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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 탓에 힘들었지만 '사람' 덕분에 버틴 시간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인-잇] '사람' 탓에 힘들었지만 '사람' 덕분에 버틴 시간
명실상부 '송년회'의 계절이 무르익고 있다. 만나야 할 이들이 많아 일찌감치 11월부터 시작한 사람도 적지 않다. 도저히 12월 안에 소화할 수 없는 일정은 '신년회'로 둔갑하여 1월 어느 날에 슬쩍 자리를 잡기도 한다. 일도 많은 연말에 송년 모임이 너무 많으면 부담스럽지만, 또 너무 없으면 왠지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비록 다소 형식적인 자리일지라도 어쨌든 송년회는 한 해 동안 잠자고 있던 인간관계의 레이더가 반짝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의식인 셈이다.

사실 가족이나 친구처럼 만남의 횟수 이전에 내 마음의 거리가 밀착된 사이에선 굳이 이런 형식을 자주 빌리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반면 회사 같은 다소 느슨하지만 이해관계와 목적이 전제된 관계는 좀 다르다.

뭣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모처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들 업무의 긴장을 내려놓고 술 한 잔 주고받는 그 시간이 좋았다. 그런데 내가 선배가 된 이후부터는 송년회가 참 부담스럽다. 한 해 동안 쌓인 일과 조직에 대한 각자의 갈등과 불만을 알고, 그것을 해결해야 할 입장에 있다 보니 서로 할 말들은 꾹 눌러둔 채 심드렁하게 술잔을 주고받는 자리가 편할 리 없다. 동상이몽 같은 그 시간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회사에서 맺고 있는 관계가 새삼 아쉽게 다가오기도 한다.

올해 내가 속한 조직의 송년회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마음이 많이 무겁다. 다른 해와 달리 이번에는 '송별회'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20대, 30대, 그리고 40대의 한 시절을 한 공간에서 보냈던 오랜 동료가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여는 그의 발걸음을 축하하는 기쁜 마음에 앞서, 같이 한 시간만큼 커다란 허전함이 자꾸만 나를 휘젓는다. 함께 회사 생활의 고충을 나누고, 꿈을 이야기하던 시절을 지나 조직의 책임을 나누어 짊어지고, 각자의 영역을 키워가는 동안, 어떤 혼돈 속에서도 그는 내게 늘 '상수' 같은 든든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길이 미세하게 갈리기도, 의견차로 다투기도 했지만 모든 면에서 인생선배이기도 한 그에게 내심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다.

요즘같이 변화가 빠른 세상에 장기근속의 대명사인 공무원도 아니고, 이직이 잦은 업종에 종사하는 내가 한 직장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일했다고 말하면 대부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쩌다 이렇게 오래 일했나 싶어 스스로도 가만 이유를 떠올려본다. 유난히 엉덩이가 무거운 성정도 한몫했겠지만, 거기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처져 있거나 부족할 때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줌으로써 다시 나를 추동하던 동료들, 모든 것을 다 공유하진 않아도 급박했던 삶의 이슈들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귀를 기울여주었던 동료들, 너무 달라 답답하다가도 내 깜냥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를 쓱싹 해결해주던 동료들. 그렇게 내 앞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직장에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진 않을 것이다. 회사 생활을 가장 힘들게 하거나, 퇴사를 부르는 결정적 이유가 조직 내 인간관계라는 설문조사 결과는 이미 익숙하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두어야 할 만큼 개인의 자존과 경계, 심지어 인권이 상처받기 쉬운 공간 역시 직장이다.

가족보다, 친구보다 더 많은 물리적인 시간을 한 공간에서 함께하지만, 언제나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우리들'. 사람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하지만, 사람이 있기에 지난한 이 시간을 버티는 것 또한 사실이다. 회사는 학교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지만, 그래서 거리를 두고 냉정하라 말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날 수 있는 좋은 관계에 대한 가능성을 애써 차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송년회 시간이 다가온다. 늘 곁에 있어서 잊었던 말, 꼭 해주어야지. 정말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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