과 그 친구들의 싸움은 치열했지만 승리의 전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강제 추방 위협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숨진 외국인 노동자가 10명이나 되었고 마문이 농성 막바지에 20일 동안 단식 투쟁까지 벌였지만 한국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명동성당 장기 농성 투쟁은 이주민 인권운동에서 한 획을 긋는 일이었지만 승리를 얻지는 못했다. 마문은 이때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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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활 중 이 때가 가장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투쟁의 대열에서 동지들이 떠나는 것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웠고 마음 속으로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일하지 못하니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내가 방글라데시에 있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 같아 한국에 온 것을 수도 없이 후회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는 싸움은 없는 법이다. 그는 이기지 못했고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명동 농성 투쟁을 통해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그는 여기에서 부인 한준경을 만났다. 한준경은 서울대학교를 2년 만에 자퇴하고 2001년 덕성여대에 입학했다. 학력 차별 사회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한준경이 서울대를 그만 뒀다는 말도 있다. 마문은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다니던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학교를 바꾼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가에서 학생운동이 쇠퇴하고 있었지만 한준경은 열성적인 운동권 학생이었다. 학생들은 연대 투쟁 차원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명동 투쟁을 지원했고 그 가운데 한준경이 있었다. 마문은 학생들이 왜 자신들을 돕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마문과 한준경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명동성당 농성 투쟁…. 마문은 거기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한편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왜 학생들이 우리들을 돕습니까? 혹시 돈 받고 우리들을 돕는 것 아닙니까.

"마문 동지가 이주민 노동자이기 때문에 차별받는다면 저는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받을 수 있습니다. 차별이 차별을 불러오는 이런 환경을 바꾸지 못하면 제 삶도 힘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동지들과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가슴에 남다른 존재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농성 투쟁 중에 선크림을 사기 위해 한준경과 함께 명동에 나갔던 마문은 출입국 단속반원에게 체포될 위기에 빠졌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했다.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본 한준경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는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한준경이 먼저 마문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마문은 한준경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결혼하자고 했지만 한준경은 일단 혼인 신고부터 하자고 했다. 멀쩡한 여대생이 체류 허가도 없는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 청년과 결혼한다고 할 때 이를 허락할 부모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한준경은 본인의 고집을 꺾지 않았고 2004년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하고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결혼을 계기로 마문은 불법 체류자 신분에서 벗어났고 2009년 한국 국적을 얻었다. 마문-한준경 커플은 2015년 결혼식을 올렸다. 아이는 갖지 않기로 부부가 합의했다. 자신을 '마 서방'이라 부르는 장모님은 결혼식 전에 몇 번 봤지만 장인 어른은 결혼식 직전인 2014년에야 만났다고 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부천에 작은 아파트를 구입했다. 마문은 '은행님'이 많이 도와주셨다고 했다. 지금은 중앙부처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한준경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한준경은 인터뷰를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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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명동성당 장기 농성 투쟁을 마치고 마문은 다시 마석 가구단지 노동자로 돌아갔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장만희라는 사람이다. 마석 가구공장 하청업자였던 장만희는 마문에게 기술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의 인정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줬다. 마문에게 장만희는 형 같은 사람이었다. 장만희는 자기 공장을 차려 독립한 뒤에 마문을 불렀다. 직원 예닐곱 명쯤 되는 이 작은 가구 공장에서 마문은 공장장 역할을 했다. 장만희는 이 공장을 나중에 마문 너에게 넘기겠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마문을 믿고 응원했다. 당시 마문 월급은 260~270만원, 비슷한 경력의 한국인 직원보다 더 받았다. 장만희와 함께 일했던 2004년부터 2012년은 마문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시기였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평범한 가장의 소소한 기쁨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한준경과 결혼을 통해 강제 추방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2009년에는 한국 국적을 얻었으니 법적으로도 안정되었다. 대신 노조 활동과는 잠시 거리를 두던 시절이었다. 고생하는 이주민 노동자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마석으로 돌아간 뒤 한편으로 마음에 부담이 있었어요. 결혼하고 나만 잘 살겠다고 이러는 것은 아닌가 싶었어요. 그 때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대단하다고, 그런 마음이 있으면 언젠가는 투쟁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마문은 마석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공장을 갖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한준경은 생각이 달랐다. 다소 늦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한준경은 2012년 최종 합격을 목전에 두고 마문에게 가구공장을 그만 둘 것을 요구했다. 당신이 일하는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내가 잘 아는데 더 이상 당신이 그런 데서 일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언제 다칠지 몰라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무원이 되면 집안 살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이제 당신은 다른 일을 하라고 했다. 마문의 머릿속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 두는 일도 아까웠고 무엇보다 장만희와의 의리를 생각하면 공장을 그만 두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준경은 완강했다. 만약 당신이 공장을 그만 두지 못하겠다면 헤어지자는 말까지 나왔다. 마문은 부인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지 못했다. 2012년 말 마문은 장만희에게 전화를 걸어 공장을 그만 두겠다고 했다. 마문은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전화기를 사흘 동안 꺼버렸다.

"지금도 그분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고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찾아가 사과를 했지만 늘 마음에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만희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 동안 자신이 마문을 동생 같이 대한 것을 생각하면 배신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마지막까지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퇴직금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 마문이 몇 달 간이나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문에게 장만희 연락처를 물었더니 연락이 끊긴 지 몇 년 됐다고 했다.

영화를 접한 적이 거의 없던 마문은 김은석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라는 신세계에 들어섰다.

5. 가정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니던 직장을 때려 치우긴 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할 때 만난 사람이 다큐멘타리 영화감독 김은석이다. 영화 <집으로> 조감독 출신인 김은석은 이주민들의 인권 문제, 특히 이주민들의 문화예술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주민들이 자체적인 문화 콘텐츠 제작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주민 영화감독 육성 프로젝트에 관여했고 이 과정에서 마문을 만났다. 그 때까지 영화를 접한 적이 거의 없던 마문은 김은석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라는 신세계에 들어섰다. 그리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거의 매일 김은석을 만났고 그에게 영화에 대해 물었고 그와 영화에 대해 토론했다. 영화 이야기로 밤을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문 감독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아주 강렬한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김은석 다큐멘타리 영화감독

김은석은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알려주기보다 마문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이끌었다. 김은석은 구체적인 영화 제작기법보다는 영화에 무엇을 담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쪽이었고 이주민의 눈으로 이주민 노동자의 삶을 바라볼 것을 마문에게 요구했다. 2013년 김은석 감독의 도움을 받아 첫 작품 <파키>를 만든 것을 시작으로 마문은 지금까지 모두 1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2013년 그가 첫 작품을 찍었으니 1년에 적어도 한두 편은 만든 셈이다. 양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매년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마문 감독 작품은 사회고발적이고 저널리즘적인 성격을 갖고 있고요. 뭘 찍을지 고민하기보다는 본인이 당사자이기 때문에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찍어 그것을 작품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감독과 영화가 한 세트로 가는 것이 장점입니다. 영상 자체가 아름답거나 특이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이야기를 성실히 하는 감독입니다." / 김은석 다큐멘타리 영화감독

마문은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집요하게 한국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비닐 하우스, 컨테이너 같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왜 외면하느냐고 따진다. 이주노동자들을 일정 기간 쓰다가 버리는 돈 버는 기계로 취급하는 현실을 카메라에 담고, 이주 노동자들은 시키는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당신들과 똑 같은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고 강조한다. 당신들이 꺼리는 위험하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 사회의 한 귀퉁이를 내주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이 왜 이리 인색하냐고 묻는다.

"제가 카메라를 잡으면 제가 그분들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이주민 노동자들이 진솔하게 표현을 합니다. 영화제 관객들이 감독님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됐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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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문은 현재 일본군 종군위안부와 방글라데시 전쟁 피해 여성들을 한 화면에 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주노동자에 집중하던 그로서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셈이다. 이주노동자 출신 감독이라는 희귀성 때문에 주목받은 측면이 강했다면 이제부터는 작품 자체로 승부를 보겠다는 의욕을 그는 숨기지 않았다.

국적이 한국으로 바뀌고 직업이 육체노동자에서 문화예술인으로 바뀌면서 이 사람은 새로운 현실을 보는 모양이다. 그는 이제라도 대학에 가서 영화를 공부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학연을 바탕으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한국 문화를 실감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떤 영화는 영화제에 나올 만한 작품이 못 되는데 어디 출신이라는 이유로, 누구의 후배라는 이유로 출품되고 상을 받는 것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연줄이 없으면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는데 자신은 그런 연줄이 없다고 말할 때 그에게서 경계인의 쓸쓸함 같은 것이 보였다.

네 시간 넘게 그와 대화하면서 이 사람만큼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자가 섞인 개념어만이 아니라 한국어 속담과 농담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혹시 다른 사람과의 대화 중에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

"방송 토론프로그램을 보다가 아주 가끔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우리 아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겁니다."

말을 이렇게 잘 하는 사람도 한글로 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 마문은 2018년 한겨레신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칼럼을 연재할 때 한국인 동료들과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쓴 거라면 본인이 쓴 거라고 보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칼럼의 내용이나 전체적인 구성은 물론 단어 하나 고치는 것도 자신이 일일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영화 대본 작업을 할 때는 동료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돈이 거의 하느님 수준의 대접을 받는 한국에서 22년 동안 살아온 사람이다. 돈 때문에 물 설고 낯 설은 나라에 온 사람 아닌가. 월급, 활동비, 임대료, 보증금, 아파트 구입비용, 영화 제작비용 등등 돈과 관련된 내용을 물어볼 때마다 그는 분명한 숫자를 들어 대답을 했다. 그는 많은 돈에 대한 부러움을 말하지도 않았고 돈이 없어 무엇을 하지 못한다는 좌절감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집안 살림은 부인의 월급으로 감당하고 그는 자신의 수입으로 활동비 정도를 충당하는 듯싶었다. 그의 고정 수입은 이주민 노조 간부로서 받는 몇십만 원의 활동비가 거의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는 돈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유창한 한국 말에는 서선영의 논리, 김은석의 주장, 한준경의 감성이 섞여 있었다. 마문의 한국인 친구들이 뭐라고 했을지 이 사람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이주민 노동자 권리 문제 같은 것은 완벽하게 자신의 논리로 말하지만 어떤 부분은 한국인 활동가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고 있는 듯도 했다. 한국 인권운동가들의 그림자가 이 사람에게 진하게 드리워진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일일 텐데 가끔 이 사람의 말은 장황하고 난삽했다. 그의 신문 칼럼 몇 편이 그런 느낌을 준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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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루에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이 적어도 너댓 명은 된다고 했다. 대부분은 그저 특별한 용건 없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걸어오지만 가끔 급히 도움을 청하는 전화도 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한국말이 서툰 한 후배가 나이키 매장이라며 전화를 걸어왔어요. 점퍼를 살려고 하는데 점원이 옷을 안 팔고 자꾸 나가라고 한다는 거예요. 점원을 바꿔 달라고 해서 사정을 들어보니 점원 말이 점퍼가 15만원이 넘는데 이 방글라데시인이 가격을 잘 모르고 살려고 하는 것 같아 그랬다는 겁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이 뭘 이렇게 비싼 옷을 입으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한국 사람들은 이주노동자들은 그런 옷 입으면 안 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런 게 차별이고 편견 아닌가요? 저희들도 좋은 옷 입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버는 거거든요."

6~7년 전 80만 원 안팎이던 이주 노동자 평균 월급이 요즘은 190만원 정도라고 했다. 그가 말한 숫자가 정확한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최저임금 인상 덕을 이주노동자들도 보는 것은 맞는 듯싶다. 마문은 임금이 오른 만큼 이주노동자들의 생활 수준과 패턴도 크게 달라졌는데 한국 사회는 여전히 돈 줄 테니 일만 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마문은 더 좋은 삶, 더 많은 기회를 원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욕망을 한국 사회가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돈 더 줄 테니 토요일에 일하라고 하는데 이주노동자들도 주말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거든요. 예전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전혀 없었는데 이제 조금씩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주노동자들도 아주 많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인간의 욕망이란 마치 물 같은 것이어서 어딘가 작은 틈이 있으면 그 틈을 파고 들고 한 방울 한 방울 욕망이 모이면 구멍을 내고 물길을 만들고 언젠가는 둑을 넘어선다. 때로는 그 둑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래서 마문의 이 말은 감사의 말이 아니라 경고로 들렸다.

"이주노동자들 열 명 중 아홉 명은 한국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는데 사장님이 나를 선택해줘서 한국에서 일할 수 있으니 고맙다고 생각하지요. 이런 마음이 있으니 거리에 나서 목소리 내는 사람이 없고, 차별을 받아도 내가 잘못해서 그런가 생각하고, 착취당하고 힘들어도 이 정도는 참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피부색으로 나누고 국적으로 가르면 지금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미국이나 유럽처럼 (이주민들이) 폭발할 수 있어요."

최저임금 상승으로 가장 덕을 본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이라며 지금 실시 중인 고용허가제가 일본이나 타이완에 비해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사업장 이동 자유가 보장되면 한 푼이라도 더 주는 일자리를 찾아 이주노동자들이 옮겨 다닐 거라는 우려도 없지 않고 이럴 경우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애쓴 고용주들의 피해가 커질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왜 대한민국 법률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외국인을 위해 만들어지고 유지돼야 하느냐는 물음에 답하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마문에게 물었다.

-한국 사회가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아진 것은 없습니까?

"좋아진 것이 왜 없겠습니까. 2004년 고용허가제 실시로 노동 3권이 보장되는 등 분명히 좋아진 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가 2004년에 비해 16년 동안 엄청난 발전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한국 사회가 발전한 만큼 이주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 역시 나아졌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마문은 여기가 한국 땅이니 한국 정부가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먼저 챙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여전히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소규모 작업장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노예처럼 한 직장에 묶여 있어야 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7. 남양주 외국인복지센터장을 맡고 있는 대한성공회 이영 신부는 2003년 이후 마석을 중심으로 마문과 행동 반경이 겹치는 사람이다. 미누상 제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50년 전 전태일과 공순이, 공돌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이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짐짓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012년과 2016년 문재인 캠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그에게 정권에 따라 이주노동자 정책에 차이가 있는지 물었다.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진보, 보수할 것 없이 어느 정부도 관심이 없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노동력 활용 차원에서만 바라볼 뿐 이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는 전혀, 전혀 백지 상탭니다."

정부가 말하는 다문화 사회는 외국인 이주자들이 K-POP을 한국 사람처럼 부르는 것을 의미할 뿐 외국인 이주자들이 그들의 문화를 한국 땅에서 누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이주노동자 문제에서 한국은 좌우를 막론하고 편협하기 그지 없다고 그는 일갈했다.

이주민 노동자는 존재하되 보이지 않는 존재, 필요하되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차별과 멸시의 시선을 견뎌야 하고 심지어는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내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민주노총 산하에 이주민 노조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주민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관심이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관심보다 클 수야 없다. 투표권이 없으니 이들의 정치적 이익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정당도 없다. 그런 점에서 이주민 노동자들은 이 땅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다.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지는 일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마치 50년 전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의 목소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들이 계속 침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최근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펴냈다. 여기에 실린 시 한 편의 일부를 옮겨 적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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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을 진 수평선에
산처럼 쪼그리고 앉은
늙은 부모님을 버리고 온 사람이에요.
사장님! 나는
출산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내 아내를 버리고
자신의 심장을 쪼개서 온 사람이에요
삶이 이토록 어려운 시기가 도래해서
이제는 당신 기계의 족쇄를 차고
슈퍼 기계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어요
그럼에도
땀을 흘린 대가로
왜 무시를 당해야 하나요?
내 자존심에
왜 상처를 받아야 하나요?
사장님!
이제 내 땀을 무시하지 마세요
이제 내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마세요
왜냐하면 나도 그렇잖아요
이 지구상에서
당신처럼 감각을 가진 사람이잖아요

- 니르거라즈 라이 作 <슈퍼 기계의 한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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