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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매일 친자 확인해"…농담에 담긴 '부모의 세계'

김지미 | 영화평론가

불완전함, 그것이 부모의 숙명

"요즘 매일 친자 확인한다"

코로나로 학교 문이 닫힌 이후, 친구들이 농담 반 진담 반 카톡에 올리는 하소연이다. 학교와 학원 다니느라 바빴던 아이들과 종일 집에서 씨름하다 보니 겪게 되는 상황들을 경쟁적으로 공유하며 위로를 주고 받는다. '친자 확인'이란 어떤 부모든 자기 아이를 가르치다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대학교 합격증을 받자마자 과외 알바를 했고, 대학원을 수료하자마자 대학 강단에 섰다. 가르치는 일이라면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자식 앞에서 그 경험은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학생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더 잘 알려줄까'를 궁리하느라 바빴던 반면 내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어떻게 이것도 모를 수 있나'라는 걱정이 먼저 시작되기 때문이다. 가르침은 종종 꾸지람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엄마 목소리 톤에서 이미 불안의 기운을 탐지한 아이의 눈에는 원래도 솜털 같던 지식에 대한 갈망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만 쌓여가는 게 보인다. 다음에는 좀 더 객관적으로 대하리라 다짐하지만 매번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국 부모 자식 간의 의가 더 상하기 전에 자기 자식은 못 가르친다는 불고의 진리를 가슴에 새기며 학습을 통한 '친자 확인'은 그만 두리라 마음먹는다.

부모이기 이전에 자식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내적 갈등의 연속이다. 부모가 되기 전에는 어릴 때 받았던 상처와 불만 그리고 좋았던 경험들을 토대로 나름 좋은 부모의 기준을 세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자란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 리스트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나의 아이들에게 이미 너무 낡은 것이었다. 20세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된 기준들이 21세기의 아이들에게 맞을 리 없었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우리들의 20세기>(2016)는 이러한 엄마의 고민과 아들의 반응이 흥미롭게 담긴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1978년, 산타 바바라'지만 시공간을 초월하는 세대 갈등과 20세기를 관통하는 삶의 변화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사진은 영화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1924년생인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나이 마흔에 아들 제이미를 낳는다. 도로시아는 남편과 이혼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쿨하게 아들을 키운다. 하지만 제이미가 십대가 되면서 한계에 부딪힌다. 결정적으로 제이미가 '기절하기' 게임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뒤 그녀는 아들이 점점 더 이해할 수 없게 자라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이미가 제일 좋아하는 두 여성, 줄리(엘르 패닝)와 애비(그레타 거윅)에게 좋은 멘토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줄리는 제이미보다 2살 많은 소꿉친구고 애비는 도로시아가 운영하는 세어하우스의 세입자다. 둘은 모두 그녀의 제안에 의아해하며 제이미에게는 성인 남성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반문한다. 도로시아는 남성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 수 없을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한다. 제이미와 동년배에 가까운 줄리와 애비가 그가 좋은 남자로 성장하는 데 더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

도로시아의 실험적 제안은 제이미를 오히려 혼란에 빠뜨린다. 줄리는 제이미보다 더 혼돈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고 이십대인 애비 역시 불안정한 청춘 때문이다. 제이미는 그들의 불안을 곁에서 지켜보고 위로하고 때로는 해결책을 제시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도로시아는 그 두 사람이 제이미에게 조언을 해주며 앞길을 밝혀주길 기대했지만 이 아슬아슬한 청춘들 셋은 때로 사고를 치고 교감도 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함께 성장한다. 도로시아의 부탁은 그녀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을 거쳐 결국은 그녀가 원하는 답을 향해 간다.

이 영화의 원제는 '20세기 여성'이다. 192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여성들이 살아가면서 거쳤던 많은 문제와 혼란들이 도로시아와 줄리 그리고 애비를 통해 간결하지만 깊이 있게 그려진다. 예를 들어 '임신'은 각각의 여성에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십대 줄리에게 임신은 공포다. 피임에 대한 선택권이 없던 줄리는 제이미와 애비의 도움을 받아 자기 몸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결정권을 갖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한편 애비는 어머니가 임신을 유지하기 위해 복용한 약 때문에 자신이 선천적 불임 가능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로시아에게 임신은 제이미를 낳게 된 일인데 그를 키우는 일이 쉽지 않지만 여전히 아들을 낳은 것이 자기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낀다.

이 세 여성의 사례는 여성이 임신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와 감정이 인생의 국면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임신은 여성에게 일관되게 축복이거나 불행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인생 계획과 관련하여 통제할 수 없게 될 때 좌절이 된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중요한 경험이지만 그로 인해 원래 유지해 왔던 인생의 가치관들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것을 원하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도로시아는 영화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고 공장 설계실에서 도면을 그리고 아들의 성장에 대해 염려하지만 집착하지 않고 혼자 살지만 비참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적절하게 자신의 삶을 관장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며 늘 이성적으로 대화하려고 애쓴다. 경제와 사회 문제에 눈과 귀를 열어두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모임 주최하는 것을 즐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어머니'라는 단어로 좀체 형상화되지 않았던 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다.

제이미는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엄마가 이해되지 않다가 애비가 준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힌트를 얻는다. 하지만 도로시아는 해당 구절을 읽어주며 자신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제이미의 자만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도로시아 역시 제이미를 이해하기 위해 1970년대 펑크 음악들을 공부하고 젊은이들이 자주 가는 클럽에 찾아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이미가 겪고 있는 모험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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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영화 '우리의  20세기' 스틸컷.

이 작품은 양육을 위한 이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더 현실적인 위안을 준다. 줄리와 먼 곳으로 도망쳤지만 결국은 엄마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제이미는 먼 곳에서 마주한 엄마에게 그동안 눌러왔던 속내를 드러낸다. 자신을 두 여성에게 부탁한 것이 엄마가 더 이상 자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도로시아는 솔직하게 고백한다. "나는 네가 나처럼 자라는 것을 원치 않았어. 나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랐어." 하지만 제이미는 답한다. "엄마랑 나, 이렇게 둘만 있는 것도 괜찮았어요." "그래?" "그래요." 어쩌면 도로시아가 겪은 문제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아들에게 내가 걸어오지 않은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었던 마음이, 제이미에게는 엄마의 삶에 자신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처럼 이해되었던 것이다.

모든 부모에게 불완전함은 숙명 같은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는데 아이들이 살아갈 세계에 대해 더 무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20세기>는 부모가 더 좋은 길을 안내하겠다는 포부와 더 나은 것을 가르쳐주겠다는 야심을 버리고 자기 삶의 부족한 부분까지 끌어안을 수 있을 때 더 좋은 양육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양육을 위한 답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세계를 살아가며 아이들과 함께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는 조금씩 조금씩 아이와 함께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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