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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인문학이 인생을 바꾼다는 말, 안 믿습니다

양성우 | 글 쓰는 내과 의사. 책 <당신의 아픔이 낫길 바랍니다> 저자.

[인-잇] 인문학이 인생을 바꾼다는 말, 안 믿습니다
인문학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인문학 공부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줄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몇 년 전 인문학 열풍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어야 인생이 바뀐다는 말들, 모두의 마음속에 확고히 자리 잡았던 생각의 씨앗들이다. 나 역시도 그런 주장에 경도되었다. 그래서 10년간 바쁜 생활 속에서도 짬을 내어 인문학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인문학 도서도 사실 재미 붙이면 또 나름 괜찮지만, 내가 봐도 영화나 드라마만큼의 재미에 한참 못 따라오기 때문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도 '자기계발'을 위해 참고했던 일이었다. 한때 독서를 잠시 그만뒀던 적도 있는데, '공부하는 이미지'를 뽐내고, 실제로 발전보다는 유희만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직업에 열중하고 책 읽기를 멀리한 적도 있다. 실제로 일터에 진정한 철학자가 많기도 하고, 백면서생은 세상 물정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그래도 정보량으로 치면 책을 따라올 것이 없다. 요즘 아무리 유튜브가 대세라고 해도 시간 투자에서 책과 너무 차이가 난다. 정보 하나 얻으려면 몇 분씩 들어줘야 하는데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물음은,
인문학 공부에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답이 반드시 존재하느냐는 것이다.

'인문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멘토들이 적지 않다. 인문학을 직접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인문학 구루들에게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책을 굳이 안 봐도 된다는 의견은 왜 없을까? 나는 독서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인문학 배운 사람이 그렇지 않은 이를 깔봐서는 더욱 안 된다고 본다.

책 읽기에 취미 없는 이들은 어중간한 독서가 그들 삶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인문학 저자들 모두가 각자의 언어, 나름의 기준으로 도단 하기 때문에 다소 폭력성을 띤다. 따라서 매우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보편성은 없고 다소 단정적일 수 있다. 만일 훈련되지 않은 인문학 입문자가 이런 책을 딱 한 권만 읽으면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저자의 말이 세상 진리인 양 세상을 단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이후에 더 읽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고, 자기 생각이 들어설 데 없으니 비판적일 수도 없다. 독서라는 드문 이벤트 하나 때문에 편협한 생각이 들어서는 것이다. 차라리 안 읽었더라면. 더군다나 서점에 양서 아닌 책도 많지 않던가.

질 낮은 책을 제치고 고전을 읽으면 어떤가. 예전 세인트존스 칼리지라고, 거기서 4년간 인문학 고전만을 가르친다고 큰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을 졸업한 학생은 굉장한 리더가 된다는 그런 굉장하고도 희망찬 이야기였다. 인문학 멘토라면 한 번 씩은 언급했을 것이다. 나도 굉장히 경도되었던 스토리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인문학이라면 사회경험이 없는 대학생이 4년간 인문학을 배운다고 뭔가 굉장한 것은 없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게다가 인문학 공부는 엉덩이 붙이고 해야 하는 수련의 하나가 아니던가. 공부(工夫)는 중국어로 쿵푸로 읽고, 머리 쓰기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성실성을 중요한 요소로 친다.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고 노력과 시간, 꾸준함을 요한다. 인생 같은 어려운 문제를 단지 4년, 그것을 독서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가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졸업했다는 한국인 졸업생 책을 읽게 되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신화였을지 내부인의 입으로 들을까 하여 두근거렸다. 하지만 책의 결론은 '우리의 기대만큼 배우지는 못한다'였다.

영어에서 이런 심리를 '마법의 탄환(Magic bullet)'이라고 한다. 총알 한 발만 있으면 그 어떤 일도 다 풀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이런 마음이 어찌 보면 게으름에서 나왔을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인문학에 열광하는 이유는 인생이 고단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가 삶 구석구석에 도사리고 있지만 해결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풀 수 없는 인생의 난제를 한 방에 풀 '마법의 탄환'이 있다고 믿고 싶어서, 인문학이 내 모든 질문의 답이 된다는 주장에 열광하지는 않았을까.

나는 과거 죽음이란 명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철학, 신학 서적을 여러 번 뒤졌지만 병원 현장의 배움에 티끌만큼도 미치지 못했다. 책과 지식은 나를 이끄는 좋은 지침이지만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책 읽기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꼭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 그들에게 '책을 왜 읽지 않느냐?'며 비판할 수 있는 걸까. 독서가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자리에서 욕망에 충실하며,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서로를 인정하고 사는 분위기도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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