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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위해 싸우고도…이념에 희생된 독립운동가들

<앵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가운데에는 항일운동의 업적을 인정받기는커녕 해방 후, 좌파라며 집단학살을 당한 경우까지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 피해를 인정받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권영인, 배정훈 기자가 이어서 전해드립니다.

<권영인 기자>

보은의 한 야산입니다.

지난 1950년 7월 10일 100명의 민간인들이 이곳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됐습니다.

북한을 도울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조성훈/충북 보은 학살피해 유족회 부회장 : 끌고 가서 돼지고기하고 술을 엄청 먹였대요. 그러고서 술이 취하니까 차에 싣고서 그리로 갔다고 그래요.]

이곳에서 희생된 피해자 가운데 항일운동가 박원근 선생도 있었습니다.

박 선생은 1930년대 일제 통치에 저항했던 삼인회와 신인구락부 사건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조국이 광복을 맞았지만 박 선생은 6·25 전쟁 발발 직후 보은경찰이 작성한 학살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박용현/박원근 선생 자녀 : 일본 놈들하고 어떻게 싸워 왔는데 같은 동족한테 이렇게 끌려가면서 이런 꼴을 당하는가. (그때) 아버지의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

박 선생의 항일운동 업적은 60년이 지나서야 인정받았습니다.

해방 후 친일 경찰 청산에 앞장섰던 민족주의자 최능진 선생도 6·25 전쟁 중 학살의 피해자가 됐습니다.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65년이 지난 2015년에서야 다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최만립/최능진 선생 자녀 : 너무 억울하니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잖아요. 너무 오래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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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훈 기자>

방금 보신 박원근, 최능진 선생은 뒤늦게나마 조금은 명예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 중에 학살된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 그들의 삶은 과연 얼마나 인정받았을까요?

도쿄 유학을 거쳐 동덕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항일 운동에 투신한 학암 이관술 선생.

1933년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고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서 지도자 후보군에도 이름을 올릴 만큼 유명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였던 그는 조작 논란이 있는 위폐사건에 연루돼 1946년 서울형무소에 수감됐습니다.

[손옥희/이관술 선생 외손녀 : (이감돼서)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있다가 6·25가 터지니까 1번 사상범이라고, 탈출한다고 해서 할아버지를 먼저 처형했다고 하더라고요.]

일제강점기 사상범으로 지목돼 옥고를 치른 박대영 선생.

해방 후 건국준비위에서 활동하다 체포돼 학살됐는데 역시 독립운동 사실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경옥/박대영 선생 자녀 : 빨갱이니 뭐니 그런 소리 안 듣고, 독립운동을 해서 국가유공 자라고 하면 (아버지의) 좋은 이름이라도 회복하잖아요.]

아직 학살된 독립운동가가 몇 명이었는지 조사된 건 없습니다.

좌익 세력이라고 집단 학살했던 보도연맹 사건 피해자 약 10만 명 가운데 최소 10% 안팎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이 전부입니다.

(영상취재 : 이병주·강동철, 영상편집 : 하성원·박지인, CG : 홍성용·최재영·이예정, VJ : 정영삼, 영상제공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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