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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죽음을 무릅쓰고 배달한, 그 택배

추석 택배 대란은 막았지만, 갈등 불씨 여전

[취재파일] 죽음을 무릅쓰고 배달한, 그 택배
조금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택배 배달하는데, 목숨까지 걱정이라니. 그런데 지나친 과장만은 아닙니다. 올해 들어서 전국의 택배기사 7명이 숨졌습니다. 숨진 기사의 나이는 31살부터 47살, 과로사로 추정되는데 알려지지 않은 건 더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현장 택배기사들의 말입니다. 택배노동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배송하고 있다"고 절규합니다. 한 설문조사에서는 택배기사 열 명 중 여덟이 '나도 과로사할 수 있다는 걱정에 떨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손 하나만 까딱하면 받을 수 있는 택배가 언제부터 택배기사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됐을까요? 물론 코로나 여파가 큽니다. 올해 들어 택배 물량은 약 30% 안팎으로 증가했습니다. 택배기사들의 업무시간도 강도도 모두 세졌습니다. 하루 평균 13시간에서 많게는 17시간까지도 일합니다. '이러다 나도 쓰러지는 것 아닐까, 다가오는 추석 연휴, 1년 중 택배 물량이 가장 많은 가을철을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많은 택배노동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과로할 수밖에 없는 환경…'그게 원래 네 몫'이라 하시면

택배 분류 거부

과로하는 일상의 중심엔 오전 분류 작업이 있습니다. 물류가 모이는 터미널에서 각 배송지에 따라 택배 물건을 나누는 작업인데, 택배기사들은 하루 5시간에서 7시간을 이 분류 작업에만 쏟아야 합니다. 이 작업이 끝난 다음에야 배송을 시작할 수 있는 겁니다. 택배기사들과 업체가 의견이 충돌하는 원인도 '분류 작업'을 바라보는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택배노동자들은 이 업무를 대가 없는 '공짜 노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택배사는 건당 700원에서 800원 남짓의 배송 수수료에 분류 작업비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택배노동자들은 배송 수수료에 분류 작업비가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 자체가 허구라고 말합니다. 이미 대분류 작업이 이뤄지는 허브터미널에는 사측이 고용한 분류 작업 전담 인력이 운용되고 있고, 이들은 '분류 작업비'를 받고 있습니다. 쿠팡 등 신선식품 배송업체 일부도 분류도우미 같은 전담인력을 이미 고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 지역 서브터미널로 집하된 물량들은 택배기사들이 분류해야 합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벨트에 동료들과 공동 작업으로 하루 배송 물량의 약 1.5배에서 2배 수준의 물량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동시간 측정도, 건당 책정 방식도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어디에도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택배기사들이 받는 수수료에 분류 작업비가 포함되어 있고, 관행이니 그렇게 일하라는 게 택배 회사들의 주장이라는 겁니다.

● 분류 작업 주체는 누구? 자비로 분류도우미 고용하기도

택배 작업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택배노동자들은 자비로 분류도우미를 고용하기도 합니다. 택배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안하무인' 식으로 무조건 회사가 인력을 충원해달라는 게 아니라고 하소연합니다.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주고, 필요한 비용이 있다면 기사들도 함께 부담하겠다고 여러 차례 택배사에 전달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하고 있다는 겁니다.

택배노동자와 택배사의 분류 작업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는 이유는 분류 작업에 대한 법률적 규정이 모호한 탓도 있습니다. 택배산업은 '화물자동차 운송법'의 적용을 받고 있지만, 여기 어디에도 분류 작업과 관련한 조문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택배산업에 대한 독립적인 법안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분류 종사자와 배달 종사자를 명확히 구분하고 분류 작업이 택배노동자들의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 추석 택배 대란은 막았지만…택배노조 "약속된 인력 투입 없으면 특단의 조치"

택배 물류센터 (사진=연합뉴스)

4천여 명의 택배노동자들은 일단 추석 연휴 분류 작업 거부 계획은 철회하기로 했습니다. 정부와 택배업계의 긴급 간담회에서 결정된 1만 여 명의 추가 인력 투입방안을 '미약하지만 긍정적인 노력'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유에섭니다. 일단은 평소대로 분류 작업을 하겠지만, 추가 인력이 투입될 것으로 예상되는 23일부터는 평소보다 2시간 정도 늦은 오전 9시 출근을 할 계획이랍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택배업계는 택배기사들의 '공짜 분류 작업'이 이뤄지는 서브터미널에 7개사(CJ, 롯데, 한진, 로젠, 경동, 쿠팡, 마켓컬리)를 합쳐 약 2천 명의 분류 인력을 투입한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회사별 구체적인 인력 투입계획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택배노조는 원래 분류 인력을 두고 있던 쿠팡 등 신선식품 업체의 인력을 제외한 택배사만의 충원 계획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회사는 영업기밀이라는 이유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국토부 관계자는 "택배 노동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큰 약속에 대해서 합의한 만큼 각 택배사가 의미 있는 수준의 충원을 하겠다고 약속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빈말에 그쳐서는 안 될 겁니다. 현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없다면, 택배 대란은 언제든 벌어지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 내가 받은 택배 뒤, 내 이웃의 숨은 과로

"가끔 왜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가냐고 하는데, 그 1~2초마저 급박한 게 택배노동자들의 마음입니다. 최근엔 밤늦게 배송하는 일이 잦아서 누르고 나서도 항의받는 일도 있었고요. 고객들이 그 부분을 양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택배기사가 꼭 하고 싶은 얘기라며 덧붙인 말입니다. 분초를 다투지 않아도 되는 택배, 자정이 지나서 받지 않아도 되는 택배, 조금 늦어도 이해할 수 있는 택배가 '관행'이 되어야 택배를 주문하거나 받아보는 우리 마음도 좀 더 편해지지 않을까요. 이번 추석 택배 대란은 한시적 인력 충원으로 한 고비 넘겼지만, 연이은 택배 과로사를 막으려면 그 대책이 잠깐에 그쳐서는 안될 겁니다.

*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의 <택배노동자 과로사 실태조사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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