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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2019년 북적북적, 올해의 책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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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2019년 북적북적, 올해의 책 매듭

"알렉산드로스와 필리포스의 침묵, 야율초재의 침묵을 묵상한다. 무수한 말과 주장들이 똥 덩어리처럼 둥둥 떠다니는 이 시대에." -이윤기, <위대한 침묵>

2019년이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매번 그렇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어디에선가 2019년 12월 21일에 지구가 멸망한다, 예언했다는 걸 봤던 것 같은데... 그날도 무심히 흘렀습니다. 그리고 2020년, 2020 원더키디의 해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2019년, 북적북적에서는 매주 한 권씩 51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올해의 북적북적을 돌아봅니다. 올해 읽었던 책을 조금씩 다시 읽어봅니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민음사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오, 생각해 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스토피지 타임. 멈춰 있는 시간. 전광판의 시계는 멈춰 있지만 피치 위로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시간이. 앞으로 나의 축구도 그럴 것이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추가 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축구와 함께 어디서든 즐거울 것이다. 무엇보다 김혼비는 추가 시간에 강하니까."


올해의 첫 책으로 읽으면서 제가 당장 어디 조기축구회에 기웃거린다든지, 사회인 야구 같은 데 참가하겠다고 다짐한 건 아닙니다. 다만, 올해는 내가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좀 더 몸을 쓰는 데에 시간을 내자, 더 즐겁게 살기 위해... 그런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사계절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 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내 지인은 모든 권리 가운데 '오줌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라고 단언했다. 진지하게 말해서 '호흡할 권리'를 제외한다면 맞는 말 아닌가. 모두가 어디서든 편안하게 오줌을 눌 자격이 있다는 '오줌권'은 필수적이고 정당한 권리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인정받기 위해, 모욕당하지 않기 위한 그들과 우리의 노력이 설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내 삶의 저자'로 존엄하게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감사했다는 독후감을 본 기억이 납니다. 2019년 새해 벽두에 저도 그랬습니다.

정여울, <마흔에 관하여>, 한겨레출판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너무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나이라는 테두리'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른이 되었는데 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아프고, '마흔이 되었는데 왜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까'라는 생각 때문에 상처 받는 우리 자신을 위해 좀 더 너그러워졌으면."

"어린 시절에는 서른이 되면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았고, 마흔이 되면 인생에서 더 이상 새로움이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웬걸, 서른의 삶은 하루하루가 박진감 넘쳤고, 마흔의 삶은 예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눈부셨다. 마흔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이 드는 것은 공포의 대상이나 떨쳐버려야 할 원죄가 아니라는 것을. 삶을 소중히 가꾸는 사람에게, 나이 드는 일은 오히려 찬란한 축복임을."


제목 때문에 관심이 갔다가 또 망설였던 책, 굳이… 그래도… 하다가 말던 책을 기어이 읽었습니다. 제가 그즈음이라서 그랬습니다. 저도 한때 10대였고 20대였고… 대개 그렇듯이 언젠가 50대, 60대가 되겠지요.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불혹'이라고 하는 마흔 언저리를 이미 지나쳤거나 혹은 곧, 아니면 언제고 갈 분들 모두 함께 읽었으면 하는 책.

엄지혜, <태도의 말들>, 유유

"진심이 중요하지만 우리 관계에서 더 필요한 건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오랫동안 친밀했던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진심보다 나를 대했던 태도가 기억에 남는다. 태도는 진심을 읽어내는 가장 중요한 거울이다."

"언제나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감각이 합해져 한 사람의 태도를 만들고 언어를 탄생시키니까. 누군가를 추억할 때 떠오르는 건 실력이 아니고 태도의 말들이었다…. 말 안 해도 알지? 내 진심 알잖아 라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모른다. 태도로 읽을 뿐이다."


예전에 읽은 무협소설 중에, 자신의 보폭을 항상 한자 일곱 치로 유지한다는 고수가 나왔습니다. 그만큼 자기 몸과 행동 전부를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있기에 그 사람이 천하제일 고수라는 그런 설정이었는데 저는 가끔 게으름도, 농땡이도 피우고 싶은 범인(凡人)입니다만, 노력하는 필남필부가 되고 싶습니다.

제현주, <일하는 마음>, 어크로스

"'중요한 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긴 하다. 나 역시 이 말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잘하는 게 아니라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계속하다 보면(언제나 열심히는 아니더라도) 그것만으로 이르게 되는 어떤 경지가 있다. 당장의 '잘함'으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꾸역꾸역 들인 시간이 그냥 사라져 버리지는 않는다."

"책임감으로만 이뤄진 삶은 결코 원하지 않지만 , 아무 책임도 질 필요 없는 삶은 더 나쁜 것 같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책임'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꾸역꾸역'. 산뜻하거나 쿨하고 세련된 이미지는 아니지만 우공이산(愚公移山)처럼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꾸준히 해 나간다는 어감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저의 일하는 마음은, 한마디로 '꾸역꾸역'.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김영사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이 그토록 많은 오해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대부분 침팬지보다 점수가 낮을 수 있을까? 눈 감고 찍느니만 못하다니!... 오답은 체계적이었다.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거의 틀림없이 반둔두를 떠난 적이 없을 테고, 장담하건대 문맹이었을 것이다. 통계를 배우거나 세계와 관련된 사실을 외운 적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가 있었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극도로 긴장된 순간에 날카로운 논리와 완벽한 웅변술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사실 충실성이 내 목숨을 살렸다. 그가 그런 상황에서도 사실 충실성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보다 교육 수준이 높이 이 책을 읽을 만한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세계에 대한 이해를 앞세우고 그래프가 다소 많이 나와서 약간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저도 그랬어요!) 사실은 소박하고 진솔한 노학자의 차분한 강연을 듣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에서 겪은 생생한 모험담은 보너스입니다!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애니북스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억지 결혼을 하고, 전쟁으로 부모와 생이별한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 살았지만... 결혼한 지 닷새 만에 해방이 되어 남편이 군대에 끌려나가지 않게 됐다는 이유로, 해방된 게 너무도 싫었다는 엄마의 얘기도 '역사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역사와 엄마가 체험한 역사는 달랐지만, 주관적 체험이 지닌 신선함이 있었다."

작가는 왜 이 만화를 그리게 됐을까요. 나이 마흔에 처음 만화를 시작했다는 김은성 작가는 문득 엄마의 과거가 궁금해 물어봤는데 술술 풀려나오는 엄마의 이야기에 이걸 그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4권 말미 작가의 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엄마의 팔십팔 년 인생을 그리는 데 내 인생 팔 년이 걸리다 보니 어떨 땐 좀 손해 보는 느낌도 있었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도 내 인생을 잘 정리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김탁환, <살아야겠다>, 북스피어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게다가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작년 9월 메르스가 3년 만에 다시 발병했을 때는 2015년의 아픔을 겪은 이후라서인지 초동 대처와 방역에 성공했습니다. 우리 사회도 말하자면 한 걸음 나아간 거겠죠.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우리의 시선, 그를 배제하고 어쩌면 비난하기까지 하는, 냉랭한 그 시선의 온도는 조금이라도 올라갔을까요. 우리 사회는 경제적 손실이나 성공 가능성 등을 이유로 한 사람을 포기하는 공동체인가요, 아니면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일까요.

이희호, <동행>, 웅진지식하우스

"우리는 1963년 4월 초 동교동으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국회에서 귀가한 남편은 2개의 문패를 내놓았다. 김대중, 이희호.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대문에 당신과 내 문패를 나란히 답시다. 가정은 부부가 함께 이뤄나가는 거 아닙니까? 부부는 동등하다는 걸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입시다.'... 남녀가 유별하고 남편을 하늘이라 믿고 따르라고 가르친 그 시대에, 더욱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며느리 문패를 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날들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에 감사한다. 길고 험한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편과 한몸이 되어 서로 믿고 의지하며 굳건히 잘 걸어온 날들이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대한민국이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고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이 자서전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전해인 2008년 11월 출간됐고 책의 마지막에 언급한 '이러한 날들'은 고작 9개월 남짓이었습니다. 그래서 46년으로 진행 중이던 동행은 47년으로 매듭짓게 됩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은 동행이었으리라, 그 결혼 괜찮았으리라 짐작합니다. 이희호 선생이 여성운동가의 길을 계속 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고인의 명복을 바랍니다.

김시영, <괜찮아, 안 죽어>, 21세기북스

"할매."
"왜?"
"괜찮아, 안 죽어요."
내 말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할매는 별말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진료실을 나가는 할매의 뒷모습을 보며 '오, 아직도 이 말이 먹히네'라는 유치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진료실을 나서려던 할매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인사를 하시려나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마주 보는데 할매가 말한다.
"다 죽어, 사람은."


나는 아직 나쁜 의사지만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덜 나쁜 의사가 되고 싶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입으로는 늘 괜찮다고 사람은 쉽게 안 죽는다고 말하지만 스스로도 괜찮지 않을 때가 많긴 하지만 선량한 나의 할매, 할배 같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위안과 감사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작가의 말에 크게 고개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력이 되어주는 건, 언제나 성질 나쁜 나를 견디고 때로는 감싸주고 툭툭 말을 건네주는 선량한 나의 사람들 같습니다.

노회찬, <노회찬의 진심>, 사회평론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이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 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우리는 투명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쳐놨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의 손이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이정미 전 정의당 대표는 노회찬 서거 1주기를 맞아 "노회찬 정신이 곧 6411번 버스 정신"이라며 "우리 정치가 한 번도 제대로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거명하고 권력 밖으로 밀려난 시민들을 정치의 한 복판으로 데려오는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낡은 정치의 불판을 갈자"며 한참 노회찬이 설득력 있게 주장했던 그 '오래된 미래'가 실현되는 날이 언제고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원영, <펭귄의 여름>, 생각의 힘

"매년 겨울이면 남극에 간다.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따뜻한 남반구의 여름은 동물들이 번식하는 기간이다. 수천 쌍의 펭귄은 좁은 육지에 빽빽하게 들어차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둥지 앞에서 기다리다가 부모 펭귄을 잡아 위치 기록계를 부착하거나 새끼가 얼마나 컸는지 무게를 재고 성장치를 측정한다. 내게 남극의 여름은 매일같이 펭귄에게 다가가 궁금증을 해결하려 애쓰는 시간이다."

"다들 잘 지내고 있구나, 곧 돌아올 남극의 겨울을 잘 이겨내렴. 내년에 또 보자. 펭귄의 언어로 말을 건네진 못하고 대신 인간의 언어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42일을 보내고 남극을 떠나지만 남극이 다시 여름을 맞이할 때 작가는 돌아갑니다. 2019년 여름이 다시 오지 않겠으나 비슷한 듯 다른, 다른 듯 비슷한 여름이 내년에 또 돌아오겠죠. 앞으로 석 달 뒤면 이 작가는 또 남극의 여름에 펭귄을 보러 가겠네요. 분변을 뒤집어쓸 것만 빼고 다 부럽습니다.

장강명, <산자들>, 민음사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도장 공장 옥상에 걸렸다. 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자가 되었다... 점거 파업이 한 달을 넘어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름이 되면서 죽은 자도 산 자도 조금씩 미쳐 갔다.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느냐의 싸움이었다."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 해본 적 없잖아?"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김영사

"살인 재판을 끝낸 뒤 맛있는 점심을 먹고, 강간재판을 마친 뒤 금목서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한다. 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다음 날이면 무자비한 학교폭력 사건을 처리할 것이다. 세상이 평온하고 빛날수록 법정은 최소한 그만큼 참혹해진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여러 방면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한국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나. 자기 자리에서 업의 본질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되물으며 소임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또 반성하고 그런 이들 덕분에 그러하다고. 이 책의 저자 같은 이들이 '법'이라는 엄중하고 무자비해 뵈는 때로는 불공정해 보이기만 하는 사회의 근간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도 책을 읽고 해 봤습니다.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 유유

"정해진 길을 고집하지 않고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듯 자신의 상념을 쫓는 것보다 더 매혹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방 여행을 하면서 곧바로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탁자에서 시작해 방구석에 걸린 그림 쪽으로 갔다가 에둘러 문 쪽으로 간다. 거기서 다시 탁자로 돌아올 요량으로 움직이다가 중간에 의자가 있으면 그냥 주저앉는다. 의자란 얼마나 훌륭한 가구인가."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변덕스러운 여신이 있어 내가 경험한 이 두 세계를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 주고, 다시는 이 위험한 연금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금지된 결투를 감행한 벌로 가택 연금을 당했던 처지에 정신 승리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러다 연금에서 해제된 뒤에는 오히려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나를 짓누를 것이라는 소회에 이르면... 아, 세상은 그런 곳이었지 하는 묘한 공감마저 드네요. 강제로 떠나게 된 42일 내 방 여행이지만, 여행의 즐거움이란 꼭 새로운 지역과, 풍경, 새로운 사물에서만 오지 않는다는 것, 선입견 떨치고 긍정적으로 상황의 다른 면까지 관조할 수 있는 활짝 열린 눈이 있으면 그걸로 족할 수 있다는 것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이제 언제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살면서도, 얼굴 한 번 볼 일 없이 사이버 공간에서만 관계 맺거나 헤어져 버리는 이 시대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도요. 그렇게 우리는 어쩌면 빛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해후하고 이별하는데, 그 관계란 얼마나 얄팍하고 또 깊은 걸까요.

로버트 풀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알에이치코리아

"어떻게 살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나는 유치원에서 배웠다.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에 있지 않았다.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매일 오후 3시에 과자와 우유를 먹고 담요를 덮고서 낮잠을 잔다면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지 생각해보라. 모든 나라가 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놓는 것과, 자신이 어지럽힌 것을 자신이 치우는 것을 기본 정책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라."


여기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은 기본 중의 기본, 어쩌면 다 아는 뻔한 이야기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그 '기본'조차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기에... 그래서 더러 '심쿵'합니다.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난다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 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 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작가는 책 말미에 "스물여섯에 쓴 소설을 서른여섯 살에 다시 한번 고치게 되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라고 털어놓습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과도 약간 흡사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개정판을 읽었는데 언제고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지만 그 절판된 '전설의 초판'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하나 하나 읽을 때마다 그 책을 읽던 시기가 떠오릅니다. 그 책의 우주가 펼쳐집니다. 책의 우주라는 멋진 제목의 대담집도 생각나네요. 이 장대한 책의 우주에서 아주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그래도 소중한 티끌 한 점을 맡고 있는 지난 1년은 들어주신 여러분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올 한 해 감사했습니다. 내년에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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