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인-잇] 덴마크 시선으로 본 한국 스포츠 교육의 그늘

에밀 라우센 | 한국인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15년째 한국서 살고 있는 덴마크 남자

[인-잇] 덴마크 시선으로 본 한국 스포츠 교육의 그늘
석 달 전 발목 부상을 당했다. 완전히 낫기까지 앞으로 석 달이 더 걸린다는데, 그건 반 년 동안이나 내가 운동을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해온 농구를 한동안 할 수 없다니 속상했다. 돌이켜보니 10대 이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운동을 쉬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나의 스포츠 사랑은 아주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다. 덴마크라면 도시든 시골이든 어디에나 스포츠 클럽이 가까이 있는 덕분이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 스포츠 클럽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린 시절 최고의 기억들 중 하나다.

12살이 됐을 때 나는 이미 키가 180㎝ 정도까지 자랐는데, 너무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자라면서 성장통이 심하게 왔고 몸놀림을 둔해졌다. 당시 나에게는 부쩍 커버린 신체를 균형적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고, 다른 누군가의 속도가 아니라 나만의 속도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다.

나는 축구, 배드민턴, 테니스 등 많은 종목의 운동을 하나하나 도전해가며 배웠다. 여러 종목의 운동을 다양하게 시도해보며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내게 잘 맞는 종목을 찾는 과정은 모험처럼 느껴졌다. 10대 때 학교나 이웃에서 '평생 친구'가 될 아이들을 만나는 것처럼, 덴마크에선 10대 때 '평생 친구'가 될 스포츠를 만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탐험 끝에 나는 농구를 만났고 이후 농구와 평생 친구가 됐다. 친구들과 팀으로 뛰면서 운동을 하는 것은 우선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를 돕고 격려하는 것의 가치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농구 실력이 느는 만큼 나는 정신적으로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운동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종종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국의 학생들은 운동을 잘하고 싶다면 학창시절 내내 운동'만' 하는 길을 선택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입시나 일을 위해 운동의 즐거움은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선 공부와 운동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없다. 덴마크에서 국가대표로 뛰는 사람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다른 전공이 있다. 시즌이 끝나면 직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지금 여자축구 선수로 크게 활약하고 있는 나딤은 축구 시즌이 끝난 뒤 외과의사가 되기 위해 2017년 의대에 진학했다. 이는 학교에서 운동부에 소속돼 운동만 한 게 아니라 학교 밖의 클럽에서 운동을 배우며 이를 학교 공부와 병행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운동 이외의 다른 취미 클럽도 마찬가지이다. 덴마크에선 경기나 훈련 때문에 수업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에게 대학이 특례로 입학 자격을 주거나 학점을 인정해 졸업장을 주는 일은 없다.

어린 시절 나는 NBA 선수가 되기를 꿈꿨지만 뇌종양으로 그 꿈을 포기해야 했다. 슬픈 일이었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공부를 계속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학업 아니면 운동을 선택해야 하는 환경에서 공부를 포기한 채 운동만 했었다면 당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것 같다.

내가 아는 한국인 친구들 가운데, 비슷한 경우가 있다. 프로농구 선수를 꿈꾸며 평생 농구만 하던 이 친구는 대학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하지 못한 채 결국 프로 진출에 실패했다. 많은 방황 끝에 현재는 짐을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언젠가 이 친구가 농구 외의 길을 찾아야 했을 때 자신은 농구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사회생활이 두려웠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는데, 들으면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한국의 스포츠 교육에 대해 또 안타까운 점은 학창시절 운동을 열심히 했던 친구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운동을 싫어하게 만드는 문화였다. 프로 선수의 꿈을 접은 이 친구는 현재 취미로도 농구를 하지 않는다. 힘들게 훈련했던 기억과 지독하게 혼나고 맞았던 기억 때문에 질렸다며 고개를 떨구는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문화 충격에 빠졌다.

과거 나와 함께 클럽에서 농구를 했던 덴마크 친구들 중에는 프로가 된 친구들도 또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여전히 농구를 사랑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야 하거나 실수했을 때 원망과 비난을 받고 것이 아니라 공감과 격려를 통해 다시 도전할 수 있었던 덴마크 스포츠 클럽의 분위기와 교육 방식 덕분이다.

한국의 스포츠 교육 방식이 당장 아이들이 기술적으로 운동을 더 잘하게 만드는 데에는 효과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덴마크의 스포츠 교육은 다른 목적을 향해 있다. 그건 아이들이 스포츠를 사랑하고 즐기는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적어도 운동 하나가 내 아이의 '평생 좋은 단짝 친구'가 될 수 있도록.

※ 이 원고는 인-잇 편집팀의 윤문을 거쳤습니다.

#인-잇 #인잇 #에밀라우센 #덴마크이야기
인잇소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