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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행복은 여기, 이미 당신 곁에 있네요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음... 검사 결과가... 잠시만요

평소에 내가 늘 하던 멘트였지만, 그날은 듣는 입장으로 대학병원 진료실에 앉아있었다.

'딸깍딸깍' 교수님의 마우스 클릭 소리에 내 가슴도 조여들어가던 그때,

"다행히 면역 체계가 건강하네요. 항암제 안 써도 되겠어요. 여기 오시는 분들은 죽음을 앞에 둔 분들이에요. 천만 원이든, 일억이든 필요하면 그 날 바로 쓰기 시작해야 되거든요. 환자 분은 괜찮아요."

1분 만에 끝나려는 진료의 끝을 잡고 물었다.

"많이 피곤해서 일시적으로 생긴 걸까요?"

"몰라요. 피곤해서 생긴 거라면 저희처럼 흰 가운 입은 사람들은 못 살아남겠죠. 증상이 왜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괜찮아요. 기분 좋게 나가시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실은 나도 이 병원 출신의 흰 가운 입는 사람이라고, 또 더 묻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피로에 가득 찬 교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지난 몇 달간 걱정해오던 질병이 없다는데, 무얼 더 바랄 게 있나. 교수님 말대로 그저 기분이 좋았다. 그날따라 햇살도 더 따스하고, 공기도 유난히 상쾌했다.


햇살도 유난히 따사로웠던 그날의 기억

그런데 내게 이런 날이 또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년 전에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중 마지막 3년차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들어있다는 것을. 2cm 길이의 그것이 무엇일지 그때는 너무나 두려웠고 대학병원 예약일까지 정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뇌종양이라면 수술할 수 있을까?
수술한다면 이후에 정신과 의사로서 정상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혹시 수술할 수 없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아이들은 나중에 날 기억할까?


나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겨우 잠든 후에도 악몽에 시달렸다.

생애 최고의 불안 속에 찾은 병원에선 다행히 선천적인 것이고 치료 방법은 없으나, 그냥 가지고 살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군 면제 대상이었다는 사실 역시 꽤 충격적이었지만 군의관으로 지낸 시간이 억울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크지 않았다.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마냥 행복했다. 없어질 것 같던 미래가 다시 생겼는데, 그깟 지나간 시간 정도야 뭘.

그 날 진료실을 나오면서 스스로에게 분명히 다짐했다. 하루하루를 아끼고 소중하게 살겠다고. 내게 주어진 일상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겠다고.

그렇게 평생 잊지 않고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던 그때의 다짐은 바쁜 일상 속에 조용히 묻혀 갔고, 비슷한 일을 또 겪고 나서야 이제 떠오른 것이다.

자신에게 없는 것들만 바라보며 우울해하는 내담자들에게 나는 가진 것들도 바라보자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그것들에 감사하는 연습을 하자고 수없이 말해왔으면서 말이다.

나는 분명 가진 게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당신은 가진 게 많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두 사람의 말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의 저자이자 세계 첫 시각장애 재무분석사인 신순규 씨, 그리고 사고로 척수를 다쳐 전신마비가 온 유튜브 '위라클' 운영자 박위 씨다.

(볼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커다란 축복이다. 비록 나는 앞을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불행으로 여겼던 건 몇 번 되지 않는다. -중략-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는 그녀에게 볼 수 있는 날이 사흘만 주어지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수필을 썼다고 한다. 보면서도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이 수필을 읽었을 때, 나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사흘은 너무 길지 않는가! 내가 정말 보고 싶은 것은 하루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자는 아이의 얼굴과 몸, 자세와 표정 등을 사진 찍듯 머릿속에 세세히 담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 신순규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 중에서


예전에는 무조건 일어서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일어서지 않더라도 그게 저한테 큰 의미를 주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사고 이후 오히려 제 인생이 훨씬 풍성해졌다고 느끼거든요. 이렇게 숨 쉬고 있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는 당연한 일상 그 자체로 기적 같아요. 이 정도면 이미 일어난 것 아닐까요?

– 박위 씨의 한겨레 신문 인터뷰 중에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눈으로 보고, 두 발로 걸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우리는 이 축복과 기적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 일상의 순간순간에는 축복과 기적이 숨어 있다. 이 숨은 것들을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만성적으로 우울한 사람들에게 드리는 숙제들 중 가장 가치 있게 느껴지는 것이 '감사일기' 적어 보기다. 매일 단 세 개씩만 감사할 일을 적어 보기. 생각보다 정말 많은 분들이 세 가지를 찾아내지 못한다. 내 삶은 완전히 지옥이라 아무 감사할 일이 없으며, 이런 장난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실행에 옮기길 거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적과 행복은 여기, 이미 당신 곁에 있네요

하지만 정말 감사한 세 가지가 없을까? 신순규 씨나 박위 씨가 그들의 삶에 들어간다면 하루에도 300개는 감사할 일을 찾고 행복을 느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건강하게 일어선 것, 분명 그 자체로 감사할 일 아닌가. 어떠한 삶에도, 어떠한 날에도 감사할 것 세 가지는 있다. 눈 뜨고서도 보지 못했던 것들, 숨어 있는 그것들을 찾아보는 일은 분명 당신의 삶을 덜 우울하게 만들 것이다.

글이 마무리되는 이 순간 몇 가지 감사할 일들을 떠올려 본다. 매번 부족한 내 글을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실어주는 인-잇에 감사하다. 감사하다고 댓글을 남겨 주시는 분들께도 정말 감사하다. 이 글이 읽는 분들의 삶에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들을 늘어나게 만든다면 더없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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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시즌 2 엔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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