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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조 효자종목' 복싱, 이 악물었다

이것이 도쿄올림픽 ⑨

대한민국 선수단이 태극기를 달고 처음 출전한 하계올림픽은 1948년 런던올림픽이었습니다.
67명의 선수단은 정부가 수립되기 약 2개월 전인 그해 6월 21일 오전 8시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습니다. 이틀 뒤인 23일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 후쿠오카로 건너간 선수단은 다음날 특별열차 편으로 요코하마로 이동했습니다. 이어 여객선을 이용해 중국 상하이를 거쳐 7월 2일 홍콩에 도착했습니다.
 
홍콩에서 탑승한 비행기는 노르웨이 국적의 프로펠러기. 탑승 정원이 40명이어서 1진이 7월 4일, 2진은 7월 7일에 출발했는데 비행기는 태국 방콕과 인도의 콜카타와 뭄바이를 거친 뒤 바그다드(이라크), 카이로(이집트), 로마(이탈리아)를 경유했습니다. 우리 선수단 2진이 대회 장소인 런던에 도착한 때는 7월 11일 저녁이었습니다.
 
무려 21일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선수들은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빠졌습니다. 축구는 스웨덴에 12대 0으로 대패했고, 메달 유망주로 꼽혔던 마라톤의 최윤칠은 37km 지점까지 선두를 달리다 다리 경련이 일어나 기권하고 말았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한국 복싱은 투혼을 불살랐습니다. 플라이급의 한수안이 동메달을 차지해 역도 김성집과 함께 대한민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거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이후 무려 72년이 지난 2020년, 한수안 선생의 후배들인 현 복싱대표팀은 다른 이유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습니다. 애초 도쿄올림픽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은 지난 2월 3일부터 중국 우한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우리 선수단은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대비 훈련을 하며 2월 3일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컨디션과 바이오리듬도 이날을 목표로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 사태로 개최지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에서 중동의 요르단 암만으로 변경됐고 대회 기간도 3월 3일로 1개월이나 연기됐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르단 정부에서 지난 23일(현지 시간) 한국인 입국 금지 방침을 밝히면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다행히 대한복싱협회가 IOC 복싱 TF팀, 요르단올림픽위원회와 긴밀한 협의 끝에 조건부 입국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코로나19 검사 결과 음성이 나오면 요르단에 입국할 수 있다는 말에 대표팀은 서둘러 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전원 '음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음을 졸였던 대표팀이 안도한 것도 잠시였습니다. 지난 25일 출국 직전에 출국 항공편인 카타르 항공에서 탑승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주한 요르단 대사관에서 한국 복싱 대표팀의 입국 허가 공문을 카타르 항공에 제출하면서 가까스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환승지인 카타르 도하 공항에서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속을 담당하던 직원이 “연락받은 게 없다”며 탑승권을 한동안 주지 않았습니다. 대한복싱협회는 급히 요르단 대사관 등 관계 기관에 연락했고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은 탑승 마감 시간 10분을 남기고 간신히 요르단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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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오 취재파일용
우리 대표팀은 이번 예선에 남자 8명, 여자 5명 등 13명이 출전하는데 남자 4체급, 여자 2체급 합쳐 모두 6장의 티켓을 노리고 있습니다. 1948년 한수안 선배처럼 대회도 하기 전에 진이 다 빠졌지만 도쿄올림픽 출전을 위해서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남자 복싱 중량급의 간판인 김형규(91㎏급)는 “우리 선수들 모두 정말로 열심히 훈련했다. 4년간 준비했는데, 대회 자체를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후회 없이 하고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함상명 선수
지난 리우올림픽에 남녀 선수 통틀어 유일하게 출전했던 함상명(57㎏급)의 각오도 남다릅니다. 한국 복싱은 1948년 첫 올림픽 참가 이후 동서냉전으로 불참한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제외하고 68년 만에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할 위기를 맞았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올림픽 선발전을 통과한 선수 중 한 명이 도핑에 걸리는 바람에 함상명이 극적으로 리우 올림픽 티켓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함상명은 이번엔 자력으로 출전권을 따낸 뒤 도쿄올림픽에서 메달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분골쇄신’(粉骨碎身)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연지 선수
여자 복싱의 간판 오연지(60㎏급)는 사상 첫 출전에, 첫 금메달이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여자 복싱은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처음 도입됐는데 한국 여자복싱은 2012년 런던과 2016년 리우에 단 1명도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유일하게 금메달을 따냈던 오연지는 4년 전 리우올림픽 출전 좌절의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내고 도쿄에서 신화를 쓰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정주형 선수
 여자 51㎏급의 정주형은 가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정주형은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 가수로 데뷔해 음반도 낸 발라드 가수입니다. 2017년 10월 생활체육으로 복싱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아 복싱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는데 처음 나서는 국제대회에서 올림픽 티켓을 거머쥐는 기적까지 연출할지 주목됩니다.
 
한국 복싱은 ‘원조 효자종목’이었습니다. 1948년 한수안이 첫 동메달을 차지한 이후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 첫 은메달을 따낸 종목도 복싱이었습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밴텀급의 송순천이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동독 선수에 판정으로 져 금메달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이어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정신조가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대망의 복싱 올림픽 첫 금메달은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한 신준섭이 거머쥐었습니다. 결승에서 홈링의 이점을 안고 있던 미국의 버질 힐을 판정으로 꺾고 시상대 맨 위에 섰습니다. 이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김광선(플라이급)과 박시헌(라이트미들급)이 금메달 2개를 따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은메달 1개를 획득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노메달 수모를 겪었지만 2004년 아테네에서 동메달 2개, 2008년 베이징에서 동메달 1개, 2012년 런던에서 은메달 1개를 수확했습니다.
 
리우에서 단 1명의 선수만 출전해 메달을 따지 못했던 한국복싱은 도쿄에서 명예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출발점은 물론 이번 요르단 암만에서 열리는 올림픽 예선전입니다. 우리 대표팀은 진천선수촌 훈련장에 ‘불광불급’(不狂不及), 즉 '어떤 일을 할 때 미치광이처럼 하지 않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플래카드를 걸고 굵은 땀을 흘려왔습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결전지 요르단 암만에 입성한 복싱 대표팀은 이제 나흘 뒤인 3월 3일부터 새로운 신화 도전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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