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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시계 제로' 한진그룹 그리고 '나의 투쟁(Mein Kampf)'

[취재파일] '시계 제로' 한진그룹 그리고 '나의 투쟁(Mein Kampf)'
1923년 독일 뮌헨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급진파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16명이 숨지며 혁명은 막을 내렸습니다. 혁명을 이끈 주동자는 총에 맞았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치료를 받은 뒤 교도소에 갇혔습니다. 혁명에 실패하고 어렵게 목숨을 구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집필에 몰두했고 결국 책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훗날 역사를 바꿉니다. 책 제목은 '나의 투쟁(Mein Kampf)', 저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인종차별과 전체주의 수행 계획, 세계 정복 야망까지 담은 이 책으로 히틀러는 추종자들을 다시 모집할 수 있었습니다.

● 예상 밖 성탄절 선물

성탄절을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 23일, 대한민국 재계에서도 작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조원태 회장이 공동경영 유훈을 어겼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남동생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에게 선전포고를 날린 것입니다. 조 전 사장이 밝힌 내용은 길고 복잡했지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원태 회장이 회사를 마음대로 경영하는 것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 조 전 사장은 앞서 '땅콩 회항' 사건 외에도 명품 밀수,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고용, 전 남편에 대한 특수상해 등의 혐의로 자의든 타의든 오랜 시간 법조인들의 조력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에도 순간적인 감정 폭발이 아닌 법률전문가들의 매끄러운 자문을 거쳐 남동생에게 예봉을 들이밀었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한진가 소동
그런데 더 극적인 일은 이틀 뒤 '사랑을 전하는' 성탄절에 일어났습니다. 조원태 회장이 어머니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에게 사랑 대신 '쇠꼬챙이'를 전했던 것입니다. 이 고문이 상처 입은 모습, 깨진 유리창과 도자기 등 삼류 드라마 같은 일이 적나라하게 공개됐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이틀 전 조 전 부사장이 던진 선전포고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한진그룹 조씨 일가는 그렇게, 성탄절에 사랑과 애정 대신 '예상치 못한 선물'을 서로에게 주고받았습니다.

● 싸움의 불씨, '호텔사업'과 '인사'

그렇다면 조 전 부사장은 왜 남동생을 기습 공격했을까요? 핵심은 호텔사업이었습니다. 조 전 부사장은 세계적 명문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호텔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한진그룹에서도 전공을 살려 호텔사업을 이끌어왔습니다. 그만큼 호텔사업에 애착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호텔사업이 누나에게는 '애정의 대상'일지 모르겠으나, 동생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경영실적이 너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입니다.

한진그룹 호텔사업은 2개 부문으로 나뉩니다. 1) 한진칼이 관리하는 칼호텔네트워크(제주칼, 서귀포칼, 파라다이스제주, 그랜드하얏트인천). 2) 대한항공이 관리하는 한진인터내셔널코퍼레이션(LA월셔그랜드)입니다. 소속은 나뉘지만, 숫자는 모두 '적자' 한곳으로 수렴합니다. 칼호텔네트워크 호텔들은 5년 연속 적자를 내고 있고, LA월셔그랜드센터호텔은 누적 적자만 2,000억 원에 달합니다. 게다가 대한항공이 보증한 빚 9억 달러(1조 610억 원)의 만기도 오는 10월 돌아옵니다.

줄곧 이어지는 적자 행진. 하지만 투자자는 없고, 차입금은 계속 부어야 하는 비참하고 난감한 상황. 조 회장은 어떻게든 호텔사업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조씨 일가를 끊임없이 비판해온 2대 주주, 행동주의 펀드 'KCGI' 요구와도 일맥상통했습니다.

물론 조 전 부사장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남동생이 아버지 유훈을 어기고, 혼자 회사를 마음대로 한다고 불만이 쌓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 인사에서 조 전 부사장이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측근들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업도, 측근도 잃고…'그래, 그 다음 목표는 내가 될 것이다', 조 전 부사장이 느꼈을 위기감은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한비자는 군주를 설득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다룬 <세난편>에서 '역린지화'라는 말을 썼습니다. '용은 순하지만, 목 근처에 거꾸로 된 비늘이 있는데, 이를 건드리면 분노하면서 건드린 자를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분노할 점 즉, '역린'을 건드렸을 때 돌아올 화를 설명한 것인데, '호텔사업'과 '인사'는 조 전 사장에게 바로 그런 '역린'이었을 것입니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사진=연합뉴스)
● 피는 물보다 진하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조 전 부사장은 예상치 못한 최후의 승부수를 던집니다. 바로 '적과의 동침'입니다. 오랜 시간 조씨 일가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활동해온, 사실상 적군이라고 할 수 있는 KGCI와 손잡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 최근 지분을 빠른 속도로 끌어모은 반도그룹까지, '반(反) 조원태'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조 전 사장이 목표로 한 'D-day'는 다음 달 24일. 바로 조원태 회장 이사 연임이 의제로 오르는 한진칼 주주총회입니다. 조 회장을 경영 일선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것입니다.

게임의 법칙은 간단합니다. 내 편이 0.01%라도 많으면 승리합니다. 전리품은 '회사 경영권'이 될 것입니다. 물론 패자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타를 입게 될 것입니다.

선공에 나선 조 전 부사장은 작전명 '적과의 동침'으로 지분 32.06%를 확보했습니다. 본인 6.49%에 KCGI 17.29%, 반도건설 8.28%를 더하면, 과반까지 11.41%만 남게 됩니다. 반면 이렇게 되면서 조원태 회장은 위기에 빠집니다. 본인 지분은 6.52%에 불과하고, 한진 계열 재단 지분 3.38%, 우호지분으로 알려진 델타항공 10%, 여기에 카카오 1%까지 더해도 20.9%, 상대에게 턱없이 밀립니다.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 조현민 한진칼 전무 (사진=연합뉴스)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했습니다. 어머니 이명희 고문(5.31%)과 여동생 조현민 한진칼 전무(6.47%)가 조 회장 지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명희, 조현민 두 사람에게 복수심에 가족을 버리고 적군들에게 뛰어간 조 전 부사장은 용서하기 어려운 존재가 됐을 것입니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명희 고문의 핵심측근은 뼈있는 말을 전했습니다. "조현아는 돌아오질 못하게 됐다. 강을 건넜고, 다리도 끊어졌다." 추정해보면 이명희 고문은 "감히 할아버지가 세우고,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온 이 기업을, 적과 손잡고 홀라당 넘기려고 하느냐." 이런 분노가 들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는 여동생 조현민 전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극적인 지원에, 조원태 회장은 1% 내외의 근소한 차로 '반(反) 조원태 연합'을 앞설 수 있게 됐습니다.

국민연금
● 칼자루, 국민연금이 잡다

하지만, 격차가 너무 아슬아슬합니다. 양측의 지분 비율이 팽팽하게 맞서며 칼자루는 국민연금이 잡게 됐습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최종 공시 당시 보유 지분이 4.1%인데 이후 추가 공개를 안 해 정확한 현재 지분은 확인이 어렵습니다. 다소 줄어들었을 수도 있지만, 이처럼 박빙인 상황에서 지분 4%가량은 승패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집니다.

그럼, 국민연금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국민연금은 새로 위촉될 상근전문위원 3명과 외부 전문가 6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열어 의사결정을 하게 됩니다. 전례를 보면, 국민연금을 비롯한 기관 투자자는 외부 자문기관 보고서에 근거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외부 자문기관들이 주주들을 대신해, 주주총회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지 분석해 전하는 기관입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국민연금이 조 전 부사장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들 전망입니다. 외부 자문기관이 조원태 회장 연임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 회장 연임이 부결되면 그동안 각종 법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일으킨 조 전 부사장 측이 경영권을 쥘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원태 회장도 대학 부정 입학으로 최종 학력이 고졸이 될 상황에 처했고, 수당 미지급으로 검찰에 고발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최악을 피해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일각에선 "국민연금이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포기할 가능성도 있다"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실제로 지난해 주총 당시 7.34%로 한진칼 3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은 계속해 지분을 꾸준히 줄여왔습니다. 이럴 경우 소액주주들 선택이 더 중요해집니다.

● 전문경영인, 전가의 보도인가?

국민연금뿐 아니라 소액주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조 전 부사장 측이 꺼내든 카드는 바로 '전문경영인'입니다. 사회적 논란을 빚은 조 전 부사장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성을 갖춘 경영인이 회사를 이끌어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전문경영인을 일종의 방패로 내세운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질세라, 조원태 회장 측은 아예 "우리는 이미 지금도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라고 되받았습니다. 조 회장 아래 석태수 한진칼 대표와 우기홍 대한항공 사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 전 부회장 측이 어떤 전문경영인을 데려와도, 회사에서 이렇게 오래 근무한 사람들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전문경영인 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들을 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기업처럼 오너가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관여하는 현실에서, 전문경영인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는 것입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오너가 있는 한, 전문경영인은 사실상 이른바 '바지사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라며, "총수 일가는 경영에서 손을 떼고 독립적 이사로 구성된 이사회가 경영에 나서야 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결이 같은 비판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진정한 '나의 투쟁(Mein Kampf)'이란?

기업의 평균 수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짧습니다. 경영 컨설팅 전문가 케빈 케네디와 메리 무어는 저서 '100년 기업의 조건'에서 "전 세계기업 평균 수명은 약 13년 정도이며, 설립 뒤 30년이 지나면 기업의 80%가 사라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세계 100대 기업 생존율은 고작 38%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만큼 기업이 오래 생존하긴 쉽지 않습니다.

결국 기업이 오래 존속하려면 국가와 사회에 건강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동시에 질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익을 절제하고 공익을 추구할 수 있는 대주주의 절제력, 전문성을 꾸준히 갖추려는 경영진의 노력,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이 올곧게 뻗어 나갈 수 있게 가져야 할 비판의식도 필요합니다. 과연, 한진그룹 오너와 경영진들은 그런 이 같은 자질을 갖추고 있을까요? 엄중한 목소리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87년 전 1923년 독일 뮌헨. 만약 그날 폭동 현장에서 히틀러가 총아 맞아 숨졌다면, 역사는 어떻게 과연 바뀌었을까요? 더 나아졌을까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반대로 더 나빠졌을 수도 있습니다. 히틀러보다 더 악랄한 독재자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있습니다. 역사의 과오를 진심으로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독일 정부와 독일인들의 마음가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같은 반성과 다짐이 진정한 의미의 '나의 투쟁(Mein Kampf)'은 아닐까요?

2019년 연말, 대한민국 재계에서 일어난 작은 혁명. 그리고 3월 24일까지 제각각 터져 나올 '투쟁(Mein Kampf)'의 목소리. 이 외침들의 최종 종착지는 어디가 될까요? 여러분과 함께 '비판의 눈'으로 지켜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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