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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이 겨울 달달한 로맨스 한 잔!∼ '지구에서 한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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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19 : 이 겨울 달달한 로맨스 한 잔!~ '지구에서 한아뿐'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 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 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12월입니다. 올해를 슬슬 마무리해야 하는 이 시점, 한 잔의 연유 라테 같은 책 한 권 듣고 또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달달한 로맨스 소설 같기도 하고 SF 소설 같기도 합니다. 7년 전 소설, 혹은 지난여름 출간된 책이라 해도 맞습니다. 주인공은 '한아'이기도,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수상한 책!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이 북적북적의 이번 주 선택입니다.

이 책은 꽤 특이한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2012년에 처음 나왔는데 초판도 다 팔리지 못한 채로 절판됐습니다. 그렇게 사라질 것 같았는데 5년이 지나 올여름 개정판으로 재출간됐습니다. 출판사가 바뀌었고 내용도 일부 바뀌었다고 하고요. 일종의 '환생'인데 주인공인 한아의 가게 이름 또한 '환생'입니다. 그건 운명이었던 걸까요.

"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 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길에서 말 걸어오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고 본인도 그 점을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수선을 한참 넘어가는 영역으로 들어선 지 오래지만, 딱히 또 수선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웠고 업사이클링이라는 말도 맞긴 맞지만 어쩐지 그러면 큰 단위로 뭔가를 해야 할 듯해서 대충 얼버무리기로 했다. '환생- 지구를 사랑하는 옷 가게'라는 간판은, 그래서 직관적인 듯도 아닌 듯도 했다."


"잔잔하게 이어질 줄 알았던 행복이, 배수구로 빠져나가듯 흔적을 감춘 것은 최근이었다. 늦은 오전, 2호선 전철 안의 한아는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혼란스러움 그 자체로 한 여자의 얼굴을 빚는다면 딱 이 얼굴이다 싶을 얼굴로, 선반 위의 광고를 오래 보고 있다."

다시 읽으면서 보니 소설 초반의 몇몇 묘사가 꽤 상징적이고 중후반의 전개와 대비돼 더욱 인상적입니다. 한아와 경민은 어떻게 보면 독특하나 또 흔해 보이는, 젊은 나이이지만 사귄 지는 11년이나 된 오래된 연인입니다. 남친 경민은 대개 그렇듯 또래인 여친보다 철이 없어 보이고 친구의 표현처럼 '지나치게 오래된 연인'이다 보니 애정도 식은 게 아닌가 하는 (여친의) 속상함도 있는 그런 연인. 그런데 캐나다에 유성우 보러 갔다가 운석 낙하 등 소동을 겪은 뒤 귀국한 남친인 그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남친이 달라졌어요!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한아가 한쪽 무릎으로 꿇어앉은 경민의 목 밑으로 전기 충격기를 겨눌 때, 경민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반지였다. 경민의 아주 고전적인 자세와, 그에 답하는 한아의 전혀 고전적이지 않은 자세. 연기와 빛 속에서 그건 정말 희한한 구도였다."

"그래도 나는 안 될까. 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 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 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 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 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남친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2만 광년을 날아온 외계인이라는 그, 몸의 40%는 광물 성분으로 돼 있다는 괴이함에, 나를 사랑한다는데 그동안 지켜봐 왔다는데… 실로 우주적 스케일의 스토킹인 걸까요.

이 구 남친놈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이며, 국가정보원에 신고까지 했는데 '남친은 사실 외계인이었어요'라고 고백해야 하는 건지, 지구인과 외계인은 커플이 될 수 있는 건지, 제목은 '지구에서 한아뿐'이지만 실은 세계 곳곳에서 이런 외계인들이 영화 맨인블랙처럼 침투해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만 우리의 한아가 지구의 위기를 구하고 그런 전개는 아닙니다. 모두가 그렇게 읽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저에겐 달디 단 로맨스 소설이었다고 말씀드리며 책 소개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작가는 책 말미에 "스물여섯에 쓴 소설을 서른여섯 살에 다시 한번 고치게 되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라고 털어놓습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과도 약간 흡사한 게 아닐까 싶어요. 저는 개정판을 읽었는데 언제고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지만 그 절판된 '전설의 초판'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출판사 난다와 정세랑 작가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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