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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못 짖는 개는 쓸모 없다" 작은 자들의 주교

#1
본인이 난곡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교구 소속 사제들의 인사는 교구장의 전권이니 그가 난곡동 성당 주임신부로 발령 난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뜻이었다. 강우일은 1985년 8월 15일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난곡동 성당 3대 주임 신부로 부임했다. 1974년 사제가 된 이후 명동 성당과 중림동 성당의 보좌 신부 생활을 짧게 한 것을 제외하면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 비서, 서울대교구 교육국장, 홍보국장 등으로 일했다. 난곡은 그의 사제로서 첫 본당이었다.

난곡은 서울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당시 난곡에 있는 초등학교는 특수지 학교로 분류됐다. 특수지 학교는 근무 여건이 열악한 곳에 있는 학교를 말하는데 교사들은 이런 학교에서 근무하면 가점을 받아 다음 인사에서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주로 산간 오지, 섬에 있는 학교나 분교가 해당되었는데 난곡에 있는 학교는 이 특수지 학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로 분류되었다. 서울 시내에 있지만 난곡은, 우리 사회 빈곤의 오지였다. 2001년 4월 중앙일보 <난곡 리포트>는 당시 난곡을 이렇게 묘사한다.

"산꼭대기의 파란색 공동화장실. 소방차가 올라갈 수 없는 평균 경사 35도의 골목길. 주로 소주·라면만 팔리는 동네 가게. 옛 삼성전자 로고가 남아 있는 1970년대식 거리 간판. 아직도 두 집에 한 집 꼴로 연탄을 쓰는 곳"

01년도 당시의 서울 신림동 난곡 지역 (사진=연합뉴스)

강우일이 난곡에 간 것은 그때로부터도 16년 전이었으니 당시 난곡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빈곤의 현장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모순이 가난이라는 형태로 난곡에 모여 있었다. 난곡은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악다구니를 치는 사람들로 늘 시끄러웠고 매일 곡 소리가 났고 어디선가 싸움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피를 흘렸고 누군가는 핏대를 올렸고 누군가는 쓸쓸하게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세상을 등졌다. 난곡을 관할하는 당시 서울 남부 경찰서의 사건 처리건수는 서울 시내에서 언제나 일등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나눔과 유대와 인정이 있었지만, 펄펄 끓는 삶의 현장이었기에 한 편의 지옥도 같은 풍경이 수시로 펼쳐졌다. 그런 난곡 생활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힘들지 않았습니다. 거기 신자들과 함께 기쁘게 동네를 다녔습니다. 힘들다고 느낀 적 없습니다."

강우일 주교와의 인터뷰는 6월 30일 제주교구장 집무실에서 있었다. 그의 글만큼이나 말에도 거의 수식어가 없었다.

조금은 힘들 때도 있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으려는데 샤를르 드 푸코 신부 이야기를 꺼냈다. 샤를르 드 푸코 신부는 북부 아프리카 등에서 원주민의 마을에 들어가 그들과 똑같이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를 본받아 이 세상 밑바닥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과 살면서 믿음을 증거하려는 수도회가 <예수의 작은 형제회>다.

"로마 우르바노 대학원을 마치고 사제 서품을 받기 전에 푸코 신부님의 영성을 몸으로 느끼기 위해 1년 동안 <예수의 작은 형제회> 수사들과 북아프리카 원주민 마을, 스페인 빈민가, 일본의 공장 지역에서 그 사회 가장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삶이 낯설거나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해서 좋았단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했다. 그의 글만큼이나 말에도 수식어가 거의 없었다. 그의 모든 것에 절제가 배어있었다.

이 후리후리한 젊은 신부 때문에 가슴 설렌 처자들 한두 명 아니었을 테고 신부하기 아까운 인물이라고 수군대는 소리 난곡 곳곳에 넘쳐났을 것이다. 할머니 신자들이 아들뻘 되는 신부님 손잡고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지집애들은 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라고만 생각하세요.' 난곡의 청년들은 이 사제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성당 문 앞을 기웃거렸을 테고 이 더러운 놈의 세상 이래 사나 저래 사나 한 가지라며 자포자기하던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가 내미는 손 어색하게 맞잡았을 것이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 흉내 제대로 내며 살아보겠다는 그의 야심 찬 도전은 불과 넉 달 보름 만에 끝이 났다. 그의 선택은 아니었다. 로마 교황청은 1986년 1월 4일 그를 주교로 승격시켜 서울 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했다. 본당 주임 신부는 임기가 5년이다. 적어도 5년은 이곳에서 여기 사람들과 같은 밥 먹고 같은 옷 입고 같은 냄새 풍기며 살겠다고 생각했던 강우일에게 주교 승격은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교황청 대사에게 나는 그런 자리를 감당할 사람이 못 된다고 사양했어요. 그랬더니 그런 이야기는 김수환 추기경께 말하라는 겁니다. 김 추기경님께 '저는 주교 재목이 못 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어이 강 신부, 저기 십자가 위에 예수님 보고 못하겠다고 그래'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죠."

강우일의 후임 신부도 1986년 2월에 부임했다가 6개월 만에 해외 유학이 결정돼 난곡을 떠났다. 난곡 사람들은 불과 1년 만에 두 명의 사제가 임기 중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들은 죽어서나 벗어날 수 있는 난곡을 저 사람들은 쉽게도 오고 쉽게도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물었더니, "그분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네요."라고 역시 밋밋하게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2009년 그가 쓴 김수환 추기경 추도사의 일부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 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 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난곡은 그에게 오랫동안 마음의 빚이었다. 불과 5개월도 안 되는 본당 사제 생활이었지만 난곡동성당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류는 수십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2
2012년 부친 강영욱의 장례 미사 때 그의 강론은 사뭇 감동적이다. 강우일은 차분하고 담담하게 아버지의 일생을 회고한다. 슬픔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슬픔을 넘어선 듯한 목소리다.
강영욱은 일제시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공무원과 군인을 거쳐 연탄공장, 냉동 수산업 등 다양한 사업을 했는데 부침이 심했다. 한국에서 39년, 일본에서 32년, 미국에서 20년을 살았고 평생 32번 이사를 다녔다니 강영욱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었다.

부친의 사업이 부침이 있긴 했지만 강우일의 집안은 그 시대 평범한 일반인의 집안은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 강세현은 경남 합천의 대지주였고 외할아버지 오위영은 신탁은행장, 3선 의원을 지낸 정계의 거물이었다. 강우일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오위영은 장면 내각의 장관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모 오현주가 1959년도 미스코리아 진이었다. 이래저래 그의 집안은 유명세깨나 타는 집안이었다.

강우일이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63년 강우일 집안은 일본으로 이민을 갔다. 그의 나이 18살 때였다. 아버지 냉동 수산업이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직격탄을 맞은 데다가 새로 들어선 군부 정권이 사사건건 방해를 하는 바람에 한국에서 도저히 살 형편이 안돼 일본으로 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일본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다가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수회가 설립한 일본 조치(上智) 대학에 입학했다. 이 대학을 나온 김수환 추기경과는 동문이다. 그의 선택은 4대째 천주교 신앙을 지켜온 집안의 장자 다운 선택이기도 했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3
그의 삶의 전반부는 드라마틱 한 출세 스토리지만 후반부는 고배의 연속이다. 30살에 신부가 되어서 41살에 주교가 되었다. 이문희 대주교가 37살, 정진석 추기경이 39살에 주교가 된 예가 있지만 어쨌든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1998년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대교구장에서 30년 만에 물러났을 때 가장 유력한 후임은 강우일이었다. 서울대교구에서 주교로 16년 일했고 김수환 추기경이 가장 신임하고 후원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교황청의 결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정진석 당시 청주 교구장이 후임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2001년 강우일이 서울대교구 2인자인 총대리로 임명되자 사람들은 차기 교구장 승계 작업이 시작됐다고 해석했다. 71세 고령으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정진석 추기경의 뒤를 잇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교황의 선택은 달랐다. 서울 대교구 총대리로 임명된 지 1년도 안 된 2002년 8월 강우일은 제주교구장으로 발령이 났다.

"놀라긴 놀랐죠. 실망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제주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꿈에도 그런 생각은 안 했으니까요. 당시 정진석 교구장님과 생각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계속 일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서울대교구장 인사에서 거듭 물을 먹었으니 내색은 안 했지만 아팠을 것이다. 왜 내가 제주로 가야 되느냐고 묻고 싶었을 텐데 그는 순명했다. 그것으로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교황청에서 추기경 서임을 발표할 때마다 유력 후보로 그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그의 추기경 서임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지만 신임 추기경 명단에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의 성향이 비슷하게 보여 그런 가능성을 더욱 높게 본 것일 텐데 결과적으로 허망한 기대였다. 강우일의 자리처럼 보였던 서울대교구장과 추기경의 자리는 한때 서울 교구 사무처장으로 그의 밑에서 일하던 염수정이 차지했다.

#4
일찍 주교가 되었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감이 컸던 것은 아니다. 초대 가톨릭대 총장을 할 때 이름이 좀 알려졌을까. 정의구현사제단에 가입한 적도 없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도 드물었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제주 오기 전에는) 그런 사회적 발언 안 했습니다. 우선 제가 보좌 주교라 적극적으로 나설 처지가 아니었구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님들이 주장하는 기본 취지에는 동의했지만 독재 권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쪽 편도 그들을 닮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분들의 저항의 방법론이 제가 기쁘게 동참하는 것을 어렵게 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20년 넘게 지내면서 그의 표현을 빌리면 '오만가지 꼴을 다 봤고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그가 겪은 오만가지 꼴과 별의별 일에는 경찰과 안기부, 보안사로 상징되는 독재권력의 행태도 있었지만 정의와 양심의 깃발만 들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오만과 독선도 있었다는 말로 들렸다. 그것이 그를 꽤 힘들게 했던 모양이다.

그 시절 사회적 발언을 자제한 이유는 또 있었다.

"제가 평생 닮고자 했던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이 그랬던 것처럼 저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주님의 삶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것, 그것은 제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저 아니어도 말할 사람은 많았던 시절이기도 했구요."

제주도로 간 이후 그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은 자들의 주교로서 작은 자들의 입장에서 작은 자들의 이해를 대변했다. 자기가 돌봐야 할 양 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그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았다.

4대강 사업을 위해 전국의 산과 강을 파헤칠 때 '도둑질'이라고 거칠게 몰아세웠고 제주도에 제2공항을 지으려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편의를 위해 왜 우리가 그 땅에서 쫓겨나야 하느냐며 공항 건설은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진보 정권이 나서 제주 강정 마을에 군사 기지를 지으려고 할 때는 왜 당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들의 삶이 위협받아야 되느냐고 따졌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사회적 발언은 내 몫도 아니고 내게 맞는 일도 아니라고 말하던 그가 제주도에 와서 왜 달라진 것일까. 무엇이 그의 굳게 닫힌 입을 열게 만들었을까.

"제주 4.3 사건입니다. 육지에 있을 때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싶었는데 여기 와서 공부를 해보니 너무 끔찍하더라고요.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홀로코스트에 비해 규모는 작을지 모르지만 국가에 의한 범죄라는 점에서 본질은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사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차분했고 목소리가 올라가지도 않았고 여전히 밋밋했다. 그래도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 짓는다고 할 때 4.3 당시 그 참혹한 일을 저지른 군대가, 군홧발 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다시 제주를 짓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때 나마저 가만히 있으면 나중에 역사 속에서 그때 교회는 무엇을 했느냐는 말을 들을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제주도에서 안식처를 구하는 예멘 난민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는 우리가 이거 밖에 안 되느냐고 통탄하며 난민들에게 잘 곳을 제공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2014년 헌법재판소가 8:1로 통합진보당 해산을 결정했을 때 불관용과 억압과 단죄와 처단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어둠의 시대라고 헌재 결정을 신랄히 비난했다. 두 사건 모두 다수 여론은 난민 추방과 헌재 결정이 잘 된 것이라는 쪽이었지만 그는 신앙인의 양심으로 외롭고 힘든 자들의 편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개발에 따른 이윤은 결국 가진 자들의 차지가 될 것인데 왜 우리가 가진 자들을 위해 피해를 감수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는 참아야 한다거나, 한 사람이 희생해서 아흔아홉 명이 행복하다면 한 명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필요한 곳에는 그의 이름을, 그의 지위가 필요한 곳에는 그의 지위를 빌려주었고 그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했다. 어려운 사람들이 성당으로 찾아오기 전에 먼저 그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갔고 때로는 싸움의 현장에 나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의 제주에서 삶은 2천 년 전 나자렛 예수의 격렬한 삶을 연상시킨다. 4대강 사업을 도둑질이라고 대성일갈하는 것은 나의 아버지 집은 돈 버는 곳이 아니라며 성전의 좌판을 때려 엎던 모습 같고, 제2공항 건설은 무덤을 파는 짓이라는 경고는 예수가 채찍을 들어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 당시 지식인들과 성직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외치던 예수의 모습은, 사람이 죽어 나가든 말든 나 몰라라 하면서 조용히 기도만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팔아먹고사는 직업인에 불과하다고 매섭게 몰아붙이는 그의 모습과 닮아있다.

"제가 명동성당 그 최루탄 연기 속 먼지 구덩이 속에서 20년 넘게 살았잖아요. 제주 발령 났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하느님이 이제 아름다운 제주에 가서 편안하게 살라고 포상 휴가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아니더라고요. 여기는 더 심한 전쟁터더라고요. 서울에서는 생각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전쟁터였습니다. 요즘 들어서야 이래서 하느님이 나를 제주로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5
그의 말이 수시로 교회의 울타리를 넘고 제주도를 넘어 육지로 들려왔다. 김수환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서울 대교구장이 된 정진석, 염수정 두 추기경이 사회적 의제에 대한 발언을 꺼리거나 의례적인 수준의 발언에 그치면 그칠수록 그 역할은 강우일에게 떠맡겨졌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떠밀려서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울리는 것은 아닌지 부담을 느끼는 기색도 없지 않았다.

"제 기질이 나서길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사하라 사막에서 숨어살 듯 살았던 샤를르 드 푸코 신부님 삶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분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몸이 아닌 입으로 많은 것을 떠드는 것은 제가 바라던 것이 아닌데 제주에 살고 주교회의 의장을 맡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보수 정권 시절 그는 언론의 단골손님이었다. 제주라는 작은 섬에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제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언론이 그를 집중적으로 소환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역시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주교 서품을 받았으면 자신의 교구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향해 외쳐야 될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교구의 책임자인 그가 한국 천주교회 얼굴처럼 비쳤고, 7만 명의 신자를 가진 교구의 주교인 그가 5백만 명이 넘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자로 보였다. 주교회의 의장이라는 직책 때문이었을 텐데 때로는 그의 발언의 무게와 그의 자리의 크기가 균형이 맞지 않는 듯했다. 한국천주교회 최고 의결 기구인 주교회의의 의장은 무기명 비밀 투표, 이른바 교황 선거 방식으로 선출되어 주교단을 대표하지만 다른 주교들의 상급자는 아니고 한국 천주교회 대표자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그의 목소리가 자주, 크게 울리면 울릴수록 그에 대한 불만과 비난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 주교 회의의 권위를 그가 독차지하는 것 아니냐, 그가 주교 회의의 이름을 사회적 발언에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심지어는 그를 종북 사제, 붉은 사탄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힘들 때 천주교회를 쳐다봤다. 거기에서 위안을 얻고 힘을 구하고 때로는 거기에서 잠시 쉬어 가기를 원했다. 70-80년대 김수환 추기경이 있던 천주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교회가 손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교회의 분위기는 예전과 달랐다. 민주화의 성지라고 불리던 명동성당에서 농성자들이 쫓겨나기도 했고 그들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교회가 외면하는 일이 적잖이 벌어졌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시절, 정의와 불의가 너무도 분명하던 시절 천주교회가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껴안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은 선과 악이 다투는 시절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라는 서로 다른 가치가 부딪히는 상황이라는 것, 보수와 진보는 생각의 차이일 뿐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배제되고 어느 한 쪽이 정의를 독차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오로지 진보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교회 안에 존재한다.

강우일 주교/강정마을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확고하다.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 거짓과 악이 판칠 때 그때 침묵하는 사제는 양 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가 짖지 못하는 개와 같다는 7세기 교황의 말까지 인용하며 사제들의 사회적 발언과 비판 나아가 저항을 촉구한다.

"오늘 누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누가 잡혀간 사람들이며 누가 억압받고 있고 누가 앞을 못 보고 갇혀 있는지 관심이 없다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 사랑한다고 외쳐봐야 예수의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2014년 성탄 전야미사>

#6
2009년 겨울 김수환 추기경 장례식은 우리 시대 거인의 이름에 걸맞는 장엄한 의식이었다. 그 의식의 정점에 강우일의 추도사가 있었다. 그의 추도사는 알아듣기 쉬웠다.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써도 되나 싶은 단어가 곳곳에서 동원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

"추기경님을 흠모하는 팬들이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추기경 정도 되는 분을 이 정도로 족치신다면"
"주님,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추기경님 이제 좀 편히 쉬게 해주십시오."

불경스럽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 말이지만 강우일은 자신 있게 이런 말을 썼다. 고인과의 절대적 신뢰와 애정이 없었다면 이런 표현 쓰지 못한다. 추도사는 마치 아들이 아버지 간병하듯 그가 김수환 추기경의 상태를 매일매일 챙기고 있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소박한 민초들의 언어로 투병 중에 보인 김수환 추기경의 인간적 모습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배변만큼은 당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으나 그 마지막 자존심마저 포기해야 했다는 구절은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작은 인간이었음을 환기시켰고 온 국민은 다시 한번 깊이 김수환의 삶에 공감할 수 있었다.

추도사의 백미는 "많이 아껴주셨던 강우일이 인사 올립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이다. 이 한 문장으로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각별한 관계였는지, 인간이 나눌 수 있는 애정과 믿음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죽음이 갈라 놓은 이별 앞에서 헤어짐의 아픔을 이렇게 담담하게 보여주기란 쉽지 않다.

"두 분이 약주라도 한 잔 하시면 김 추기경께서 '어이 우일이, 아니면 야 강우일' 이렇게 부르기도 했던 거 아닌가요?"

그렇게 부르고 그렇게 불리는 관계였으니 강우일이 그 엄숙하고 모든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된 자리에서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가볍게 웃으면서 아니라고 답했다.

"저를 아들같이 대하신 것은 맞는데 교회에서는 품을 받으면 존칭을 씁니다. 그렇게 막 부르시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 추도사를 통해 온 국민이 애도하는 국민적 장례식의 실질적 맏상주가 다른 사람이 아닌 강우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말의 힘을 잘 아는 사람이다.

#7
그가 말의 힘을 아는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예는 교종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교회 수장을 교황이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교종이라는 단어를 쓴다. 교종이란 말은 예전에도 썼던 말이고 교회의 으뜸이란 뜻이니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만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른 법이다. 교회의 황제라는 뜻과 교회의 으뜸이라는 말은 어감부터 확연히 다르다. 강우일은 신임 주교들에게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교회가 오래되고 덩치가 커지면서 관행과 관례가 생겼다. 교회는 지혜도 생겼지만 고집도 세졌다. 초대교회에는 사제도 없고 주교도 없었다. 오직 형제와 벗이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지금의 교회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 모습을 교회의 본질인 양 오해하고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잘못된 겉칠을 벗겨내는 작업을 여러분들이 해야 한다."
<유경촌 이한택 주교 서임 축하 모임>

그가 말하는 교회의 <잘못된 겉칠>에는 전제적 군주 같은 교황의 존재도 포함되는 것은 아닐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만들어진 최초의 공동체 지도자가 지금의 교황 같은 모습은 아니라고,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현 교회 제도가 교회의 본질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이런 말을 할 때 그의 생각은 막 잡아 올린 생선의 날비늘처럼 싱싱하다. 시퍼렇게 날이 살아있는 칼 같다. 일흔다섯 노인네의 생각이 이렇게 말랑말랑하고 유연하고 급진적일 수 있을까.

천주교회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베일에 싸인 조직이다. 비밀이 많고 가리워진 게 많다. 그래서 음모론이 끊이질 않는다. 35년 동안 주교로 있으면서 베일 속의 권력 게임을 치르기도 하고 때로는 지켜봤을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런 것을 물어도 되나 싶어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는 어떤 질문도 거부하지 않았고 능구렁이처럼 답을 피하지도 않았다. 답이 길지 않고 상세하지 않은 것은 몸에 밴 절제 때문이거나 질문이 무뎠기 때문일 것이다.

2017년 정권 교체 이후 그의 사회적 발언은 줄어든 반면 깊이는 훨씬 깊어졌다. 그는 최근 심각하게 국가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국가를 위해 개인이 죽어야 하고 국가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그런 국가가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국가를 신화화하고 우상화하는 시도가 일본이나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고 우리나라도 그런 조짐이 없지 않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국가가 그리도 신성하고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 비판하고 의심하자고 말한다.

위대한 조국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강우일의 이런 생각은 위험천만하고 불온하게 보일 수 있다. 공동체의 근본 원리를 위협하고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으나 그에게 한 인간의 생명과 권리는 그만큼 소중하다. 그런 점에서 강우일은 역시 래디컬 하다.

#8
염수정 추기경 서임 축하식에서 강우일은 이렇게 말했다.

"되도록 지위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덜 만나고 이름 없고 기댈 데 없는 사람들 많이 만나시라."

2010년 인천 교구 신임 주교 축하식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주교가 되면 신부일 때와는 달리 몇 십 가지가 달라진다. 입는 옷부터 달라지고 비서가 생기고 기사도 붙는다. 그러다 보면 교만해지기 십상이다. 당연히 자신은 예수 진영에 속해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마귀 진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천국에는 주교들이 백 년에 겨우 한 명만 들어간다는 농담이 있는 것이다. 25년 주교 생활한 사람의 덕담이다."

이 두 가지 사례를 들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염 추기경이라면 주교님 조언이 상급자의 훈계처럼 들렸을 거 같습니다."

"염 추기경님과는 서울대교구에서 같이 일하기도 해서 그렇게 서먹한 관계는 아닙니다. 그 정도 이야기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한 이야깁니다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었을 거 같습니다….제가 교만한 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제가 제일 고백하고 속죄하는 부분도 저의 오만함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을 하는데 분위기가 잠시 숙연해졌다. 급히 화제를 돌려 정년 이야기를 물었다. 올해 10월이면 만 75살, 교회법에 따르면 올해 정년이다. 빠르면 올 연말 늦어도 내년이면 은퇴를 한다. 은퇴 후의 계획을 물었더니 조용히 살고 싶단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들어주면서 조용히 제주에서 살고 싶단다. 그가 없는 제주를 벌써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은퇴 이후에도 제주에 근거지를 둘 것이란 말은 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겠다. 지금처럼 버스를 타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찾는 온유한 사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취재에 도움을 주고 귀한 사진 제공해 준 영화평론가 양윤모 선생님과 사진작가 송동효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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