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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마침내 도착한 우리의 목소리…정세랑 '시선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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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60 : 마침내 도착한 우리의 목소리…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 심시선의 이름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름을 한 글자 바꾼 것인데,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 ('작가의 말' 中)

추석 연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업로드될 [북적북적]에서 어떤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000년하고도 20년이 지난 오늘의 추석.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과 제사를 우리의 목소리로 호명한 이야기를 읽고 싶구나.

정세랑 작가가 올여름 내놓은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에는 도입부 시점에서 10년 전에 사망한 집안 어른에 대해 처음으로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뿌리를 -타당한 이유가 있어- 하와이에서 추모하기로 한 가족입니다. 이 가족이 다 함께 하와이로 떠나 '그 제사'에 정성껏 도달한 뒤에, 다시 각자의 생활로 흩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룹니다.

'아니, 내가 연휴 내내 전 부쳤으면 됐지, 이제 좀 쉬려고 켠 [북적북적]에서까지 제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들어야 해' 살짝 짜증이 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명절에 많은 사람들의 평정심을 자꾸만 자극한 건, 실은 가족도 차례도 전지짐도 아닐지 모릅니다. 추석, 가족, 친척, 혼인, 제사 같은 단어들이 짝을 지어 등장하는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나 자신'이라는 주체는 당연한 듯 소외되고 자청하지 않은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린 경험에 대한 분노를 애꿎은 전지짐과 갈비찜이 뒤집어 쓴 것일지도요.

"마티아스 마우어에 대해서는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여전히 내 말과 글과 행동과 표정에서 마우어의 흔적을 찾는다는 걸 알지만, 소용없는 일일 테다. 그에게는 명망과 별개로 많은 문제가 있었고, 우리에게 있었던 일은 사람들이 그리는 것처럼 절절하게 아름답지도 바닥까지 추악하지도 않았다. 온갖 억측들을 뒤로 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왜 소용이 없는지. 나는 그의 부인이 아니었고, 대개의 기간 동안 연인도 아니었다. 그를 이용했기에 입을 다무는 게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에겐, 몇 년 전에 내가 국제적으로 몸을 굴려 지금 자리에 다다랐을 뿐이라며 함부로 써대던 논설위원이 어찌되었는지 상기시켜주고 싶다. 나에게는 유능한 변호사가 있고, 그자가 몇 년치 번 돈을 빼앗아 마음에 드는 그림을 한 점 샀으니까.

-[잊은 것에 대해 묻지 마시오](1988)에서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어."

한 달에 한 번씩 남매들이 모여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명혜가 선언했을 때, 동생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이 소설은 진심과 야심이 가득한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1988년에 위에 서술된 것과 같은 명예훼손에 대해 누군가의 연봉 몇 년치의 배상금을 받아내는 승리를 거둔 여성 예술가가 나온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같은 예술가를 뿌리로 뻗어 나온 '가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 ('작가의 말' 中)

책 제목 [시선으로부터,]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뿌리인 여성 예술가 심시선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심시선'은 20세기 중반에 여러가지 이유로 한반도를 벗어나야 했던 한국인들이 공통으로 지닌 역사의 일부를 지니고, '뮤즈'라는 편리한 단어 속에 감금됐던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이 공통으로 지닌 역사의 일부도 경험한 뒤에, 한반도로 돌아와 20세기말 논쟁적인 작가로 활동했던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에게선 나혜석의, 김명순의, 전혜린의 그림자가 모두 조금씩 아른거립니다. 하지만 가공의 인물인 그는 나혜석과 김명순이 누리지 못했던 '승계'와 '완주'를 모두 성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꾸었던 꿈, '판타지'입니다. 단, 부질없는 꿈, 이 아니라, 21세기의 우리들이 앞으로 실현시켜 나갈 꿈의 시작입니다.

이 책의 앞머리를 장식한 '심시선 가계도'라는 한 장의 그래픽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 하고 말았다고 미리 고백해야겠습니다. 근대 이후의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종종 가장 야심찬 작품들은 가계도와 함께 시작합니다. 몇 대에 걸친 한 집안, 또는 여러 집안의 방대한 일대기를 서술하기에 앞서서 이해를 돕기 위한 가계도를 그리는 겁니다. 소설가가 그리는 시대를 광범위하게 상징하고 대표할 수 있도록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가계의 서사를 창조해 주제의식과 정신적 유산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그 시도가 성공하는 게 '소설'이라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 기량 중에서도 으뜸 가는 것 중 하나로 인정받습니다.

우리가 익히 읽어온 그 가계들이 '시선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습니다. '심시선' 같은 인물은 '뿌리' 대접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단절된 파편, 또는 도구, 적, 적도 되지 못하는 엑스트라인 경우가 보통입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부분을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집안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 가계야말로 나의 가계이며, 이 가계의 성취와 갈등, 고뇌야말로 우리의 이슈이고 정신적 유산이라고, 단단히 다진 야심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것이 김동인이나 이상에게 있지 않고 김명순이나 나혜석에게 있음을 깨닫는 몇 년이었다."는 작가의 말은 일종의 암호입니다. 정세랑 작가뿐만 아니라 이 사회의 곳곳에서 많은 여성들이 바로 이 암호를 각자의 노트에 은밀히 기록해 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김명순과 나혜석으로부터의 '계승'은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릅니다. 아니, 제대로 눈에 띄지 않았으나 쉼없이 이뤄져 온 '승계작업'이 이제야 비로소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습니다.

"존재한 적 없었던 심시선처럼 죽는 날까지 쓰겠다." ('작가의 말' 中)

[시선으로부터,] 제가 얻은 것은 여기저기에 '우리'가 있다는 이 감격입니다. 김유신이 죄없는 말의 머리가 아니라 자신의 다리를 잘랐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 여성이라고는 초선 밖에 나오지 않는 삼국지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이야기를 담은 것처럼 대접받는 것에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이의를 제기해도 된다는 것조차 몰랐던 우리. 햄릿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오필리어를 위해 분노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본 우리들이 드디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구나. 아니, 외쳐온 이들은 늘 있었으되, 마침내 이렇게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구나. 문명의 담 너머에서 그 안을 훔쳐보는 처지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문을 활짝 열어 보이며 이것이 나의 가계이고 나의 서사요, 라고 선언하는 그 목소리가 이제 들리는구나.

'전 부치는 냄새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상징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 그것은 막다른 골목으로만 통하는 미래에 대한 상징이었다. 여기 하나의 현상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있고, 이 이야기는 결코 너의 이야기보다 작지 않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묻히는 게 아니라 들리기 시작한 2020년. 드디어 우리의 깃발을 든 작가가 도착했다, 는 감격으로 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학동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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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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