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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누구'의 정의를 믿을 것인가?…정의의 두 얼굴

김지미 | 영화평론가

[인-잇] '누구'의 정의를 믿을 것인가?…정의의 두 얼굴
<배트맨> 시리즈의 가장 인상적인 악당인 조커가 악당이 되기 전 자연인 '아서'였던 시절을 다룬 영화 <조커>를 보고 있으면 한 노래가 계속 머리를 울린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아서(와킨 피닉스)의 병적인 웃음 때문이다.

<뉴요커>의 리차드 브로디는 <기생충>과 <조커>가 가진 것 없는 젊은이가 자본과 권력의 불평등에 의한 사회적 부조리로 노출되면서 폭력적인 자아로 변화된다는 점에서 공통된 주제의식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완성도 면에서 봉준호의 작품이 훨씬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 <조커>는 연출자의 의도가 산만하게 펼쳐져 있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순응적인 태도와 결말을 가진 <기생충>에 비해 <조커>가 갖는 단 하나의 장점을 '웃음'에서 찾는다. 바로 조커의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웃음.

아서는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거나, 위기상황에 처하거나, 무대에 서는 것처럼 긴장 상태가 되면 폭발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느닷없고 맥락에 맞지 않는 그의 웃음은 주변 사람들의 불쾌한 이목을 집중시키고, 반감과 공격성을 자극한다. 그는 그런 때를 대비해 자신의 웃음이 병리학적인 이유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메모를 들고 다니지만 상대방의 불쾌감은 줄어들지 않는다.

이 웃음은 아서가 처한 비참한 상황과 광대라는 직업 사이의 부조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와킨 피닉스는 얼굴은 찢어질 듯 벌어진 입술과 얼굴의 모든 근육이 동원된 고통스러운 웃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곧 눈물을 쏟아질 것 같은 슬픈 눈빛을 잊지 않는다. 덕분에 조커의 웃음은 스크린 위에서 여태까지 우리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슬프고 처절하며 기괴한 웃음으로 기억될 듯하다.

아서의 웃음은 일종의 방어 기제다. 어린 시절부터 중년으로 접어든 현재까지, 비극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아서의 삶이 그에게 선사한 분노와 절망을 억지로 덮어주는 싸구려 향수 같은 것이다. 그의 웃음이 유발하는 낯선 적막은 그가 더 큰 갈등을 회피할 수 있는 도구가 되곤 한다. 그가 총이라는 폭력적인 도구를 손에 넣기 전까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서는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폭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서를 무시하고, 해고하고, 모욕하고, 물리적인 폭력까지 가한다. 아서는 광대라는 직업의식과 어머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슬플 때 오히려 더 크게 미소 짓는 법을 연습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은 온통 거짓이었으며 그가 속한 사회는 한 번도 그를 따듯하게 안아 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가까스로 버텨온 그의 자아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특히, 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에게 인간적 모멸을 당한 뒤 그의 분노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된다.

인간 아서가 조커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불가해한 사이코패스 같던 조커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가 고통을 겪는 모든 과정에서 사회는 냉담하게 등을 돌렸고, 시스템은 외면했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조커 가면을 쓴 고담시의 시위대 목소리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고담시의 부를 거머쥔 토마스 웨인은 TV에서는 정의롭고 관대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화장실 마주친 아서를 대할 때는 냉혈한이 된다. 두 얼굴의 온도차를 접하고 나면 우리도 고담시의 시위대에 슬쩍 목소리를 얹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들이 쓴 조커 가면이 <V 포 벤데타>의 정의로운 가면과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정의는 결코 결과지향적으로 획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주장하는 이의 목소리가 아무리 진실하고 심정적으로 동조할 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아서의 슬픔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가 든 총을 지지할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다크 나이트>의 투 페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배트맨> 시리즈는 늘 '정의'의 두 얼굴에 주목한다. '정의'는 얼핏 보편적인 가치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의의 내용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이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적인 정의를 믿는 대신 실질적인 절차를 규정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이것은 단지 <조커> 같은 할리우드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보고 매일 보고 있는 정치 사회면의 뉴스가 대부분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정의를 믿을 것인가, 최저 방어선이 되어줄 시스템을 바로 세울 것인가. <조커>는 왜 우리가 개인적 정의가 아닌, 시스템을 지지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영화 <조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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