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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부하 업무 하나하나 챙겨주던 상사입니다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매일매일 바쁜 나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업무를 시작했다. 결재함을 열어보니 본사에서 보류한 문서 5건이 아직도 그대로다. "아니 이거 왜 아직까지 그대로야, 빨리 본사한테 설명을 하고 진행을 시키든가 했어야지" 가슴이 답답했다. "에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더 빠르겠다" 끝내 참지 못하고 건 별로 해당 팀장 혹은 담당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해결했다.

'딸깍' 메일함을 눌러봤다. 새 메일이 잔뜩 도착했다. 한 번 쓱- 본 뒤, 좀 더 자세히 살피던 중 '독촉'이라는 제목의 메일이 눈에 띄었다. 열어보니 본사에서 자료를 제출하라는 메일이다. "벌써 3번째 요청 온 거잖아, 어렵지도 않은 걸 왜 회신을 안 한 거야" 또 그냥 내가 처리했다.

'똑똑' 그때 판매팀장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다음 주 사업부와 회의할 자료를 검토해 달라고 한다. 내용이 부실해서 좀 짜증이 솟구쳤는데, 아니 이 친구, 불난 데 부채질을 한다.

"이 항목은 취합이 되지 않습니다. 협조를 안 해 줘서요. 각 지점에 한 마디씩 해 주세요"

'지가 할 일을 왜 나한테 시켜'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래요? 뭔가 어려움이 있나 보네요"라고 말해주고선 바로 그 자리에서 지점장들에게 연락을 돌려 회의 자료 파일을 넘겨 달라 했다. 그러는 사이 벌써 몇 시간이 훅 지나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도 좀 돌리고 두 손도 위로 쭉 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일을 하려 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 경북지사장님, 웬일이세요?"

"그냥, 잘 지내시나 해서요."

"고맙습니다, 근데 요즘 한가하신가 봐요? 난 바빠 죽겠어요."

"왜요? 요즘 별 문제없잖아요, 뭐 큰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런데 챙길 일이 많네요."

"어휴, 하나하나 본인이 다 하려니까 바쁘지."

"안 그럴 수가 있나요? 몇몇 지점장님들은 일이 서툴고... 또 다들 바쁘시잖아요."

"그렇다고 그걸 혼자 다 커버해요? 선의가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있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업무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마음이 심란해지더니 '내가 관리자로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었나'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이상하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내가 왜 보류된 문서를 풀어줘야 하지?
내가 왜 담당자가 회신해도 될 메일도 대신해주지?


이 물음에 머릿속에서 많은 문답이 빠르게 오간다.

<좋은 마음>은 이렇게 대답한다.

"당연히 네가 도와줘야지. 봐봐, 지방 지점장들은 '현장 무끼'들이라서 본사 팀장들, 인원들이랑 대화가 안 된다고. 또 일반 직원들은 지금 자기 업무만으로도 일이 많아서 허덕거리잖아. 판매팀장도 아직 신참이라 자기 말발이 안 먹히니 심적으로 힘들겠지. 그러니 네가 모른 척하면 되겠어?"

** 현장 무끼 : 사무직보다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는 뜻의 일본어. 순화해야하지만 여전히 많은 회사들에서 쓰이는 표현으로 글쓴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놓아 둠 (편집자주)

<나쁜 마음>은 곧바로 이렇게 반박한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하도록 내버려 둬야지. 너는 저만할 때 죽도록 일만 했잖아. 뒷짐만 지고 있던 팀장들 때문에 생고생한 걸 생각해 봐. 지금 얘들은 진짜 편하게 일하는 거야. 네가 왜 그런 멍에를 다 지려고 하니?"

둘 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난 좋은 마음이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고 믿어왔다. 능력과 일손이 부족해서 힘들어하는 직원들을 위해 내가 거드는 게 당연한 거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직원들과 다 같이 식사를 하는데 TV에서 뉴스가 나온다. "아빠 찬스" 어쩌고 저쩌고 한다. 뉴스를 보던 직원들은 욕을 해댔다. 잠자코 들어보니 부러움이 섞인 욕이었다.

다시 사무실, 점심식사 때 어깨너머 들은 '아빠 찬스'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빠 찬스요? 좋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이에겐 해롭습니다. 왜냐고요? '아빠 찬스'를 자주 맛 본 아이는 정말 더 중요한 자신만의 찬스를 놓치는 거니까요."

갑자기 언젠가 들었던 한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자꾸 받는 삶은 변덕스러운 운명이 갑자기 자신을 낭떠러지로 몰고 갈 때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을 강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대부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재기도 못하죠. 결국 '다른 누군가의 찬스'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자생력 찬스'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병아리 시절, "네가 알아서 해"라던 직장 선배들, 그들 덕분에 나는 고통스러웠지만 사실 일도 많이 배웠다. 옛날이 좋다는 말은 아니고 단지 그냥 내던져 놓는 것도 우리네 능력개발의 한 방법이었던 것. 그렇다면 오늘날 나는? 혹시 너무 도와줘서 그들의 성장기회를 뺏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다른 누군가의 찬스'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자생력 찬스'를 잃어버리게 합니다."

너무 나서도 문제, 너무 뒷짐 지고 바라만 봐도 문제다. 내가 나설 때와 나서지 않아야 할 때, 나에게 있어선 지금 그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능력을 길러야 할 때다.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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