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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국민 의전 서열 1위, 송해

[그사람] 국민 의전 서열 1위, 송해
1. 지금은 영광만이 말해지지만 그의 삶은 눈물이 반이다.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을 때가 그의 나이 환갑이 지난 61살이었다. 그때까지도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해 그의 부인은 구리시에서 식당을 했고 그는 그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일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전성기를 누리던 70년대, 그는 A급 코미디언은 아니었다. 국민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배삼룡, 구봉서, 이기동에 비하면 그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는 "그 자리에 끼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80년대는 혜성 같이 등장한 이주일의 독무대였고, 코미디언이 아니라 개그맨이라 불리던 후배들에 치여 텔레비전에 그가 설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17년 맡았다. 코미디 프로그램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에 그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매달렸던 것은 텔레비전에서 그의 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코미디도 하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했지만 그의 정체성은 그 어느 쪽에도 있지 않았다. 어느 한쪽을 고집할 형편이 못 되었다.

윤춘호 취재파일용-송해 평전 사진 (리사이징)

"한 가지만 하면 밥을 못 먹겠다 싶어 노래하고 코미디도 하고 악극도 했어요. 지금은 웃지만 돌이켜 보면 눈물 많았던 격동의 세월을 용케도 살아왔어요." <2019년 세계일보 인터뷰>

그가 수많은 인터뷰를 했지만 좌절과 실패 이야기는 극히 짧다. 생활고와 좌절감으로 자살 시도한 사연을 자기 입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제는 웃으며 엄살 섞어 그런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런 소리를 못 한다. 자의식이 강한 인물이다는 뜻일 게다.

쓰고 맵고 눈물겹던 시절들을 그는 "3년 계획 한 번 못 세우고 살았다"는 말로 대신했다. 방송사 프로그램이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 밥 먹는 일처럼 벌어지는 것 아닌가. 영원한 비정규직 인생의 설움을 그는 잘 안다. 그의 이 말에서 숱하게 잘렸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그랬다. 아무리 잘려도 잘리는 일에는 내성이란 것이 생기지 않는다고.

그의 프로그램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유명하다. 방송 제작진이나 출연진이 조금이라도 녹화에 늦거나 성실하지 않은 자세를 보였다가는 불호령을 각오해야 한다. 때로는 그의 입에서 거친 육두문자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의 이런 자세는 어쩌면 프로그램이 잘 되지 않으면 내가 잘릴 수 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송해길 리사이징

2. 그가 이제 우뚝 서 있다. 그가 은행 광고를 하면 그 은행으로 돈이 몰린다. 그가 광고하는 상품은 매출액이 달라지고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생기고 길이 생겼다. 머지않아 송해 박물관이 문을 연다. 그의 사진이 전국 곳곳에 높이 걸려 있다. 입원을 해도 뉴스, 퇴원을 해도 뉴스가 된다. 어쩌다 <전국노래자랑> 녹화를 하지 않으면 그게 곧 뉴스가 된다.

한 유명 감독이 그의 영화를 찍는 중이고 어떤 방송사는 그의 일대기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그가 나오면 시청률 곡선이 달라진다. 인터뷰와 방송 섭외 1순위다. 그의 얼굴 한번 보려고 그의 사무실 주변을 위성처럼 떠도는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은 아직 정점을 찍지 않았고 그가 추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기록의 경신이다. 최고령 사회자, 최다 진행, 최고 시청률 등등. 건강, 장수, 행복, 명예, 대중의 사랑. 돈도 남 부럽지 않게 벌었을 것이다. 1927년생이니 우리 나이 94살, 이용수 할머니보다 2살이 더 많다. 아직도 정정하다. 정정하다는 말도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있겠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전국~ 노래자랑"을 외칠 때는 청년이다.

1등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가 언제부터 선두가 되었을까. 그의 인터뷰가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 2010년대부터다. 그의 나이 80이 넘어서고 최고령 방송 진행자의 위상이 공고해지던 시기였다. 그의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윤춘호 취재파일용-송해 평전 사진

송해보다 더 사랑받은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사람을 찾자면 못 찾을 것 없고 그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서 빛났던 이름들을 우리는 안다. 돈으로나 명예로나 그를 앞설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성취가 대단한 것은 누구도 그의 성공을 시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장수와 건강과 일과 명예를 양손에 거머쥐고 있으면 누군가는 입 삐죽이고 눈 흘길 법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다. 그의 성공이 남을 압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질투와 시샘을 부르지 않는다. 이제 그에게는 경쟁자가 없다. 오직 자신이 경쟁자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독주가 계속되기를 원한다. 이런 인물이 과연 우리 현대사에 있었던가. 연예계만이 아니고 모든 분야에 걸쳐 말이다.

3. <전국노래자랑>은 주로 토요일 녹화를 하는데 그는 하루 전날이면 어김없이 제작진들과 같은 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간다. 아흔이 훌쩍 넘은 노인이 길게는 서너 시간이 걸리는 길을 매주 나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녹화 지역에 오면 마치 정해진 일과인 양 재래시장을 한 바퀴 돌고 목욕탕을 가서 요란스레 냉탕과 온탕을 오간다. 아무리 제작진이나 현지 관계자들이 신경을 쓴다고 해도 객지의 잠자리가 집보다 편할 리는 없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성직(聖職)인 양 매주 해낸다. 32년 동안 그렇게 해왔다. 전국을 몇 번 돌았는지 이제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그가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오른 것이 대충 줄잡아도 1천500회가 넘는다. 그럼에도 그는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한다. 이 프로그램의 조연출은 우황청심환과 기침약 판피린을 챙기는 것이 주 임무라고 한다. 녹화 1시간 전 우황청심환을 마신다. 긴장을 푸는 그만의 오랜 방법이다. 긴장하면 잔기침을 하는데 잔기침을 멈추기 위해 판피린을 복용하기도 한다.

"관객이 1명이 됐든 1만 명이 됐든 관객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평가하는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쫓아왔어요." <2018 EBS 초대석>

이런저런 상을 많이 받은 그가 유독 자랑스러워하는 상이 있다. 2004년 KBS 바른 언어상이 바로 그 상이다. 그는 2016년 국회방송 출연 인터뷰에서 방송 진행자의 조건으로 표준어 사용과 정확한 발음을 들었다. 그의 방송 진행을 유심히 들어보면 그가 존대어 사용은 말할 것도 없고 발음의 고저장단까지도 지키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도 한 달에 두세 번 치과에 간다. 치아가 건강해야 맛있는 것 마음껏 먹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치아가 건강하지 않으면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그의 성공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전국노래자랑> 작가는 29년째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담당 피디는 입사 이후 3번째 이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베테랑이다. 그렇지만 이 프로그램은 온전히 송해의, 송해를 위한, 송해에 의한 프로그램이다. 그는 프로그램 진행은 물론 악단의 위치와 출연자 선정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챙긴다. 제작진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도 이런 시어머니가 없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이 프로그램을 거쳐간 수십 명의 피디들 가운데 그와 싸우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데 갈등의 시작은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윤춘호 취재파일용-송해 평전 사진

남녀노소, 국경과 민족을 넘어서 그는 모든 사람의 오빠, 형이 된다. 여덟 살 아이가 구순이 넘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꺼이 모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밥이 되기를 자청한다.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그는 행복해한다. 그의 이런 모습을 매주 일요일 낮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32년째 지켜본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다소 불편하거나 민망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스타킹 같은 것을 그에게 뒤집어 씌우거나 지방 특산물이라며 뭘 억지로 그에게 먹이는 모습 같은 거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즐긴다. 어떤 때는 견뎌내는 것처럼 보인다. 웃으면서 말이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무대에서 어떻게 한번 웃겨보려고 몇 날 며칠 고민해서 하는 일 아니겠느냐고, 그런데 내가 그것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무안하고 민망하겠느냐고.

그 말은 화려한 무대의 한 귀퉁이에 외롭게 서있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유명 코미디언과 콤비로 활약할 때 상대방이 자기 말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고 자신만이 돋보이려고 할 때 힘들었다고.

그가 진행을 맡은 프로그램에서는 특별석이란 것이 없다. 언젠가 군청 관계자가 군수님과 지역구 의원을 위한 특별석을 마련한 것을 보고 그가 노발대발했다. 군수면 군수고 국회의원이면 국회의원이지 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그 사람들만 특별한 자리에 앉아야 되느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가 특별히 호감을 갖고 있다는 한 정치인이 있다. 그 정치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지역구 행사에서 그가 특별석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악극단 시절 그는 모든 역할을 다 소화해야 했다. 춤추고 노래를 불러야 했고 연기로 사람을 울리고 웃겨야 했다. 극과 극 사이를 메꾸면서 사회도 봐야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 진행하는 프로그램 진행자로 필요한 모든 기본을 익힌 것이다.

그가 꼭 기교만을 배운 것은 아니다. 악극단 생활 이후 온갖 인간 군상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 생활이란 속고 속이는 게 다반사였다. 짐꾼 같은 허드렛일은 기본이었을 테고 가끔은 싸움꾼의 역할도 맡아야 했다. 그런 생활을 통해 만능 예능인으로 갖추어야 할 기교와 재주를 익힌 것은 물론 세상의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양쪽에 익숙해지고 단련되었다.

2014년 세월호 여파로 <전국노래자랑>이 2달 이상 결방된 적이 있다. 방송 횟수에 따라 돈을 받는 계약직 직원들의 보수가 문제가 됐다. 당장 이들에게는 생계가 걸린 문제였지만 해결이 쉽지 않았다. 이때 송해가 나섰다. 이 문제를 두고 KBS 사장과 담판을 벌인 것이다. 꼭 송해가 나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남의 어려운 사정을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특히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 역시 그의 성공 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윤춘호 취재파일용-송해 길

4. 그는 살아남아 승자가 되었다. 그의 나이 91세가 되던 해인 2018년 EBS <초대석>에 출연한 송해가 쫓기는 1등보다 쫓는 2등 입장이 좋다고, 그리고 나는 이겼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이겼다라고 말한 것은 딴따라라고 불리며 비하당했던 세상의 편견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말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있던 그의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그는 강해서 이긴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이긴 사람이 되었다.

수백 곡의 노래 가사를 외우고 무대 위에서 젊은 사람들 입이 쩍 벌어지게 순발력을 보이고 과거에 대한 기억도 선명하다. 방송 진행용 메모인 큐카드도 사용하지 않지만 진행 순서, 출연자 이름, 곡명 등을 완전히 파악한다. 대단한 기억력인데 그래도 천재 같지는 않다.

번뜩이는 재기도 그의 몫은 아닌 거 같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배삼룡과 서영춘 같은 스타들과 비교해도 그렇고 그보다 조금 늦게 나왔지만 코미디계 황제로 군림했던 이주일에 비해서도 그렇다. 어떤 때는 학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정년 퇴임한 교장선생님 같기도 하다. 실제로 3호선 종로 3가역 입구에 있는 그의 흉상을 보면 그는 연예인 같지 않다.

그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를 쓴 오민석은 송해의 2014년 이후 모습을 가장 많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찰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송해를 '근엄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사석에서는 권위적이고 남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넘친다고도 표현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송해는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너무 높아 모시기 어려운 어른, 존경 그 자체, 살아있는 전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어떤 사람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했다.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면이 있는 것이야 당연한 것일 텐데 보이지 않은 모습이 보이는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 궁금하기는 했다. 오민석이 본 근엄함, 권위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성 서사로 가득 찬 그의 인생의 이면을 말하는 것인가?

5. 연예인은 천 개의 얼굴과 천 개의 심장을 갖춘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것이 연예인의 자질, 재능이라고 불리는 요소일 테니 더 많은 얼굴과 더 많은 심장을 가졌다는 것이 연예인으로서는 장점이지 단점일 수는 없겠다. 송해도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른 얼굴을 내보이며 100년 가까운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국회 청문회에서 공직자 후보를 검증하듯 송해의 전 인생에 돋보기를 들이댄다면 지적할 일이 많을 것이다. 인터넷에는 그의 흑역사라고 할 만한 자료와 영상이 아직도 떠돌아다닌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그는 줄곧 의지할 곳 없는 이북 출신 피란민이었다. 빈곤과 억압의 긴 시간을 많은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던 '딴따라'로 살았다. 그가 살아온 시대와 역사가 온통 상처투성인데 그의 삶이 온전하고 따뜻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좌절감으로 술로 날밤을 새우며 타락도 했어요. 그래도 삶의 끈을 놓을 수 없어 이를 악물고 살았어요." <2019년 세계일보 인터뷰>

그가 말한 '좌절감'의 이유와 '타락'의 내용과 삶의 끈을 놓고 싶었던 순간순간을 그에게 꼼꼼히 묻고 추적하고 검증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한국 현대사가 될 것인데 그 욕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는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방송을 보다가 마음이 숙연해질 때가 있다. 그가 노구를 이끌고 봉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다. 2천 원짜리 국밥, 4천 원짜리 백반을 먹고 5천 원짜리 이발을 하는 그를 보면서 희망을 보는 것이다.

나이와 인격이 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주위를 조금만 둘러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나이에 비례해서 불혹(不惑)하고 지천명(知天命) 하고 이순(耳順)하는 것은 공자님 같은 분이나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싶다. 나이 들수록 잘 삐치고 욕심은 사나워지고 자기 분수 모른다. 젊음이 자랑이 아니듯 나이 든 것이 위세 부릴 일은 아닐 것인데 나이 많은 것을 무기인 양 내세우는 이들이 없지 않다.

그런데 나이 들면 넉넉해지고 여유로워지고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송해는 몸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혹독한 시간의 강을 건너면서 상처 받고 일그러지고 날카로워지기 십상이지만 저렇게 둥글고 넉넉해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94살 청년에게서 보는 것이다. 40-50대 중장년 시절 그의 사진을 보면 표정은 어둡고 우울하다. 삶의 그늘이 짙고 밝은 기운을 느끼기 어렵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송해 얼굴은 넉넉하고 훤하다. 사람이 나이 들어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얼굴은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란 것을 잘 안다. 특별한 사람들도 알고 보면 뭐 그리 특별한 거 없다는 것을 그는 경험에서 잘 안다. 그는 특별하게 굴지도 않고- 대중목욕탕 가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대중식당 애용하는 것- 특별한 대우도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가 특별하게 대우하려는 사람들도 없는 듯하다. 그의 눈에는 그의 프로그램을 빛내주는 출연자들과 관객들만이 특별할 뿐이다.

의전 서열이란 것이 있다. 행사를 치를 때 우선적으로 대우하는 인물의 순서 같은 것이다. 법에 따른 의전 서열 1위는 대통령이지만, 우리 국민들이 마음으로 정하는 의전 서열이 있다면 송해가 1위가 아닐까. 그가 국민 의전 서열 1위가 된다면 그를 오빠,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그의 둥근 몸이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그는 굳이 그런 자리를 고집할 것만 같다.

덧붙임> 이 글은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 저자인 단국대 오민석 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취재는 물론 귀한 사진까지 제공해준 오민석 교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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