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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치마 때문에 경력을 포기했습니다"

프리스커트 캠페인 4 - 류지원 前 대한당구연맹 심판 인터뷰

[취재파일] "치마 때문에 경력을 포기했습니다"
"심판은 포기를 했다고 봐야 하나요?" (기자)
"그렇죠, 더 하고 싶지 않은 거죠." (류지원 現 당구 선수)


류지원 대한당구연맹의 전 심판은 현재 당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나가던 심판,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부심도 갖고 있었는데, 류지원 씨가 심판에서 선수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 건 다름 아닌 치마 때문이었습니다.

SBS가 프리스커트(Free-Skirt : 치마 유니폼을 강요하는 직장 문화, 고정관념 바꾸기)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 올해 초 당구계에는 치마 강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2017년 대한당구연맹 심판위원장이 여성 심판들에게 경기에서 치마를 입으라고 지시하면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당구 심판들에게는 '정장을 입는다'는 정도의 복장 규정이 있지만, 명확하게 정해진 유니폼은 없다고 합니다.

류지원 전 심판은 이 지시를 어기고 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전국대회 15경기 참가 배제라는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3년 동안 활동 정지, 경력 단절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류지원 선수가 겪은 이야기는 안타까움의 연속이었습니다.

● 대한당구연맹의 치마 권유(?) 도저히 받아줄 수 없는 이유

류지원 전 심판은 사실 2014년 여자 당구 심판으로는 처음으로 치마를 입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실험적인 의미였습니다. 예쁘게 보이면서 정확하게 심판 잘 보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한번 입어봤더니, 구두를 신고 있는데 바닥이 미끄럽고 활동하는데 불편했습니다. 당구 경기 관객은 대부분 남자들이라 불편하다고 결론 내리고, 그 이후로 치마를 안 입었어요."

넓은 당구대 위에서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는 당구공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보려면, 누구보다 민첩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앉았다 일어났다, 몸을 숙였다 폈다, 움직임도 많았습니다. 선수들에게 걸리적거려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치마를 입으니 모든 동작이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복장에,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다가 심판 업무에 집중을 할 수 없다는 게 치마를 입지 않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심판위원장은 왜 치마를 입으라고 한 걸까요?" (기자)
"여자 심판이 치마를 입었을 때 주변 반응이 좋았고, 실제 치마를 입겠다고 요청한 심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치마를 입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입고 싶은 사람만 입으면 되지 모든 심판의 복장을 통일시킬 필요가 있을까요? 억지로 입힐 필요가 있을까요?"


심판위원장의 치마 권유(?)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권유라고 해도, 심판 선발 권한을 가진 위원장이 무리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나, 여성 심판 전원에게 다 입으라고 할 필요가 있었나, 무엇보다 3년간 심판 배제라는 강한 징계를 할 필요가 있었나…
류지원 前 대한당구연맹 심판
대한당구연맹은 강요가 아니라 줄곧 '권유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당사자의 설명은 달랐습니다. 경기마다 심판을 선발하는 건 전적으로 심판위원장의 몫인데, 치마를 입지 않으면 제재를 받게 될 거라는 지시 내용과 함께 "치마 안 입으면 부심만 하게 될 것", "이번에 버릇을 좀 들이겠다" 는 심판위원장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확인했습니다. 류 전 심판은 이런 이유로 실질적인 강요라고 판단했습니다.

●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심판위원회는 애초에 징계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류지원 전 심판이 이의제기를 하자 대한당구연맹은 징계를 철회했습니다. 그런데도 류 전 심판은 계속해서 경기장에 설 수 없었습니다.

"심판위원회가 경기의 심판을 선출해야 합니다. 위원들이 심판들을 추천해서 취합해 보면, 많은 득표수를 받은 사람들로 명단이 꾸려질 거 아녜요. 이 명단이 위원장에게 최종 보고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본인 마음대로 수정하는 거죠. 이 사람 빼고 다른 사람 넣어."

심판위원장은 '견책'이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내린 부당한 징계에 대해 사과하고 업무에 복귀시켜줄 것을 기대했는데, 연맹은 도리어 '책임을 묻겠다'고 답했습니다.

"사과는커녕 보복성, 협박성 글이 심판위원회 게시판에 또 올라오더라고요. 문제 제기한 사람들 딱 집어서, '본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건 지지한다, 하지만 그 뒤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를 것이다'. 징계는 그들이 받았는데 아무도 사과하지 않으면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하니까… 문제제기를 했던 분들 다 심판 활동 다 안 하고 있는 상황이죠. 다 최고참 심판들입니다."

류지원 전 심판은 그 시간을 통틀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연맹의 조치만 믿다가는 영영 심판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외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성가족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성가족부에 민원을 넣었는데 (그쪽에서) 하는 얘기가, '우리는 강제 집행, 강제적으로 뭘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였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 했던… 여성가족부가 왜 존재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근로복지공단에도 민원을 넣었는데, '대한당구연맹과 심판 사이에는 고용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가 결론이었어요. 권익위원회에도 마찬가지로 강제성이 없었고요. 대한체육회에 민원 넣었더니 증거나 증인, 모든 게 있었는데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습니다. '대한당구연맹이 알아서 징계하라', 이러면 그만이었습니다."

법이나 제도로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합니다.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었고 그때 답답했던 심경은 말로 다 표현 못 하는 게… 그렇다면 우리는 법 테두리 밖에 있는 거 아니냐. 당구 심판의 지위라는 게, 무시하면 무시당하는 입장인 거구나. 누군가 우스개 소리를 하더라고요. 우리는 하찮은 존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치마 유니폼에 드러난 성차별, 직장 갑질까지

SBS는 프리 스커트 캠페인에 앞서 여의도역을 중심으로 건물 안내데스크 직원들의 유니폼을 살펴봤습니다. 8시 뉴스 기사 ▶ (2019.11.30) 추운 날씨에도 '치마 강요'…성차별 회사, 처벌 가능할까 에서도 언급했듯이 대기업과 은행, 증권사 건물 20곳 중에서 호텔 2곳을 제외하고는 일제히 약속이라도 하듯 모든 안내데스크 직원들이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안내데스크 여직원은 활동량이 적어서 치마 입어도 된다'고 단정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이분들도 업무에 적합한 복장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한겨울 출입구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피하지 못해 테이블 아래 난로를 2개씩 켜놓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의자에 앉을 때는 무릎에 담요를 덮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코트를 입고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내데스크 직원들은 난로나 담요가 외부에서 보여져서는 안되고, 회사에서 지급한 코트 말고는 보온성 좋은 옷이나 신발을 착용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회사에서 지급한 '예쁘고 단정해 보이는 유니폼' 그 이상, 이하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성들에게만 과도하게 복장 규정을 들이미는 건 엄연한 성차별인데, 문제제기를 하는 곳도 없었습니다.
여성 치마 유니폼
일부 여성 직원들 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017년 여성가족부가 '특정성별영향분석평가' 과제 발굴을 위해 실시한 대국민 공모에서는 '직장 내 여성 직원 복장 규정 지침 완화'가 우수 정책에 선정됐습니다. 건설 현장에 여성 직원을 위한 탈의실과 화장실을 설치하는 정책이 최우수, 혼자 사는 여성을 위해 안심 건물 선정하는 정책이 우수상에 공동으로 선정됐습니다. 그만큼 공감대가 있다는 것, 나아가 성차별 요소가 있어 양성평등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는 의지를 정부와 정책을 제안한 국민들 모두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는 예산이 부족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전 조사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3월 국회에서 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대표 발의한 '성별에 의한 차별, 성희롱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안' 에는 복장 규정으로 인한 성차별이 명시돼 있습니다.

제8조(근로조건에서의 성차별 금지)
① 국가기관 등의 장과 사용자는 근로시간·교육·훈련·배치·승진 등 근로조건에서 성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국가기관 등의 장과 사용자는 종사자 또는 근로자에게 성별 등을 이유로 그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아니한 복장의 착용을 요구하는 등 작업조건이나 작업환경에서 성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 법안은 현재 국회 계류 중입니다. 여성 직원에 대한 과도한 복장 강요는 성차별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직장에 책임을 묻기 위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또 직장에 이 제도가 적용돼, 이를 지키지 않는 직장에 책임을 묻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대한당구연맹 관련 기자회견
류지원 선수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여성 직원에게만 과도하게 복장 규정을 들이미는 직장 내 성차별, 그리고 직원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리고 징계하는 직장 내 괴롭힘 등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업무와 관련 없는 복장을 강요하거나, 조직에 명확한 복장 규정마저 없었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가 없다 보니,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말이 그저 푸념이나 하소연이 아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작은 목소리가 모여서 큰 힘이 될 수 있으면…"
[불타는 청년] 여성 심판이 치마 입으니 보기 좋더라? 대한당구연맹의 황당한 강요 (ft. 류지원 전 심판)
저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회사 스스로 직원들의 유니폼에 관심을 갖고 어떤 불편함이 있는지,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지 의견을 듣고 수정하는 게 가장 빠른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는 직원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직원들도 동료로서 자신의 유니폼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만약 그런 분위기조차 형성되지 않는 직장에 있다면 저희라도 힘이 되겠습니다. (▶SBS x 청년 프로젝트 홈페이지) 류지원 선수의 마지막 말로, 저희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지금은 심판을 못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지만, 누구보다 당구 심판으로 프라이드가 강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치마 강요로 인해 이런 일을 겪게 됐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족스런 결과를 얻진 못했지만 심판위원회에서는 강압적으로 치마 입으라는 분위기는 없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려고 합니다.
힘이 없다고 입 다물고 아무런 얘기 안 하는 것보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하면서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권리 챙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권리도 챙길 수 있습니다. 겁이 나면 익명으로라도 제보하면 좋겠고 그렇게 하다 보면 고쳐질 날도 옵니다. 이 세상은 힘 있는 자가 만든 게 아니라 약한 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작은 목소리라도 모여서 큰 힘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프리스커트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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