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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이번 생은 글렀다? 류현진처럼 생각해보자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인-잇] 이번 생은 글렀다? 류현진처럼 생각해보자
'안타 안타 쌔리라 쌔리라'

처음 야구장에 다녀온 날, 아이들은 잠들기 직전까지 응원가를 불러댔다. 마치 승리의 기쁨에 신난 것 같았다. 자신과 동생 외 유일하게 이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이대호였던 첫째는 입장 전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롯데가 14대 0으로 이겼으면 좋겠어!"

하지만 현실은 잔혹한 법. 두산은 강했고, 우리 아이들의 첫 직관은 무기력한 대패로 끝났다. '첫 야구장 경험이 이렇게 되다니…. 한화와의 경기를 예매했어야 했는데'란 후회에 한숨이 나오던 순간, "이길 때까지 오면 되겠네!"라고 웃으며 말하는 아이의 모습은 깨우침을 주었다. 같은 상황을 어쩜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롯데 팬 1년 차여서, 아직 경쟁을 몰라서? 꼭 그 이유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스포츠 경기장에 가보면 같은 결과에도 다양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욕설을 퍼붓는 사람, 포기한 듯 일찍 나가는 사람, 멍하니 자리를 지키다 축 늘어진 채 나오는 사람 등등. 그런데 이날 소수의 롯데 팬들이 유독 인상 깊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승리의 개선 행진을 하듯 신나게 응원가를 부르며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10분 전 패배에서 비롯되는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마치 아이들처럼.

패배에 익숙한 꼴찌 팀 팬들의 정신승리 방식이라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정신과 의사인 나의 눈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게 보였다. 그들이 바로 현대 정신의학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Here and Now'(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사람의 생각은 자꾸만 과거와 미래로 향한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분들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들의 과거와 미래이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것만 아니었다면 지금 인생이 이렇지 않을 텐데.' 어린 시절의 갈림길에서부터 당장 오늘 아침의 선택까지. 과거를 끝없이 후회하고 자책하지만 바꿀 수 없기에 결국 돌아오는 것은 무력감과 우울감이다.

한편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를 자꾸 불안하게 만든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나름 대비해 보지만, 절대 예측대로만 흐르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우울과 불안으로 채운다. 너무도 소중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 바로 이 순간들을.

환자분들 중에도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를 떠올리며 부족했던 자신을 탓했다. 20대 중반에도 그는 여전히 학창 시절의 기억들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말했다.

"지난주에는 야구장에 다녀왔는데, 야구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 생각했어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뭔가 깨닫게 되더라고요. 방금 전 회까지 지고 있어도 이번 회에 뒤집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전 시즌 꼴찌를 해도 이번 시즌에는 또 새롭게 열심히 하잖아요."

그가 야구에서 주목한 점은 팀 순위와 점수가 어떻든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 그는 약간씩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가 아닌 현재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찾아낸 현재에 집중하는 삶의 롤 모델인 야구 선수들, 그중에서도 진정 과거를 잘 털어내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류현진 투수이다. 직접 이야기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그의 인터뷰에는 현재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홈런을 잘 맞지도 않지만, 가끔 허용했을 때의 인터뷰는 이런 식이다.

"홈런 맞은 공은 실투였는지?"

"아니에요. 잘 던졌는데, 상대방이 잘 쳤어요."

참 간단하면서도 대단한 사고방식이다. 내 탓이 아닌 상대방 탓이기 때문에, 자책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나간 타자가 아닌 눈앞의 타자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호투를 이어가던 이번 시즌 중반에는 이런 인터뷰도 했다. 부진했던 과거 경기를 아쉬워하는 야구팬들의 마음을 담아, 기자가 이런 말을 던졌다.

"이렇게 잘하는데, 쿠어스필드 한 번 부진이 큰 타격이 됐네요."

"올해 지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딱 그거 한 가지에요. 그러나 그런 경기가 있어야 다음 경기에 집중할 수 있고, 한 번씩 당하면 집중하는 계기가 되는 측면도 있어요."

그도 사람인지라 후회는 하는가 보다. 하지만 약간의 남 탓, 약간의 자기합리화를 통해 더 이상 과거에 머물지 않게 만드는 사고방식. 이것이 그를 비슷한 피지컬의 다른 선수들보다 더 특별한 투수로 만든 원동력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야구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지나간 과거가 어쨌든 다음 타자가 누구든 현재에 집중해야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해야 한다.

이번 인생은 글렀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9회 중 2, 3회에 야구장에서 나가는 사람은 없다. 초반에 많은 것이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심심찮게 역전 경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집중력 있는 한 회에 경기를 뒤집는다. 우리의 삶 또한 현재에 집중함을 통해 같은 시간을 훨씬 길게, 알차게 살아낼 수 있다.

문제는 알아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파도에 휩쓸리는 돛단배처럼 우리의 생각은 자꾸만 과거와 미래로 휩쓸려간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글의 서두에 소개했듯, 우리에겐 아이 때부터 현재에 집중하는 능력이 있었다. 다만 그 방법을 잊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서 현재에 닻을 내리는 구체적인 수단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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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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