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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이범수 "'삶의 여백'이 주는 투박한 소중함"

이범수│ 영화배우

[인-잇] 이범수 "'삶의 여백'이 주는 투박한 소중함"

내가 초등학생 시절 일요일 아침이면 동네 제일 높은 건물 옥상 스피커에서 '새마을 운동'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온 동네 사람을 깨우는 노래 소리와 함께 아버지는 꼭 그 동트는 시간에 나를 깨워 앞세우시고 다리 건너 모충산까지 아침 운동을 나서셨다. 내 기억에 왕복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리는 코스였기에 매주 일어나기 싫어 고역이었지만(간혹 아버지께서 나를 깨우지 않으시는 날도 있었다. 마치 라면땅 과자를 먹다가 우연히 집히는 별사탕처럼 달콤하였는데 그런 날은 전날 아버지께서 과음을 하셨던 날이다) 한편으론 아침 운동에서 돌아와 맞이하게 되는 어머니의 밥상이 어김없이 꿀맛이어서 묘한 기쁨을 느꼈다.

때로는 저녁 식사 후 가끔 속이 더부룩하거나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을 때면 아버지는 늘 내게 "동네 한 바퀴 뛰고 와라"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쩌다가 간혹 머리가 좀 아프다고 해도 아버지는 언제나 "동네 한 바퀴 뛰고 와라"라고 하셨다. 이럴 때도 뛰어라, 저럴 때도 뛰어라 하시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은 속는 기분도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매번 뛰고 나면 불편했던 속은 개운해졌고 머리도 아주 상쾌해졌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난 왜 귀찮기도 하고 속는 기분이 들면서도 매번 동네를 뛸 때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 조금은 '우격다짐'이지만 자식을 위하는 아버지의 '속정'이 어린 나에게도 전해져서일까. 아니면 아버지 말씀이 조금은 일리가 있는 것 같다는 '이해'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일종의 '복종'이었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속아주는 '미덕'같은 것이었을까. 어쨌거나 그 자체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이제는 추억이 돼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무언가 논리적이지 않지만 '인간적'인, 삶의 '여백의 미'같은 순간들의 소중함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우리집 아이들 마음속에 남기고 싶은 추억과 행복이란, 논리적으로는 본인의 이치와 다소 맞지 않더라도 마음속으로 깊이 교감할 수 있는 바로 그 '여백과 온정의 순간'들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문득 다른 종류의 염려가 떠오른다. 만일 과거 우리 시대의 어릴 적 내가 아닌, 21세기 지금 이 시대의 우리집 아이가, '비이성적이며 불합리하다'는 똑똑한 생각에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의 기쁨'을 부정한다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더 나아가 공부는 잘하지만 자신과 다름은 용납할 수 없는 편협한 사람, 똑똑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워낙 물리적 성공을 기준으로 교육의 가치가 집중되고 '자아'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이기에 행여나 성공을 향한 개인의 열정과 노력이 지나쳐 '이기와 독선'으로 인생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예의 바른 나쁜 인간>의 저자 '이든 콜린즈워스'는 본인의 저서에서 "인간은 대체로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만 지나치게 선하거나 항상 선한 사람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하며 세상의 속살을 드러낸다. 특히 돈 문제와 관련한 인간의 행동은 도덕적 완결성이 약해진다고 설명하며 드는 예가 바로 세계적인 기업 폭스바겐의 사례이다. 폭스바겐은 질소산화물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사 디젤 차량 110만 대에 불법 소프트웨어를 설치하여 미국의 배기가스 측정 테스트를 통과하였고 매연이 기준치의 40배나 배출되는 차량을 그대로 판매하였다가 적발됐다. 콜린즈는 이 사건을 소개하며 비윤리적 기업의 탐욕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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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우 과거 대형 은행 세 곳의 구제금융을 실시했던 2009년부터 손해 배상을 위해 1천억 달러 이상을 썼지만, 나랏돈이 '1천억 달러'(우리돈 약 120조원)나 사라졌는데도 죄를 인정하거나 처벌받은 은행가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에서 도덕성이 실종됐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평생 모은 돈을 날려버린 혐의로 한 은행 대표가 기소됐지만, 그는 뉘우치는 기색은 전혀 없이 마치 인간관계에서 흔히 벌어지는 실수를 대하 듯 은행이 저지른 중범죄를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하며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똑똑한 사고가 비뚤어지게 진화해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고 개인의 목적 달성을 위해 무리하고 그릇된 일들을 정당화하는 사례들. 이와 같은 약육강식의 시대에 아이에게 강자가 되라고, 쓸데없고 손해 보는 일에 연관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을 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약자를 위한 희생과 배려를, 불의에 대항하는 정의와 용기를, 옳고 그름에 대한 소신과 저항정신을 아이에게 어떻게 불어넣어줘야 할까.

얼마전 반가운 지인들과 모처럼 모였던 자리에서 그동안 못 나눈 일상의 대화를 나누다가 어린 시절 일요일 새벽마다 아버지와 산에 갔던 억울한(?) 사연과 동네 한바퀴를 뛰어야 했던 일들을 말한 뒤 나 또한 두 아이들에게, 나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해보고 싶다고 무심코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한 친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요즘 애들이 얼마나 똑똑한데 하란다고 군말 없이 하겠냐! 게다가 온갖 학원 스케줄로 바쁜데 그렇게 했다가는 자식 컨디션은 안중에도 없냐, 교육에 너무 소홀한 것 아니냐는 한 소리 듣기 십상이지!"

아버지를 따라 산을 함께 오르며 느꼈던 '그 무엇'은 내게 이성적 판단이나 이해득실을 따지기 이전의 세계였다. 산을 오르내리며 침묵 속에서 느꼈던 거친 숨소리와 땀방울, 그것은 아버지와 나 둘만이 말없이 행했던, 조용하지만 분명한 '소통'의 순간이었다. 산을 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존경과 신뢰를 느낀 시간들은 나에게 그 어떤 합리적이고 똑똑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배워야 하는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늘어나고, 바뀌고 달라지는 것 역시 많은 시대이지만 다소 투박하고 촌스러운 소통 방식에서 액면이 아닌 이면의 진심을 말없이 받아들이며 여백을 두어 여지를 가늠해 보는 관계를 바라는 건, 이제는 시대에 뒤쳐지는 일일까?

강한 아들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똑똑하기보다 올바르기를 바라셨고, 남을 이김으로써 잘 나기 보다 스스로를 이기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어릴 적 동네 한 바퀴를 뛰고 집으로 들어설 때면 당신은 언제나 마당에서 수건을 건네시며 나를 맞이해주셨다. 땀 흘리며 집으로 들어서는 아들을 마주하실 때마다 당신은 어떤 마음이셨을까?

콜린즈워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 아이들이 '예의 바른 착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바름'과 '착함'이 '영악함'과 '나쁨'보다 높은 가치를 지녔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내일을 맞이한다는 것은 낯선 영역이다. 그 낯선 영역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은 얼마나 해볼 만한 일인가. 아이들과 그렇게 내일을 맞이하고 싶다.

이제는 어린 시절 땀 흘리며 대문을 들어서는 아들을 마당에서 맞이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씻으라는 말씀 이외엔 다른 말은 없으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그 침묵 속에 담긴 뜻을 느끼기에, 나 또한 지금은 말을 아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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