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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낡은 흑백사진 속 김우중은 고단해 보였다

1년 2/3 해외에서 보내며 지구 240바퀴…무엇을 남겼나

[취재파일] 낡은 흑백사진 속 김우중은 고단해 보였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 소식을 취재하던 중 흑백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대우 20년 사사'에 실렸다는 사진은 공항 대합실 의자에 말 그대로 '大(대)'자로 드러누워 자고 있는 김 전 회장 생전 모습을 담았다. 일반 대합실에 앉아 있는 한때 재계 2위 총수의 모습 자체도 생경했지만 '세계 경영'을 내세워 1년 3분의 2를 해외에서 보냈다던 삶을 웅변하는 듯해 눈을 붙잡았다.

바쁜 삶이었다. 옛 공산권과 아프리카 오지 등 각국에 현지 법인 396개를 세우고 지구를 240바퀴쯤 돌았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점심으론 비빔밥과 설렁탕만 먹었다고 했다.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은 김 전 회장이 늘 "오밤중까지 일했다"며 유럽 출장 뒤 홍콩에 들러 함께 방을 쓰게 됐는데 "새벽 4시에 깨보니 책을 읽고 있더라"고 말했다. 4시간 뒤에 있을 조찬 자리에 늦을까 봐 아예 안 잤다는 것이다.
[취재파일] 낡은 흑백사진 속 김우중은 고단해 보였다
맨주먹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전이 꺼져가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분명 김우중의 삶은 음미할만한 데가 있다. 투자자를 속인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는 물론, 스스로 "실패한 기업인"이라 한 것처럼 분명한 비극이었던 김우중 신화지만, 그가 남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 뛰는 청춘의 언어다.

김 전 회장 빈소에서 만난 백지우 씨(29세)는 김우중이 마지막으로 뿌린 도전의 씨앗이 싹 틔운 경우다. 지방 국립대 졸업반 시절 학교 게시판에서 본 'GYBM' 프로그램이 인생을 바꿨다. GYBM은 옛 대우맨들이 만든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주관해 청년의 해외 진출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청년을 선발해 어학과 비즈니스를 교육한 뒤 옛 대우 네트워크를 활용,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취업을 지원한다. 김우중 생애 마지막까지 애착을 가졌던 기획이다. 한 사람당 2천만 원 드는 교육비의 절반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대우 임직원 출신들 회비로 충당한다. 지금까지 700여 명이 혜택을 봤다.

백 씨는 2016년 인도네시아 신발 공장에 취업해 2년 만에 매니저로 승진했다. 한 달 1백만 족을 생산해 나이키 등 글로벌 기업에도 납품하는 공장에서 5천 명 작업을 관리한다. 생산에서 선적, 신규모델 개발 등 직무에 필요한 교육은 이미 GYBM 프로그램을 통해 옛 대우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아직 취업난에 시달리는 친구들은 백 씨의 선택을 부러운 눈길로 보고 있다고 한다. 백 씨는 "도전을 강조한 김우중 회장님이 세계에서 각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하라고 하신 게 기억에 남는다"며 "세계 경영이란 가치, 딱 그것 하나만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최윤권 홍보위원은 "김 회장님은 평소 그룹은 해체됐지만 젊은 친구들을 통해 대우의 명맥을 잇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취재파일] 낡은 흑백사진 속 김우중은 고단해 보였다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마지막까지 강조했던 가치가 희생이었다고도 말한다. 이경훈 전 대우 회장은 "대우의 기업 모토가 창조, 도전, 희생이었다"며 "우리 세대가 희생하면 차세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다"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망한 회사가 공들여 청년을 지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는 설명이다. 분명한 건 대우라는 문제적 기업을 지나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조문객 발길이 이어졌던 김우중 전 회장의 빈소 (사진=연합뉴스)
수십 년 전 낡은 흑백 사진 속 김우중은 고단해 보인다. 그 고단함은 점차 살 만한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에 필연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강조한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했다"는 말의 뜻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실패한 경영자, 풍운아라는 말들이 다 담지 못한 '기업가의 도전 정신'만큼은 이어지길 바란다. 우리에게 큰 충격을 안긴 대우 사태 역시, 지구를 누비며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청년들의 도전이 계속될 때에 비로소 정리될지 모른다. 여전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틀 사이에 근 5천 명이 다녀간 김우중 빈소에서 느꼈던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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