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이춘재 자백' 같은 기적은 없다…스웨터 공장 살인 사건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SBS 뉴스

작성 2019.11.19 11:13 수정 2019.11.19 14:0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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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 돈이 오가는 민사소송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을 감옥에 가두기도하고 목숨을 빼앗기도 하는 형사재판에서 판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둠의 저편>이라는 소설에서 재판을 '잘라내도 잘라내도 계속 다리가 생겨나는 우람한 생명력을 가진 문어 같은 괴이한 생물'에 비유했는데,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려 재판을 받은 사람에게 재판이란 '괴이한 생물' 이상으로 공포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경찰이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진범을 이춘재로 잠정 결론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사건으로 20년 옥살이를 한 윤 모 씨에 대한 관심이 높다. 강압 수사를 진행했다는 화성경찰서 '장 형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높고, 뒤늦게나마 재심을 통해 윤 씨의 억울함이 풀릴 거라는 기대도 크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사실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폭행과 고문을 통해 받아냈다는 윤 씨의 자백이 재판 과정에서 전혀 걸러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 씨는 재판받을 당시 경찰의 폭행과 고문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윤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에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장 형사만일까? 당시 재판에 참여한 판사들은 책임이 없나?

폭행과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재판은 윤 씨 사건만이 아니다. 수사기관의 폭행과 고문을 통해 '조작된 간첩들'이 재판에 넘겨졌을 때, 수많은 판사들이 윤 씨의 외침을 묵살했듯 그들의 외침 또한 묵살했다. 시민단체 '지금여기에'와 은유 작가가 간첩 조작 피해자들을 만나 기록한 책에는 다음과 같은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법정에 가면 그래도 판사님은 내 진실을 알아주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고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그 믿음은 헛되고 헛됐다. 이 일사분란한 무한폭력의 회로에 갇혔던 김흥수는 이렇게 말했다. "배운 사람들이 그러는 걸 보고 못 배운 걸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존엄 사이> 발췌)

두 번째로 주목할 건 윤 씨의 재심 청구 시점이다. 20년 옥살이 후 가석방으로 출소한 지 10년, 그 30년 동안 그는 왜 재심을 청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까? 화성 8차 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는 이춘재의 자백이 없었다면 과연 윤 씨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을까? 설사 재심을 청구했다 하더라도 재심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었을까? '진범의 자백'이라는 메가톤급 태풍이 발생해야만 재심 제도가 작동되는 현실은 타당한 것인가?

1998년 스웨터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이 살해된 사건에서 범인으로 지목되어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출소한 김현재 씨도 화성경찰서 '장 반장'(1988년 화성연쇄살인 8차 사건 수사관 장 형사가 1998년에는 장 반장이 되었다)의 강압 수사 피해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법정에서도 철야 수사 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모든 물증이 확보되어 처벌받을 수밖에 없다. 자수하면 2~3년 정도 살고 나올 수 있다'는 경찰의 협박과 거짓 회유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김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수사기관에서 한 김 씨의 자백과 이를 보강할 수 있는 나머지 정황증거만으로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그는 2013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당시 수사를 진행했던 장 반장을 처벌해달라는 고소장을 검찰에 제출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 해 법원에 재심 청구서도 냈지만, 장 반장 등이 직무 관련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김 씨는 2015년 만기 출소 후 시민단체와 함께 재심을 준비하였고, 4년이 흐른 올해 11월 다시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 나는 1년 전부터 재심 준비에 합류하여 그 당시 수사가 비과학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추가로 확인하였고 재심 청구서에 이러한 내용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이 재심 청구 사건과 관련해 진행한 한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진행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이런 경우(화성 8차 사건처럼 진범이 나타나 자백을 한 경우)가 아니라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질까요?" 순간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진범의 자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영영 재심은 열릴 수 없는 것일까?

무조건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다. 다시 재판을 열어 그 당시 조사했던 장 반장을 증인으로 세워 강압 수사를 했는지 물어볼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 그 당시 수사가 비과학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반영하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수 있는지 다시 판단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옳다.

처음에 이야기한 재판에 대한 비유로 글을 마치려 한다. 형사재판의 변호인으로 참여할 때마다 괴이한 생물에 잡혀 있는 사람을 구해낸다는 기분 좋은 상상과 나도 결국 그 괴이한 생물에 먹혀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한다. 나는 김현재 씨의 변호인으로, 끝까지 이 사건을 잘 해내고 싶다.

[김현재 씨 사연은 SBS 궁금한 이야기 Y 371회(2017년 8월 11일 방송, '스웨터 공장 살인사건' 범인은 왜 19년 만에 결백을 주장하나?)를 통해 방송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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