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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투자자는 객…장관 인삿말 우선한 '소부장 피칭 데이' 유감

관제 행사 반복하면 성과 거두기 어려워

[취재파일] 투자자는 객…장관 인삿말 우선한 '소부장 피칭 데이' 유감
스타트업들은 수많은 경쟁자 사이에서 '전주(錢主)'의 눈길을 끌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다. 자기 사업을 적극 내세워야 한다. 피칭(Pitching·사업 설명)이 중요한 이유다. 투수가 공 던지는 행위를 일컫는 다른 뜻처럼, 투자자에게 자기 사업 내용과 비전을 효과적으로 던져야 한다. 10장 이내 피치 데크(Pitch Deck·발표 자료)를 활용해 핵심만 전달하는 기술은 기본, 승강기에 함께 탄 기회를 가정한 30~40초짜리 '엘리베이터 피치' 연마도 필수다. 열심히 준비한 수많은 스타트업과 투자자들이 함께 하는 '피칭 데이'도 이제 흔한 일이 됐다.

지난 16일 중소벤처기업부와 대·중소기업 상생협의회가 연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피칭 데이'는 그래서 여러모로 아쉽다. 강소 기업을 대기업이나 벤처 투자자(VC)들과 연결해 일본 수출 규제 파고를 넘겠다는 뜻으로 열린 행사지만 효과는 의문이다. 서로 업종 다른 8개 사가 단지 소부장이란 명목으로 뭉뚱그려 불려 나와 벌인 피칭은 산만하기만 했다. 피칭 데이라는 업계 형식에 얽매여 단 5분의 발표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마저도 지키는 회사가 없었다. 이런 형식에 익숙하지 않은 듯 어지러운 내용이 가득한 발표 자료를 읽느라 시간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6일 서울 강남구 팁스타운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 피칭 데이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관제 행사가 대부분 그렇듯, 청중석 맨 앞줄은 중기부 장관과 이런저런 협회장이 차지하고 앉아 예의 '귀빈 인사말'로 시간을 보냈다.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50여 명의 대기업 관계자와 VC들은 객으로 전락해 멀뚱히 서서 지켜보다 자리를 뜨기도 했다. 한 대기업 구매부서 실무자는 "마이크 음향 상태가 좋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도 귀에 안 들어오고, 무엇보다 우리 회사랑 아무 관련 없는 곳들이라 먼저 간다"며 "중기부가 오라고 해 왔지만 소득은 없다"고 말했다.

참가 기업 스스로 어떤 대기업과 투자자를 상대로 피칭하는지도 모르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한 참가 기업 대표는 "우리 기술을 써 줄 회사를 찾아왔는데 나도 어떤 회사가 나와 있는지 모르겠다"며 "무슨 행사가 이러냐"고 푸념했다. 이에 대해 중기부 담당 사무관은 "대기업들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의지가 있다는 걸로 일본에 알려지는 게 좋을 게 없어 참가를 비밀에 부쳐 달라 했다"고 말했다. 행사 사회자는 대신 "피칭 업체 평가표에 기업명을 잘 남겨주면 나중에 맞춤 연락을 드리겠다"고 공지했다. 미팅 상대방을 모르는 채로 재롱을 부리는 TV 맞선 예능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래도 민간 기업인들의 날카로운 눈은 어수선한 가운데 소기의 성과도 기대하게 했다. 업체 발표에 여러 차례 손들어 질문하며 관심을 보인 효성 구매담당 이종훈 상무는 "처음엔 우리 회사랑 별 상관없는 곳들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와서 들어보니 두 군데 정도가 우리 사업과 접목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며 "취지가 좋은 행사니만큼 다음엔 더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기부는 "소부장 피칭 데이가 앞으로 11월 반도체, 12월 디스플레이, 내년 1월 자동차 업종으로 이어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행사처럼 중기부와 협회가 일방적으로 선정한 업체들이 계통 없이 모이는 관제 행사에 그친다면 큰 소득을 거두긴 어려워 보인다. 여러 단계 공개 피칭을 거쳐 선발된 업체들이 사활 걸고 뛰어들고, 이런 기업들을 찾아온 자발적 투자자들과의 상호 교류로 흔쾌히 지갑이 열리길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업계 자생력을 기르기보다 가두리 양식하듯 지원금 살포만 하면 창업 대국이 되고 유니콘이 생긴다고 믿는 평소 정부 벤처 정책의 현주소를 보여준 피칭 데이였다.

(사진=중소벤처기업부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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