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RCEP 타결' 정말 중국이 주도했나?

세계 언론은 '미·중 갈등'에 주목…협상참여자들은 "모르는 소리"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작성 2019.11.07 09:22 수정 2019.11.07 09: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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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현지시각) 방콕에서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RCEP) '협정문'이 타결됐습니다. 한중일 3국과 아세안 10개국에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참여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거대 자유무역협정(FTA)이자 세계 총생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FTA라는 게 정부 설명입니다. 인도를 뺀 15개국 정상만의 협정문 합의를 정말 "협상 타결"이라 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겠습니다. 여기선 RCEP 결과가 보여준 '미·중 갈등' 양상과, RCEP이 많은 언론이 보도한 것처럼 과연 "중국 주도"로 이뤄진 건지 따져보겠습니다. 

● RCEP에서 미·중 갈등 읽은 세계 언론…미·중이 자초

많은 미디어가 이번 RCEP 결과에서 세계 양대 슈퍼파워인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읽었습니다. 한 신문은 "中 거대 교역망 주도, 부랴부랴 견제 나선 美"라고 제목을 뽑았고, 다른 통신사는 "중국 소식통"을 인용해 "RCEP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국을 겨냥한 핵심 경제 패권 정책"이고 "향후 미국과 패권 경쟁에 유리한 카드"라고 보도했습니다. '갈등'은 신문방송학에서 말하는 전통적 뉴스 가치 중 하나인 만큼 언론이 이런 유의 갈등 구도에 주목하게 되는 건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이 이런 '결과적 갈등'을 자초했습니다. 우선 미 상무장관 윌버 로스가 RCEP 타결 전날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RCEP 별 것 아니다. 아주 낮은 수준의 조약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습니다. 중국이 "후원(backed by)하는 RCEP을 어떻게 보느냐"는 진행자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RCEP은 중국이 후원했다'는 진행자의 규정을 딱히 부인하지도 않은 겁니다.
미중 무역 협상 갈등'갈등' 주목에는 내·외신이 따로 없었던지, 이 진행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2년 째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불참해 아시아 국가들이 실망하고 있다"며 RCEP으로 아시아가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도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들에 발끈한 장관 반응이라니, 당연히 '갈등 드라마'의 요소가 되기 충분했지요. 때마침 미 국무부도 보고서를 내 최근 관심이 식은 줄만 알았던 '인도·태평양 전략'을 재강조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중국은 한술 더 떴습니다. 관영 매체 글로벌타임스는 관변 학자들을 인용해 "RCEP 타결은 미국 보호주의에 대한 거부"라고 칭송하기 바빴습니다. 자유세계의 대변자였던 미국 대신 자신들이 자유무역을 수호하는 양 포장한 겁니다. 자국 박람회를 찾은 시진핑 주석까지 "보호주의와 일방주의에 맞서야 한다. 지속적으로 무역 장벽을 낮춰야 한다"고 말해 이런 해석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 FTA 정치·안보 효과 스스로 걷어찬 미국

여기까지가 많은 언론들이 RCEP 결과에서 '두 슈퍼파워의 갈등'을 읽어낸 근거입니다. 두 나라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는 이상 이건 국제 관계에 대한 해석의 영역으로 볼 수 있겠죠.

게다가 FTA란 게 기본적으로 경제적 사안이지만 추진 동기와 협상과정, 그리고 결과와 영향에 있어서 정치적 요인이 없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미 FTA만 해도 정치·안보상 효과가 매우 크듯이 말이죠. "맥도날드가 진출한 국가끼리는 전쟁이 없다"는 경구가 상징하듯 국가 간 시장 통합은 그 자체로 강력한 결속 효과를 낳습니다.
한미 FTA 논의아닌 게 아니라 과거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세계전략 중 하나였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에서 나온 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추진이었으니까요. 동아시아의 한국과 일본, 호주에서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 캐나다 멕시코 같은 국가들까지 높은 수준의 개방으로 묶는 강력한 경제 통합을 꾀했었죠. 이걸 스스로 멈춘 게 바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아시아의 패권을 경제 통합으로 잡을 수 있다고 본다면, 미국이 TPP 추진을 멈춘 사이 지금 RCEP에 포함된 중국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거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 "RCEP을 중국이 주도?…모르는 소리"

그런데 정말 RCEP을 "중국이 주도"했을까요? RCEP 협상 과정을 아는 전문가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RCEP의 핵심이 아세안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RCEP 협상 출범 당시 주무장관이었던 박태호 전 통상교섭본부장(법무법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장)은 "RCEP은 중국이 아니라 아세안이 운전석에 앉은 협상"이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협상 추진 속도와 범위가 모두 아세안 중심이며 중국은 물론 일본이나 한국이 나서서 뭘 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겁니다.

RCEP 타결 과정에 참여한 산업통상자원부 당국자 역시 "(중국 주도 협정이라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RCEP 자체가 '아세안 중심성'을 표방하고 있으며 "협상의 절차와 계획 등 모든 부분을 아세안이 주도했고 사무국 역할을 했다는 건 실제 협상에 임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거"라는 겁니다. 이 당국자는 "중국이 무슨 모종의 역할을 해 RCEP이 타결됐다는 시각은 소설"이라고도 말했습니다.
중국 국기 (사진=픽사베이)아시아에서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부상하게 될 거라는 전망도 무리라는 분석입니다. 아직 세부 양허 사안과 관세인하 수준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자유무역협정으로 역내를 통합하는 협정치고는 개방성이 너무 낮을 거라는 전망이 근거입니다. 정인교 인하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RCEP 역내 국가들과 이미 상당한 개별 FTA를 맺은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RCEP의 개방도는 80%를 밑도는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정 교수는 "RCEP이 중국한테 새로운 위상 강화의 매커니즘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며 "자국 내 정치적 효과 정도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남의 나라 '패권 놀음' 감상보다 중요한 건…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남의 나라의 패권 놀음을 감상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결국 우리의 득실을 철저히 따져보고 최대한 경제적 효과를 거두는 일일 것입니다. 이미 아세안 국가에 많이 진출한 우리 기업들로선 그동안 제각각이던 원산지 규정의 통일이 도움 될 수 있을 거라는 분석입니다. 지적재산권의 무덤이던 중국이 공통의 규범을 따르기로 했다는 점도 계속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예상되는 농업 분야 피해를 정확히 예측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박 전 본부장은 "GATT 체제 출범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세계 무역환경이 좋지 않고 다자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참여해 동아시아 16개국이 무역 자유화를 추진하기로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시작된 WTO 개혁 논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우리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중견국가들 간 그룹을 형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 전 본부장은 미국이 빠진 채 일본 주도로 추진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참여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시아가 가까스로 연 다자무역 논의의 장을 이어가고 열린 세계를 유지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