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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그 노래만 들으면 눈물"…음악이라는 타임머신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만 들으면 눈물 흘리는 이유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이 음악만 들으면 잊고 지냈던 과거의 장면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 돌아옵니다. 저에게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가 그런 음악입니다. 이 곡만 들으면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2013년 봄, 저는 암 투병 중인 아버지를 위해 병상에서 음악을 틀어드리곤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저는 아버지가 평소 좋아하시던 노래들을 틀어드리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칸초네, 오페라 아리아, 팝송, 가요…… 장르를 가리지 않았죠. 그런데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틀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힘겹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구노냐?"

처음에는 뭐라고 말씀하신 건지 제대로 못 들었어요. 다시 여쭤보니, 아버지는 "구노냐고?" 하셨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슈베르트도, 구노도, 아베 마리아를 작곡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베 마리아'가 흘러나오면 이게 구노인지 슈베르트인지 헷갈리곤 했었어요. 그때는 저한테 헷갈리지 말라고 하셨던 아버지가 이 '아베 마리아'가 구노가 작곡한 아베 마리아인지 슈베르트가 작곡한 아베 마리아인지 묻고 계셨던 겁니다. '슈베르트예요' 하고 대답하고는 저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버지도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함께 조용히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게 제가 의식이 남아있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함께 한 대화였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이후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가 며칠 만에 숨을 거두셨어요. 장례식장에서도 저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계속 틀었습니다. 아버지가 듣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사진=유튜브 캡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1994년 3테너 LA콘서트 실황]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후, 예술의전당에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듀오 공연이 열렸습니다. 한동안 공연을 보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두 젊은 아티스트의 공연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어 공연장에 갔습니다. 공연은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앙코르 무대에서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두 사람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연주하기 시작한 겁니다. 몇 소절 듣기도 전에 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 '아베 마리아' 선율을 타고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있는 객석이라 참아보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하지 않고 그냥 음악에 나 자신을 맡겼어요. 아버지를 다시 추억하는 시간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고 할까요. 눈물을 줄줄 흘리고 나니 마음이 다시 말갛게, 가벼워졌습니다.

지난해 어버이날을 앞두고 소프라노 조수미 씨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수미 씨가 인터뷰에서 2006년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귀국해서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만류해서 파리에서 예정돼 있던 샤틀레 극장의 독창회를 그대로 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어머니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네가 파리에서 관객과 약속을 지키며 공연하는 걸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했다지요.
소프라노 조수미 (사진=유튜브 캡처)
조수미 씨의 당시 공연 실황을 찾아보다가 저는 또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만났습니다. 조수미 씨는 이 공연 앙코르곡으로 '아베 마리아'를 불렀습니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공연했다는 사연도 관객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고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조수미 씨의 눈시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저에게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곡이었으니까요.

[▶조수미 2006년 파리 샤틀레 극장 공연 실황 중 '아베 마리아']
(앞에서 1분 30초까지는 조수미 씨가 관객들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대신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서 노래한다, 이 노래를 아버지에게 바친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용재오닐명지병원
지난주 리처드 용재 오닐이 한국에 왔습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은 한국에서 공연하기 위해 입국 후 2주간의 격리 기간을 보냈습니다. 격리가 풀리자마자 찾은 곳이 코로나19 병동이 있는 고양시 명지병원이었어요. 그는 코로나19로 헌신하는 위료진을 위로하고 싶다며 병원 로비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이 음악회 취재를 위해 병원에 갔다가 돌아가신 지 7년이 지난 아버지의 기억과 다시 맞닥뜨렸습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연주한 겁니다.

리처드 용재 오닐 자신도 몇 달 만에 관객 앞에서 처음 연주하는 데다, 연주 장소가 병원이라는 것에 특별한 감회를 느낀 듯했습니다.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 전쟁고아였던 그의 어머니는 지금 암 투병 중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도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며, 환자를 보살피는 의료진의 헌신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모든 곡이 다 그랬지만, 그가 연주한 '아베 마리아'는 정말 절절한 울림으로,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아. 이번에도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는 병원 로비에 서 있었지만, 제 기억은 7년 전 아버지의 병상 옆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이제 정말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는 아버지의 기억과 뗄 수 없는 곡이 되어버린 겁니다. 게다가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한 명지병원은 아버지 생전에 몇 차례 입원했던 적이 있어서 자주 드나들었던 병원이라 느낌이 더욱 사무쳤습니다.
용재오닐명지병원
공연이 끝난 후 잠시 리처드 용재 오닐과 인사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왜 눈물 흘렸는지 듣더니 따뜻하게 공감해줘서 고마웠습니다. 개인적인 기억으로 눈물을 쏟아서 좀 쑥스러웠지만, 덕분에 바쁜 일상 속에 희미하게 기억 밑으로 가라앉아가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새롭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베 마리아'는 그래서 저에게 아버지의 부재를 상기시켜 주는 슬픈 곡이면서, 또 희미해지는 아버지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고마운 곡이기도 합니다. 음악만 들으면 생각 나는 그리운 사람! 과거의 기억을 순식간에 현재로 소환하는 음악의 힘! 여러분도 이런 사연이 있는 음악이 있나요? 어떤 음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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