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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칼럼계의 아이돌이 돌아왔다…내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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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40 : 칼럼계의 아이돌이 돌아왔다…내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 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 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어느새 5월, 시리고 혹독했던 3월과 4월을 지나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지만 봄이 오긴 왔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조금은 완화됐지요.

논어 읽기 딱 좋은 시절입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그걸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이 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오랜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제가 기억하는 건 딱 이 두 문장뿐이지만… 오랜만에 읊어보니 뭔가 상쾌한 기분이 드네요.

일찍이 전설의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쓰고, 북적북적에서도 읽은 바 있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출간했던 김영민 교수님의 논어 에세이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이번 주 북적북적의 선택입니다.

"[논어]에 담긴 생각은 이미 죽었다. [논어]의 언명은 수천 년 전에 발화된 것들이고, 그 발화자와 청중은 오래전에 죽었으며, 그 언명에 원래 의미를 부여하던 맥락들 역시 역사적 조건이 변화하면서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러한 [논어]의 내용을 살아 있는 고전의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논어]와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오랜 시간과 맥락의 간극을 무시하는 일이다. 과거의 고전을 사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와 연애를 하는 일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죽은 생각의 시체가 오늘날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상사의 역설은 어떤 생각이 과거에 죽었다는 사실을 냉정히 인정함을 통해 비로소 무엇인가 그 무덤에서 부활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과거에 이미 죽은 생각은 [논어]라는 텍스트에 묻혀 있고, 그 텍스트의 위상을 알려면 [논어]의 언명이 존재했던 과거의 역사적 조건과 담론의 장이라는 보다 넓은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


"그는 마침 연애 중이어서, 상대의 말 한마디 한마디, 연애편지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정신을 집중하고 그 의미를 캐고 있던 참이었다. 침묵도 일종의 발화임을 깨달은 그는 문득 깨닫게 된다. 왜 내 연인은 지난 2년 연애하는 동안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왜 사랑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침묵했지? 어떤 사안에 대한 집요한 침묵이 있었다고 할 때, 혹은 발화가 예상되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침묵이 흘렀다고 할 때, 그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휴지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심각한 해석을 요청하는 심오한 '발화'가 되는 것이다."



"추석이 되면 송편에 대한 이념 투쟁이 격화된다. 송편이 먹고 싶다! 일 년 동안 송편을 찾지 않다가 갑자기 송편이 없으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송편을 타도하라! 그에 맞서 송편 자체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혁명가들이 나타난다. 송편이 그렇게 좋은 음식이면 평소에 김치와 함께 먹으란 말이야! 하고 외친다…. 그리고 꿀송편 중독자 대 콩송편 중독자의 해묵은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이때, 보다 효과적으로 명절 음식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기존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보다는, 관행을 인정하면서 우회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온건 개혁파가 등장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송편에 고기를 넣자고 제안한다… 관행과 정면충돌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정도 다양성은 허용된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고기 송편이 기존 질서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난 것으로 드러난다… 급기야는 사람들은 송편과 만두를 혼동하기 시작하고, 결국 송편이라는 범주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과거의 특정 문화, 전통 혹은 텍스트를 너무 성급하게 혐오하면, 그 혐오로 인해 그 혐오의 대상을 냉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혐오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 문화를 너무 성급하게 애호하면, 그 애호로 인해 그 애호의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애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급한 혐오와 애호 양자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 설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논어 에세이가 서 있고 싶었던 지점도 그러한 지점이었다."


한글이라는 축복 덕분에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하지만 문해력, 리터러시는 그렇지 않다고들 합니다. 원문을 읽지 않고 댓글 달거나 의견 말하는 것은 흔하고 마음대로 오독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잘 쓰는 게 우선이긴 한데 때로는 잘 읽는 게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런 시대, 텍스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그를 위한 이 시대의 텍스트로 2천 년 전 [논어]를 소환한 김영민 교수의 역설이 흥미롭습니다. 의도된 침묵, 침묵의 맥락마저 읽어내야 한다는 건 언뜻 사치 같기도 합니다만 크게 공감 갑니다.

이 책은 논어 에세이지만, 각 장의 글에 논어가 등장하는 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김 교수는 이 책을 시작으로 '논어 프로젝트'를 본격 시작하는데 논어 번역 비평, 논어 해설, 그리고 논어 새 번역까지 이어가는 프로젝트의 초대장 격인 게 이 논어 에세이라고 합니다. 부디 그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저도 그중 일부라도 읽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출판사 사회평론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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