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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당신의 컬러는 무엇입니까?

Max | 뭐라도 써야지. 방송사 짬밥 좀 먹은 저널리스트, 프로듀서.

[인-잇] 당신의 컬러는 무엇입니까?
눈을 뜬 채로 세 줄기의 희미한 빛을 계속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눈이 부셨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어요. 세 줄기 빛은 자동차 유리창에서 빗물에 어려 일렁이는 조명처럼 번지거나 일그러지기도 하고,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번쩍거리기도 했지요. 잠깐 동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시간 속에 있기도 했습니다. 마치 우주 공간에 와있는 것처럼 당황스러웠지만 꼼짝할 수는 없었어요. 다행히 눈에 마취약을 넣은 덕에 물리적 통증은 크지 않았습니다. (정신적 통각을 물리적 통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말이예요.)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았던 시술과 수술 가운데 가장 특이한 체험이었어요. 굳이 비교하자면 건강검진 때 받는 위내시경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어오지 말아야 할 무엇인가가 내 몸속에 '침습' 또는 '틈입'하여 무엇인가를 하는데 속수무책으로 버텨내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에요. (저는 수면내시경 대신 맨정신으로 검사를 받아요.)

솜씨 좋은 안과 의사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수술은 잘 된 것 같습니다. 먼저 오른쪽 눈을 수술하고 일주일 뒤 경과를 보고 왼쪽 눈을 마저 수술했지요. 그런데 그 중간의 일주일이 고역이었습니다. 고도근시인 탓에 양쪽 눈의 시력 차이가 심해져서 사물이 제대로 안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어질어질해서 뭘 도통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거지요. 그 와중에 저는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수술한 오른쪽 눈은 그런대로 잘 보이고 아직 수술 전인 왼쪽 눈은 잘 안 보이니까 자주 한쪽 눈을 번갈아 감고 다른 쪽 눈은 어떻게 보이는지 비교를 하게 됐죠. 그런데 수술한 오른쪽 눈과 수술하지 않은 왼쪽 눈으로 본 세상은 때깔이 달랐습니다! 수술해서 인공수정체를 집어넣은 오른쪽 눈으로 본 세상은 화이트밸런스(White Balance)가 잘 맞아 제 색깔을 낸 세상이었던 반면 수술 안한 자연 상태의 왼쪽 눈으로 본 세상은 마치 노란 선글라스를 끼고 본 세상 같았습니다. 블루스크린 차단 필터를 작동한 것처럼요. 왼쪽 눈은 백내장 증상을 느끼지 못한 정상안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수술 안 한) 왼쪽 눈과 (수술한) 오른쪽 눈으로 본 세상. 때깔이 달랐다.

의사 선생님은 40대가 넘으면 백내장 증상이 나타나지 않은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제 색깔과 눈으로 보는 색깔이 달리 보일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아마도 수정체의 색깔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으면 변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동안 가끔 젊은 디자이너들 또는 영상 편집자들과 그래픽의 컬러나 영상 콘텐츠의 색보정을 놓고 의견을 나누다 이견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때로는 같은 색을 놓고도 서로 다르게 느꼈습니다.

"이 빨강은 너무 정직한 빨강이지 않나?"
"컬러 자체는 괜찮은데 노란기를 좀 더 빼보면 어떨까?"
"좀 더 터키블루 쪽의 파란색이면 좋겠는데"

순수한 컬러 자체야(컬러파레트상의 좌표값) 변하지 않겠지만 색감이란 건 개인의 경험치에 바탕한 주관적인 것일 수 있이니 서로 색깔에 대한 느낌 차이가 있어도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백내장 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실제 객관적인 컬러를 사람마다, 또는 나이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놀라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었던 수정체를 인공수정체로 바꿔 넣게 되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물질성에 대해서도 절감했고요. 종종 백내장 수술받은 노인 중에는 자신이 평소 보던 색깔과 너무나 다른 물체와 세상의 색깔에 놀라 뭔가 잘못된 건 아니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백내장이 심했던 경우 일상생활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수술 전후 색깔이 다른 경우도 있다네요.

언론이나 일상생활에서 눈과 관련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지요. '근시안적인 대책', '색안경을 끼고 본다' 같은 말들이지요. (아주 오래 전부터 근시였던 사람으로서 이제 보니 이런 표현이 차별적으로 느껴진다면 프로불편러적인 발상일까요?)

알고 보니 우리는 모두 색안경을 끼고 삽니다. 노화하면 백내장이 오지 않았더라도 수정체에 변화가 생겨 어떤 물체가 반사하고 있는 원래의 빛깔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물리적 필터링이 발생하는 거지요. 몸의 눈만 그럴까요. 마음의 눈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저마다 제한적인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감정의 거름망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세계를 관찰합니다. 특히 나이 들수록 이런 현상은 심해지겠지요.

'장자'에서 비롯된 '명경지수(明鏡止水)'란 말이 있지요. 누군가가 자신을 비춰볼 만한 깨끗한 거울과 고요한 물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뛰어난 현인(賢人)이나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면 인간인 이상 때가 끼지 않은 깨끗한 거울을 유지하기는 어렵죠. 흐르지 않는 고요한 마음 상태도 마찬가지고요. 저마다 때가 끼어있기 마련인데 나만 색안경을 끼지 않았고 나만 옳다는 자세는 만용입니다. 세계최강대국의 양극화된 선거를 보면서 색안경에 취약한 인간 존재를 뒤돌아 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굳이 태평양 건너까지 멀리 찾아보지 않아도 되긴 합니다) 최소한 "나는 이런 색안경을 끼고 있고 이 색안경의 가시광선 투과율은 몇 %다"라고 서로 영점 조정이라도 하는 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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