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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세상을 뒤집은 반대자, R.I.P RBG

김지미 | 영화평론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지난 18일, '노토리어스 RBG'가 영면했다. 미국 모든 언론 매체에 부고 기사가 올라왔고 SNS에는 추모글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유명 팝스타 사망 소식을 방불케하는 대중들의 뜨거운 추모 열기가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죽음을 향해 쏟아졌다.

유명 래퍼 '노토리어스 B.I.G'에서 영감을 얻은 별명 '노토리어스 RBG'는 보수적 법안에 반대되는 해석을 펼쳐온 그의 행보에 기인한다. 그는 여성, 성소수자 등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진보적 대법관으로 '록스타'같은 인기를 누렸다. 긴즈버그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 머그컵 등이 만들어졌고, 그의 삶은 책과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극영화인 <세상을 바꾼 변호인 (On the Basis of Sex)>과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 (RBG)>(이후 <RBG>로 표기)가 지난해 개봉했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하버드와 콜럼비아 로스쿨에서 수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긴즈버그가 남녀 차별적인 법조계에서 입지전적 인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RBG>는 진보적인 히어로로 아이콘이 된, 84살의 긴즈버그 인터뷰를 바탕으로 공적 성취와 개인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해낸 작품이다. 전자가 드라마적인 재미를 통해 차별의 역사와 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줬다면 후자는 그녀가 바꿔온 과거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투쟁의 전략과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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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포스터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스틸컷." data-captionyn="Y" id="i20147527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00927/20147527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루스는 코넬대학에서 수학할 때 남편 마티를 만났다. 그녀가 대학을 다닌 1950년대 코넬은 성별 쿼터가 있어 여학생이 재학생의 20%를 넘지 못했다. 루스 긴즈버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의 남편이 된 마티는 그녀가 만난 수많은 남학생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녀의 지적 매력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루스는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한다. 5백 명이 넘는 남학생들 사이에 여학생은 단 9명이었다. 교수들은 여학생을 투명인간 취급하기 일쑤였고, 학장은 그들이 왜 남학생을 자리를 빼앗고 그 자리에 와 있는지 설명을 요구했다. 개인이 아닌 여성을 대표해야 한다는 중압감도 늘 따라다녔다.

루스는 로스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졸업했지만 여성 변호사는 고용하지 않는다는 당시 풍토 탓에 대학교에 자리를 잡게 된다. 여성이 늘 소수인 법조계에서 자신이 겪었던 차별 경험을 토대로 소수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리에 관심을 갖고, 특히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 문제에 주목하게 된다. 교편을 잡던 대학에서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여성과 법'이라는 과목을 개설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간다. 특히 남성을 경제적 주체로, 여성을 가정의 수호자로 간주하는 가부장제가 어떻게 법적으로 차별적 고용기회와 불평등한 임금을 합리화하는지 밝혀나갔다. 성별에 따른 고용조건과 임금 차별의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소송을 맡아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루스 긴즈버그는 주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하는 사례를 다루는 소송의 변호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리하는 소송의 주체나 수혜자가 늘 여성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1975년 그는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부인이 사망한 한 남성의 부성 보호에 대한 소송의 변호를 맡았다. 아내를 잃은 뒤 홀로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한 남성이 사회복지법안이 모성보호만 규정하고 있어 자신은 수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루스 긴즈버그는 이 사건을 통해 법 조항이 사회와 가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강제할 때 그 희생자는 비단 여성만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소재가 된 Moritz v. Commissioner 사건도 결혼하지 않은 남성이 자신의 가족을 돌볼 때 발생한 비용은 세금 환급 대상이 되지 않는 부당함을 제기한 소송이었다. 역시 가정 내에서 돌봄의 역할은 여성에게 국한하는 법 조항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RBG>가 담고 있는 긴즈버그의 삶과 일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첫째는 대법관도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긴즈버그 부부의 돈독한 관계를 묘사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인다. 루스의 업적이 가능했던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여성의 일도 남성의 일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서로 적절한 시점에 양보하고 타협한 부부 관계였다. 그뿐만 아니라 긴즈버그가 대법관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는 세금 전문 변호사로서 성공해 정계에 상당한 인맥을 가진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몫을 했다. 부부는 사적 영역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도 긴밀한 파트너였다.

두 번째는 대법관의 업무는 매우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루스 긴즈버그가 대법관의 자리에 오르고, 업무를 수행하며 전폭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판결이 지향하는 목표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체로 판사가 내리는 판결에 대해 무색무취의 공정함을 기대한다. 하지만 결국 법을 만든 것도, 그것을 수행하고 해석하는 것도 사람이다. 법이 만들어졌을 때의 통념과 상식, 그리고 그것이 수행될 때의 현실, 해석될 때의 환경은 모두 다를 수 있다. 판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가는 법해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RBG>는 법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차가 어떤 판결의 차이를 불러오는지 스칼리아 대법관과 긴즈버그의 법에 대한 시각차를 비교해 보여 준다. 스칼리아 대법관은 긴즈버그와 개인적으로는 깊은 우애를 나눴지만 판결에 있어선 늘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다. 스칼리아 대법관에서 법은 이 사회의 기원이었다. 그는 늘 법이 만들어진 당시의 취지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반면 긴즈버그에게 법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를 만들어가는 토대였다. 그는 법이 만들어질 당시 여성이나 유색인종은 법 조항의 '우리'에서 늘 제외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렇게 소외된 주체들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위한 해석을 내놓는 데 집중했다.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포스터." data-captionyn="N" id="i201475281"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00927/201475281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스틸컷." data-captionyn="Y" id="i201475277"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00927/201475277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이 영화의 한글 제목인 '나는 반대한다(I dissent)'는 긴즈버그가 대법원 판결에서 '소수 의견(dissenting opinion)'으로 내놓는 판결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따온 문구이다. 긴즈버그 생전에 미국 연방 대법원은 보수 5, 진보 4로 보수가 늘 우세를 차지했다. 긴즈버그는 결과적으로 진 판결에 대해 소수 의견을 내는 이유로, 당장 소송의 승패를 바꾸지 못할지라도 이후 법을 바꿀 수 있는 발의를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밝혔다. 실제로 그의 소수 의견이 국회의 법안 발의를 촉발한 경우도 꽤 있었다.

긴즈버그의 죽음으로 인해 미국 정치권은 새로운 대법관 임명을 두고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법관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놓고 밝히고 지지하거나 공격하는 모습이 한국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법관의 숨겨진 정치적 성향을 '공명정대'라는 가면으로 가려놓고,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답답해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어 토론하고 어떤 방향이 더 옳은지를 적극적으로 논쟁하는 편이 법정의가 설 수 있는 더 건강한 토대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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