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인-잇] '아프면 쉬기' 누군가는 생존을 포기하는 일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이 유명한 말은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굶주린 시민들의 '빵이 없다'는 호소를 들은 뒤 내뱉은 망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악의적으로 퍼트린 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이 말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개념 없이 던지는 이야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사진=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스틸컷)

#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다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모든 시민들이 안타깝게 발을 동동 구르던 2014년 4월 16일, 구조의 선봉장 역할을 맡아야 했던 대통령이 오후 5시 15분에야 중앙대책본부에 도착하여 던진 이 말은 우리 기억 속에 오롯이 남아 있다. 이 말은 악의적인 소문이 아니라 국민 모두 TV 생중계를 통해 확인한 것이기에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7시간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불거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채 개념 없이 던지는 말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임금을 그렇게 받지 못했으면 다른 사업장으로 옮기면 될 것을…"

이주노동자가 4년 8개월 동안 경기도 이천의 한 농장에서 일했는데 무려 3년 넘게 임금을 떼였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최근 한 방송사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그 뉴스가 보도된 그날 밤, 외국인근로자 고용허가를 담당하는 부서인 고용노동부 외국인력담당관실의 공무원이 해당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필자에게 다급히 연락을 해 위와 같은 말을 던졌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과연 적절했던 것인가?

이주노동자는 사업주의 동의가 없는 한 원칙적으로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하다. 임금체불 피해를 당한 경우 무조건 사업장 변경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일정한 요건을 충족해야만 가능한데 이주노동자가 이 조건을 명확히 이해하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사업주는 이주노동자를, 마치 노예와 같이 예속된 존재로 대우하고, 이주노동자는 그런 비인격적인 대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현실이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력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의 공무원이 던진 앞선 이야기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을..."이라는 개념 없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담당 공무원은, 다른 사업장으로 옮길 수 있는 시도를 하지 못한 채 그곳에서 무려 3년 넘게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는 피해가 왜 발생했는지를 철저히 분석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의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임금을 그렇게 못 받았으면 다른 사업장으로 가지" 피해자를 두 번 울리는 말...

결국 많은 시민들이 분노한 이 보도 이후 고용노동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주무부처의 이런 미숙하고 성의 없는 상황 파악이 이주노동자의 피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유일 것이다.

# "아프면 쉬면 될 것을…"

쿠팡 물류센터에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 5월 28일 박능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차장(보건복지부 장관)은 회의에서 "부천 쿠팡 물류센터에서 '아프면 쉬기'와 같은 직장 내 방역수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코로나 19가 발생한 이후 '아프면 쉬기'라는 아주 당연한 말이, 방역수칙으로 선포되었다. 그런데 물류센터 직원들 대부분은 불안정 노동자였다.

오늘의 생계를 위해, 내일의 노동을 위해 아파도 그 자리를 지켜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아프면 쉬기'와 같은 방역수칙은 생존을 포기해야만 지킬 수 있는 사치일 뿐이다.

1년에 60일 정도 유급병가를 쓸 수 있는 공무원에게는 아파도 쉬지 않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방역수칙을 준수하지 않는 개념 없는 시민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는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말만 던지는 개념 없는 공무원으로 여겨질 뿐이다.

박능후 "쿠팡, '아프면 쉬기'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프면 쉬기, 말처럼 쉽지가 않다.

노동의 최소한 기준을 정해놓은 근로기준법에는 업무상 부상 또는 질병에 대한 규정만 있을 뿐 개인적인 부상 또는 질병으로 인한 병가와 관련한 그 어떠한 기준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 '아프면 쉬기'라는, 대다수 시민들이 지키기 힘든 방역수칙을 내세워 이를 준수하지 못한 시민들을 탓하기에 앞서, 시민들이 '아프면 쉬기'와 같은 상식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할 의무를 국가는 다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여러 말들이 난무한다. 그 말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고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그 말을 던질 때는 신중해야 하고 시민들을 향한 공무원의 말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을 섬기는 것이 본연의 역할인 공무원들이, 시민들에게 하는 말들이 지금보다 더 '개·념·충·만'하길 기원해본다.

인잇 네임카드 최정규

#인-잇 #인잇 #최정규 #상식을위한투쟁

# 본 글과 함께 생각해 볼 '인-잇', 지금 만나보세요.

[인-잇] 내 목숨은 정말 돈보다 위에 있을까
[인-잇] 경비원의 죽음, 엄벌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