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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어딘가 있을 '또 다른 봉준호', 결국은 안목이다

Max | 라이프.저널리즘<br>저널리스트. '비디오머그' 제작자, 팟캐스트 '책영사(책과 영화사이)' 진행

1998년 2월 5일, 입춘 다음날이었다. 회사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통신사 연결망에 그날 새벽 서울 명륜동 한 가정집에 불이 나 70대와 60대 노부부가 숨졌다는 단신 기사가 떴다.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78세 김기영. '혹시 영화감독, 그 김기영?' 기사에 따르면 김 씨는 "불로 인한 연기에 질식해 숨졌고, 불은 한옥 내부 20여 평을 태우고 2천여만 원의 재산 피해를 낸 뒤 30여분 만에 꺼졌고 경찰은 전기 누전 가능성 등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이었다.

오비추어리(obituary) 즉, 부고 기사가 아니라 마치 화재 사건사고 기사처럼 '처리'된 그 기사를 보고 생경했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 이 불의의 사고 1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리며 다시 주목받기 시작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막 재평가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 때이긴 했지만(사고 며칠 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특별전이 예정돼 있었다) 영화 관계자나 팬들 정도가 김기영 감독을 알았지 일반 대중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었다.

영화 '하녀' 김기영 감독의 생전 모습
당시의 나도 그가 한국 영화사에서 대단히 독창적이고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감독으로서 그렇게 사건사고 단신으로 처리될 인물이 아니란 것 정도만 알았고 해당 취재부서도 아니었던 터라 적극적으로 부고 기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걸 알아보고 한번 써보자고 동의해줄 데스크나 동료를 찾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검색해보니 당일 저녁 타 방송사에서 부고 리포트가 나왔으나 이 역시 김 감독을 제대로 평가한 부고 기사라기 보다는 의례적으로 처리한 기색이 역력한 기사였다.) 그렇게 김기영 감독은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는 더 멀어져 갔다.

봉준호 감독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한국인이 되었다. 봉준호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공개적으로 리스펙을 날린 거장 '마티'(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애칭)가 바로 김기영의 팬이자 김 감독의 영화 '하녀' 복원의 후원자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돼 흥미롭다. 마티가 이끌었던 세계영화재단 후원으로 '하녀'가 디지털 리마스터링돼 김기영 감독 타계 10주기를 맞아 지난 2008년 칸영화제의 '칸 클래식' 부문에 처음 공개됐던 것이다. 봉 감독 역시 자신이 김기영 감독의 팬임을 줄곧 밝혀왔다.

영화 '하녀'의 한 장면

“ 김기영 감독 영화에 완전히 광분해서 그걸 홈비디오 테이프에 전부 녹화를 떴거든요. '하녀' '충녀' '이어도' '육식동물'... 김기영 감독이 살아계셨다면 제 영화 '기생충'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안타깝게 98년도에 화재로 돌아가셨어요.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7/2019060701215.html )

왼쪽부터 봉준호 감독 - 故 김기영 감독 - 마틴 스콜세지 감독
우리는 잘 몰랐다. 마틴 스콜세지도 알았던 것을. 그렇게 우리 안의 천재와 독창성과 소프트파워의 가능성을 더 싹 틔워주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걸 알아주기엔 너무 먹고살기에 바빴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문화 약소국(?)에서 많은 재능들과 창조력, 도전정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라져갔을 것이다. (하드파워나 소프트파워 모두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는 현실에서 설사 우리가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더 큰 주목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긴 하다.)

물론 소수의 눈 밝고 관심 있는 사람은 주목했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 봉준호고 마틴 스콜세지일 것이다. 국제영화계에서 봉 감독을 알아본 사람은 봉 감독 스스로도 밝혔듯이 '쿠엔틴 형님'(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인거고. 심미안과 안목이 있는 나라가 문화 강국이고 문화 선진국이다.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의 수상 이튿날 몇몇 신문에 칼럼을 쓰는 코드미디어디렉터 박상현 씨는 자신의 페북에 '기생충 빙고 게임'이라며 '한국적 문화 부흥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올렸다.

1. 언론사 "제2의 봉준호를 길러내야" 사설
2. 문체부 "한국영화 제2의 케이팝으로 키운다"
3. 교육부 "영화 특기생 제도 만든다"
4. 국회 "봉준호 키드 육성을 위한 특별법 추진"


실제로 일부 신문들은 사설에서 1번과 비슷한 사설을 썼고, 어제는 어떤 지자체에서 봉준호 거리를 만든다는 둥, 또 어떤 총선 예비 후보는 봉준호 기념관과 생가터를 복원한다는 둥, 기생충 조형물을 설치하겠다는 둥 기염을 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사업이 전시성,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지자체는 "00지역을 영상문화의 성지로 만들고 싶다"는데 그런 사업이 결국 'UBD'같은 결말로 치닫는 과정 역시 우리는 여러 차례 겪었다.

문화를 부흥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님을, 아니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문화를 부흥하는 길이다. 한국영화산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 DJ가 일찌기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멋진 원칙을 천명하지 않았던가.

안목과 심미안이 있는 나라가 문화 강국이고 문화 선진국이다. 이제 우리는 봉준호가 왜 상을 받게 됐는지 미디어의 조명 또는 개개인의 관심과 취향, 소양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큰 관심을 갖고 그를 지켜볼 것이다. 그건 그만큼 우리의 문화력과 문해력이 높아지고 문화적 수준이 올라간 덕분이다. 봉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이후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이(백범일지) 화제가 된다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
“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富强)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

그런데 이렇게 아카데미상을 받아야만 높은 문화의 힘을 인정받는 건 아니다. 평소에 문화의 힘이 중요하고 - 그게 순수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문학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심지어 조직문화든 - 문화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문화국가가 될 것이다. 문화 대국, 문화 강국, 문화 선진국이란 말은 별로 필요치 않은 것 같다. 그저 '문화 국가'면 족한 느낌이 든다.

P.S 봉준호 감독의 아버지가 바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타이틀 디자이너였다고 하니 참 묘한 인연이다. 또 CJ 가 2018년 계열사인 CGV에 김기영 관을 열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게 들린다. 그런 CJ가 봉 감독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오고 이번 기생충도 제작투자 프로모션을 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안다. 세상은 운(運)이 지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인-잇 #인잇 #Max
인잇 시즌 2 엔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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